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사랑하다.
난 꿈을 꾸고 있는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갑자기 환각에 빠지려는 걸까? 뒤섞인 영상들에 잠깐 머리가 어지럽다. 그네가 나의 목덜미를 잠시 토닥거린다. 요즘엔 가끔씩 배근식과 나광수의 환영이 자주 떠오른다. 그리도 그들 사이엔 꼭 한 사람이 있을만한 공간이 남아있다. 난 그 공간에 생각나는 대로 아는 사람들을 집어넣어 보았지만 누구도 그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참! 그녀를 집어넣어 보자. 그녀의 빨간 입술이 내 손등을 잠시 스친다.
여자는 2주일을 병원에서 보냈고 그 이후에도 석 달가량 목발에 의지해야 했었다. 완쾌되던 날은 공교롭게도 여자의 생일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녀의 집으로 초대를 받았다. 좋은 집은 아니었지만 정갈하고 아담했다. 그녀만큼이나 화려한 기구나 치장 없는 검소한 살림이었다. 벽엔 조그만 사진들이 몇 장 붙어있다.
“아버지세요. 저 중학교 때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대요. 절 낳다가…”
“… 참 인자해 보이시네요.”
“예… 술 자시면 항상 고향이야기를 하셨어요. 언젠가 많이 취하셔서는 너도 니애미랑 오빠들 보고 싶지 하
셨는데 그래서 저도 어딘가 내 혈육이 있나하는 희망을 갔게 되었죠. 나중에 아버지께서 술김에 하신 얘기
라고 하셨지만요. 그래도 어딘가에 날 알고 내가 알 수 있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고 살아요.
힘들 때면 그런 생각에 힘도 되고요. 저 웃기죠?”
살짝 미소 짓는 그녀의 눈가에, 그리고 눈동자에 투명한 빛이 발한다. 말없이 그녀를 껴안아본다. 이내 그녀는 훌쩍거린다. 그리곤 눈가를 씻으며 살짝 웃는다.
“배고프시죠. 잠깐만 기다리세요.”
창밖으로 계속해서 풍경이 보인다. 예전부터 방 안에서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왜 좋아했는진 모르겠다. 아마도 어렸을 적 길가를 지나다 우연히 봤던 창밖을 내다보며 담배를 피우던 파리한 여인의 모습이 인상에 남아서일까? 담배를 태우며 창밖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은 재미있다.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어딜 그리 급히 가는지, 누굴 만나러 가는지 등등의 생각으로 지루한 시간을 달랠 수 있었으니까. 비가 오는 날 비 오는 거리를 구경하는 건 또 다른 재미다. 사람이 별로 다니진 않지만 또닥거리는 빗소리가 좋고 가로로 또는 약간 비스듬히 떨어지는 모양이 재밌다. 그리고 가끔은 생각해 본다. 저 빗속에서 서있어 보리라. 그녀의 고개가 살짝 나의 가슴으로 떨구어진다. 그네도 창밖을 보는 것이 좋다고 했다. 많은 것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들을 바탕으로 또 다른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며 웃곤 했다. 창밖으로 보는 세상은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듯하다며… 창밖으로 풍경이 지나간다.
연말이란 항상 바쁜 시간이었다. 회계기간이라는 것이 항상 12월 31일을 끝으로 종료되기 때문에 이때쯤이면 정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남들은 망년회다 크리스마스 다하며 즐겁게들 지내는데 이건 원…”
같이 업무를 맡게 된 이정세 회계사였다. 난 그냥 그에게 웃어 보였다.”
“우리 대충 빨리빨리 하자구. 대기업들이란 뭐 이렇게 부풀려놓은 게 많아가지고…”
“…”
“참. 그런데 오늘 나랑 잠깐 할 얘기가 있는데…”
“어떤 얘긴데요.”
“지금 말하긴 뭐 하고 이따 [레드넥]에 가서 잠깐 얘기 좀 하지.”
“그러죠.”
늦은 밤임에도 안은 탁한 공기에 진한 술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바텐더가 우릴 반갑게 맞이했다.
“항상 먹던 걸로.”
“같은 걸로 주세요.”
