복부를 몇 차례 맞은 것 같았다. 문득 예전에 맞았던 그 매서웠던 아픔이 생각났다.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어깨에 달린 계급장이 보인다. 짝대기 세 개… 이어 시선이 평행선을 그리며 이동된다. 그의 이름이 보인다. 그는 나상병이로구나. 이번에 수직으로 시선을 끌어올린다. 그의 검은 목, 턱, 그리고 입술이 나타난다. 수염이 거뭇거뭇한 인중을 지나 날카로운 코끝과 그 콧날을 지나 그의 독사 같은 눈초리와 마주했을 때… 그다음엔 기억이 없다. 귀에 윙윙거리는 호들갑 떠는소리들과 분주히 움직이는 발걸음이 어렴풋이 있었던 것 같다. 그다음은 정말 모르겠다. 몇 차례의 고통과 함께 난 그대로 고꾸라졌으니까. 그날 밤엔 어설픈 잠을 청했다. 그와의 재회로 인해 잊었던 옛 기억을 하나씩 더듬어가면서…
그는 옛날 그대로의 모습처럼 독종이었다. 간부들 조차 그를 슬슬 피했으니 우리들이야 오죽했으랴? 그의 매서운 눈초리는 우리에겐 사형선고와 같았다. 그의 까닥거리는 손가락질에 항상 이끌려 다녀야 했고, 그의 뜻 모를 미소에 가슴 졸이며 지내야 했다. 몇 차레 영창을 갔다 왔지만 그때마다 그는 더욱 난폭해졌다. 마치 재생의 장소인양 새로운 살기를 품어가지곤 나왔다. 이젠 아무도 그에게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내 어린 시절을 드리웠던 그때의 모습으로 날 휘감기 시작했다. 그는 그 시절처럼 아무의 간섭도 받지 않는 무법자의 모습을 또다시 내게 보여준 것이다.
기차가 멈춘다. 어느 역일까? 궁금하다. 창밖을 내다보고는 이내 안심을 한다. 아직 내겐 시간이 있다. 꼭 물어볼 것이 있는데.. 하지만 쉽지 않다. 처음 그네에게 그 말을 했었을 때만큼이나, 인도인들은 만물이 창조와 유지, 그리고 파괴의 세 가지 과정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이 세계가 돌아간다고 믿고 있다고 한다. 창조의 신인 바하르마가 세상을 창조하고, 비슈누가 그것을 유지시키고 쉬바가 그것을 파괴한다곤 하지만 이 세 신들이 동격은 아니다. 바하르마가 이 두신의 위에 있고 나머지 두신의 그의 왼편과 오른편에 위치한다고 하나 아무래도 창조가 가장 가치 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난 지금 창조의 과정에 있다. 이 기차가 멈출 때쯤이면 내 창조의 과정도 끝을 맺으리라. 그리고 유지의 과정에 들어가겠지. 그런 후에 언젠가 파괴의 과정이 찾아오겠지. 그녀가 날 빤히 바라본다. 그네의 얼굴엔 미소가 참 잘 어울린다고 항상 생각해 왔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만을 간직하게 해 주고 싶다. 내 영혼 속에 쉬바는 없다.
“야 큰일 났다! 빨리 가자!”
아직 보초교대 시간이 20여분이나 남았음에도 남상병은 화장실도 못 가게 하고는 무척이나 날 재촉했다. 군화끈을 질질 끌며 초소에 달려가면서 문득 그날이 생각났다.
“누가 늦게 나온 거냐?”
나직한 목소리다. 그 옆에 최일병이 긴장된 모습으로 서있다.
“…..”
심장이 꿰뚫리는 느낌! 그의 시선이 나의 심장을 바라보기 때문이리라. 나는 가만히 시선을 끌어올려 그의 시선을 맞받아본다.
“이 새끼가 뭘 잘했다고 눈을 부라려!”
뺨이 두어 차례 화끈거렸고 이내 난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너도 똑같아. 이 개새끼야!”
남상병도 내 옆에 나뒹굴었다.
“씨발. 이 새끼들이 또 성질 돋우네!”
그가 총을 내던진다. 그리고 팔을 걷어붙인다. 그리고 눈동자를 나에게 고정시킨다.
“가만… 너 어디선가…”
처음 보는 그의 표정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얼굴의 주름들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풀리는 순간이었다. 마치 무언가를 기억했다는 듯하구나.
‘그래. 기억해라. 어린 시절처럼 땡전 내놓으라 말해라. 그리고 그때처럼 돌을 들어 내 머리를 짓이겨라'
난 그를 안다. 그도 날 알 것이다.
나광수- 내 기억 속에서 두려움의 존재로 남아있던 녀석. 그 존재가 지금 내 눈앞에서 그걸 확인시켜주려 한다. 이젠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침묵이 흘렀다. 남상병이 일어났다. 옷매무새를 고치고 녀석의 총을 주워가지곤 알뜰히도 흙을 터어서 공손히 가져다준다. 하지만 녀석은 정지상태다.
‘무얼 꾸물거린단 말이냐? 기억해라! 그리고 나에게, 그리고 너 자신에게 확인시키란 말이다.’
“이 살인자야!”
내가 소리쳤는지 확실히 기억할 순 없다. 하지만 목구멍 밖으로 넘어오는 그것을 몇 번이나 되넘겨버린 건 안다. 하지만 이내 난 그의 눈빛이 번쩍거리며 경련이 스쳐가는 것을 보았다. 나의 이마에, 그리고 녀석에 이마엔 송골송골 땀이 맺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