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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마끼끼 Oct 02. 2024

만남

그렇게...설레다.

  “No man can give himself what he doesn’t have and no man can go from what he does not know to what he want to know without overwhelming confusion, unless he has a good plan.”

 “계획이 없다면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고... 자신이 뭘 원하는지 모른다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맞나요? 멋진 말이네요,”

  어느샌가 내 옆에 그녀가 있었다.

  “새로 온 분이신 모양이시죠?”

  “예… 어제…”

  “전 경리부에서 근무해요.”

  “에. 전 저 서진석 회계사님 옆 사무실입니다.”

  “아…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럼 다음에 또 봬요.”

  참 상쾌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간직하고 있는 것을 칭찬해 준 것 같이 고마웠다.


  제대 후 난 평범한 길을 택해야 했다. 주위에 휩쓸렸는지도 모르겠지만 회계사 공부를 하게 되었고, 자질이 있었던지 운이 좋았던지 다행히 어렵다는 공인회계사 시험을 무난히 통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제부로 이곳 회계법인에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사회에 몸을 내던진다는 것이 나에겐 신선했다. 목표부재였던 시기가 이제는 어떤 목표를 가지게 된 시기로 바뀌었다고 할까? 아무튼 난 무척이나 흐뭇했다. 몇 번이나 죽어야 했던 목숨이 붙어있는 건 누군가 날 필요로 해서이기 때문이 아닐까? 난 그래서 내 삶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 그래서 목표가 생겼다. 그들의 누이를 찾아내리라.


  기차가 구부러진 철로를 달린다. 덕택에 그녀의 몸이 내 가슴으로 와닿는다. 아직도 짜릿하다. 평생 이런 짜릿한 기분을 느끼며 살아야 할 텐데… 난 아직도 그녀 앞에서 긴장한다. 방금 또 말을 더듬었다. 친구들은 모두 내가 달변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그녀에겐 난 항상 말더듬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네의 기억 속에서 나는 항상 말더듬이로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유동부채가 400%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며 고정자산에 투입되는 현물가치가 감소되기 때문에 결국은 자산가치가 네 배가 되니까 충분히 이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 하지만 그런 표면적인 수치만으로 평가되기엔 좀 이른 것 같네만…”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환율문제가 나아지고 있으면, Moodis에서 평가한 자료에 따르면…”

  대만족이었다. 열심히 일한 덕분이리라. 내 판단에 그들이 동의해 준다는 게, 고개를 끄덕여 준다는 것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 나의 것들이 인정받는 것이 곧 나의 모든 것이 인정받는다는 느낌이었으니까. 그날은 회식이 있었다. 신참이었기도 했지만 내가 주인공이라는 말을 듣고는 빠질 수가 없었다. 망설임이 있을 수 없다.

  “자. 우리 모두 환영의 뜻으로…”

  크게 건배의 외침과 함께 박수소리. 어느새 난 일어나 있었다. 노래를 부르려 했던 것 같았다. 노래를 하는 내 모습에 눈동자가 느껴졌다. 슬쩍 눈동자를 따라갔다. 내 눈동자엔 이내 붉은빛이 감돌았다. 그날 얼마를 마셨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 아침엔 어머니의 잔소리와 함께 시원한 북엇국을 들이켰다.


  “노래 잘하시던데요.”

  그녀다. 허리를 들며 그녀를 바라본다. 23살? 24살? 뒤로 정갈하게 빗어 넘겨 묶은 머리가 차분해 보이는 여자였다.

  “아… 예 감사합니다. 복사하시려는 모양이시죠?”

  그녀는 서류꾸러미를 함아름 들고 있었다. 나도 한아름.

  “예. 좀 많으시군요.”

  “급하면 먼저 하시죠? 어차피 딴 것도 할 것 있고… 뭐 그것하고 나면 대충 끝나시겠군요.”

  “아니에요. 먼저 하세요. 기다릴게요.”

  그녀는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꼭 나에게 인사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이내 난처한 얼굴을 하고서는.

  “죄송하지만… 제가 먼저 해야 할 것 같네요. 빨리 해서 가져다줘야 하기 때문에…”

  난 싱긋 웃었다. 그녀도 내게 미소를 보였다. 잠시 붉은빛이 어렸다.


  또 내 눈동자는 붉은빛을 느낀다. 왜 난 그네의 입술을 그토록 바라보는 걸까?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리곤 볼을 부풀리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보인다. 내가 심심해 보이나 보다. 농담이라도 해주고 싶건만 그 많던 얘기도 그녀 앞에선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가 내게 얘기를 한다. 그리고 웃는다. 나도 한바탕 웃는다. 속이 시원하다. 나에게 빛을 준 사람이 지금 내 앞에서 웃는다. 얄밉게도 나까지 실컷 웃게 만들어버리고서는.