스트레이트 한잔씩을 앞에 놔두고 무거운 침묵이 다소 흘렀다. 그는 단숨에 컵을 비우더니 한잔을 더 주문했다. 그리곤 입을 열었다.
“예전에 있던 법인에서부터 봐주던 일이었는데 재무제표 좀 약간 뻥튀기시키자고… 뭐 워낙에 큰 대기업이
라 약간 뻥튀기시켜도 티도 안 나고 그래야 기업도 좋은 거고 우리한테도 오는 게 있으니까. 어때? 한번 해
보겠어?”
“감리에서 들통날 게 뻔한데 왜 그런 일을 합니까? 그리고 그런 일을 하는 것 자체도 내키질 않습니다.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맡고 있는 이건에 대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정확히 할 테니
그런 말씀일랑 안 해주셨으면 합니다.”
“아니. 이 사람아. 내 말 좀 들어보게나.”
“일어나겠습니다.”
그의 얼굴을 한대 갈겨주고 싶었다. 침이라도 뱉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지금까지의 인생을 한순간에 더럽힐 수는 없었다.
회계감사가 끝난 직후였다. 부장이 나를 급히 찾는다는 말에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시오…”
낮은, 그러나 무거운 정적이 잠깐 흘렀다.
이번 감사건… 자네랑 이정세 회계싸랑 같이 했다지?”
예… 그렇습니다만…”
“뜸 들이지 않고 말하겠네… 재무제표가 잘못 작성되는 바람에 큰일이 일어났다네…”
“예!! 그럴 리가…”
“알고 있네… 이정세 회계사가 했다는 거… 이 세계에서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니깐… 하지만 이번엔 좋지
않아. 재무제표만 믿고 자금을 대출해 줬던 은행들이 기업의 실사를 벌인후에 자금회수 능력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고… 지금 금감원에서 감리 통보가 온 상황이네.”
“그렇다면..?”
“결과가 좋지 않을 것 같아… 상징된 기업이기 때문에 주식도 폭락했고… 당장 부도 위기에 처 해 있다네.”
“….”
“아마도 자네에게 불똥이 튈 걸세… 이미 이정세 회계사는 조사받고 있고… 자네도 아마 방관했다는 이유만
으로도…”
그렇다. 며칠 전부터 이정세 회계사가 보이질 않았다. 어디 휴가라도 갔으려니 생각하고 있었건만…
재판은 다음 주였다. 이정세 회계사는 징역이 확정되었고, 나에게도 얼마간의 구속과 면허정지가 있을 거란 변호사의 말이 있었다.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리곤 창밖을 내다보았다. 저 사람들은 지금 어딜 가는 걸까?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살까? 내가 죽어도 저 사람들은 오늘처럼 바쁘게 이곳을 지나쳐가겠지…
여자는 매일 면회를 와주었다. 출소되는 날, 난 그녀를 껴안았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기다렸어요…:
내 기억 속의 언젠가처럼… 배근식과 나광수와도 같이 그녀는 나의 생명을 포기하지 않도록 나의 손을 붙잡아주고 있었다. 나는 이로써 또 한 명의 사람에게 빚을 진 것인가? 난 말없이 웃었다
“… 사랑합니다…”
그녀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그녀의 뒤로 그들의 얼굴이 보인다. 웃고 있었다. 내 삶에 드리워졌던 그들에 대한 빛을 이젠 보상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는 기차에 올라탔다. 나와 그네의 고향에서 무언가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는 작은 일념하에서 조그만 발자국을 하나씩 옮겼다. 그리곤 정해진 좌석에 앉았다. 그네는 창가 쪽을 원했고 나는 그 옆을 택했다. 난 그녀에게 물어볼 것이 있었다. 그녀가 과연 배근식과 나광수의 핏줄인지를… 그녀가 그 빨간 입술을 가졌던 그들의 여동생이었는지를…
종착역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창밖으로 땡전 내놓으라는 땡수와 콩알탄에 도망가는 배근식이 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나에게 ‘어서’하는 시늉을 한다. 이젠 물어봐야겠다. 종착역을 향해 기차는 우리를 어렸을 적 삶의 공간 속으로 느릿느릿 이끌어가고 있었고, 그들의 빨간 입술은 나를 향해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저 혹시…”
흐뭇한 구름이 하늘에 걸쳐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