  집에서 사무소까지는 대략 1시간이 걸렸다. 물론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혼자 있는 게 익숙하긴 하였지만 지루함과 별도의 문제였다. 외로움은 견딜 수 있었으나 무료함은 싫어했으니까. 그러다 집으로 가는 전철 안에서 그녀를 보게 되었다.

  “어머. 집이 이쪽 방향이신가 보죠?”

  “예. 그쪽도 이리로 가시는가 보군요?”

  “예. 사실은 얼마 전 이사했거든요.”

  그리곤 살짝 미소를 짓는다. 무척 잘 어울린다는 인상을 받았다. 난 사람 쳐다보는 걸 참 좋아했다.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을 보면서 어떤 사람일까 생각하고 그는 과연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 걸까 하는 엉뚱한 생각에 빠지길 좋아했다. 내 앞에 그 대상이 서 있었다. 윤기 나는 긴 생머리를 단정히 묶은 모습은 무척 차분해 보였다. 몸집은 약간 큰 키에 말랐지만 결코 약해 보이진 않았다. 눈동자엔 무언가를 항상 생각하는 기운이 감도는 듯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녀의 눈동자가 지금 생각에 잠겨있다. 눈동자 속 깊이 빛이 모인다. 분명 무언가 생각을 하고 있는 뜻이렸다. 궁금하다. 하지만 묻지 않는다. 그네가 더 열중할 수 있도록 조용히 해야겠다. 숨소리도 내지 말아야지…


  변화와 새로움으로 다가왔던 나의 사회생활도 이젠 점점 의미가 없어져갔다. 무언가를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예전처럼 그 무언가는 내 잠재의식 깊은 곳에서 빠져나오질 못했다. 아니 그걸 꺼내는 것이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담배를 태우게 되었다.


  “담배… 너무 많이 피우시면 안 좋아요.”

  고개를 돌렸다. 빨간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눈동자를 재빠르게 돌린다.

  “아… 예.”

  담배를 껐다.

  “어머. 그냥 조금만 피우라고 한 것뿐인데…”

  굉장히 미안해한다. 이런! 내가 더 미안해지고 있었다.

  “점심식산 하셨어요?”

  “아직요. 뭐 별로 먹고 싶은 것도 없고, 하긴 제때 챙겨 먹는 것도 힘들거든요. 이따 간단히 뭐라도 먹어야

   죠.”

  “그러시면 안 돼요. 제때 챙겨 드셔야죠. 일보다 건강이 중요하잖아요.”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얼굴을 약간 찡그리고 있는 모습이 정말로 날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 같다. 다시 한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왠지 따뜻한 느낌도 들었다.

  “저도 아직 식사 전이거든요. 저만 빼고 모두들 쏙 가버렸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가는 길인데 괜찮으시다면

   함께 가시죠. 바로 요 앞인데…”

  어느덧 그녀와 마주 앉아 있었다. 알뜰히도 식사하는 그녀가 참 보기 좋았다. 다 먹은 내 밥공기 위엔 그녀의 모락모락 김이 나는 하얀 쌀밥이 놓여있었다.


  사무실 창문 밖을 유심히 쳐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현재로선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곤 귀를 쫑긋 세우는 버릇도 생겼다. 발자국 소리가 난다던가 정갈하게 빗어 묶은 머리가 보이기라도 하면 난 당장 뛰쳐나갈 기세다.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사춘기 소년마냥… 이젠 안 봐도 그것이 누구 것인지 구별할 정도의 달인이 되었다.


  “안녕하세요?”

  “어머! 안녕하세요? 어쩜 이렇게 자주 마주칠까요? 오늘 벌써 4번짼데요.”

  “하하. 뭐 인연이 있나 보죠. 뭐.”

  가볍게 미소 짓는 얼굴에, 나를 밉지 않게 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혹시 이 영화는 보셨나요? 마침 표가 2장 생겼는데 같이 갈 사람도 없고 해서요. 여유 있으시면  함께 가시

   면 어떨까 해서요.”

  “예. 그렇게 하죠. 저도 이 영화 보고 싶었던 건데… 대신 제가 차 살게요.”

  “아이고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가자고 하는 건데요, 뭐.”

  “아니에요. 거절하시면 저 안 갈지도 몰라요.”

  “… 그럼 뭐 그렇게 하죠.”

  둘이 한바탕 웃었다. 참 상쾌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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