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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마끼끼 Oct 04. 2024

다짐

그렇게...마음을 주다.

  아침부터 약간 흐리더니 결국은 비가 왔다. 어머니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우산을 놔두고 나온 것이 그렇게 후회가 될 수가 없었다. 극장 앞에서 난 난처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봤다. 여자가 이내 나온다.

  “어머 비가 많이도 오네.”

  “…”

  “우산 가져오셨어요?”

  “아뇨. 계속 올 것 같은데… 그냥 가야죠. 뭐.”

  “안 돼요. 저랑 같이 쓰고 가면 돼요.”

  그녀의 핸드백에서 연분홍의 삼단 우산이 나왔다. 결국은 머리만 우산 속으로 피한 체 비란 비는 다 맞고 왔다. 작은 우산 속에서 여자의 숨결을 느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옷깃이 스칠 때마다 전류라도 흐르는 듯하다. 내 가슴속엔 뭐가 신선한 것들이 최고로 발하고 있었다. 그녈 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녀 어깨에 가만히 손을 올려본다. 파르르 떨린다. 나의 손도, 그녀의 어깨도. 이내 멈춤은 없어지고 작은 숨소리만 들린다. 나의 작은 행동이 우리 둘을 벙어리로 만들었나 보다. 서로 마주 보지도 못한 채 난 무심히 어깨에서 손을 내리려 한다. 때마침 그녀가 등을 의자 쪽으로 바싹 기대어 팔을 내릴 공간이 없어진다. 아! 당분간은 벙어리로 가야겠다. 작은 숨소리만 여전히 새근새근 들린다.


  이젠 더 이상 창밖을 보지 않았다. 보고는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여자를 왠지 피하게 되었다. 내 시선은 갈 곳을 잃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아… 예” 

 피할 수가 없었다. 바로 앞에서 마주쳤으니까.

  “…”

  서로 말이 없었다. 슬쩍 비켜가려는 나의 소매를 여자가 잠깐 잡는다.

  “피하지 말아요…”

  여자의 눈동자가 나의 시선과 부딪힌다. 나는 피하지 않았다.


  “피하지 않겠어요.”


  산공기가 제법 상쾌했다. 이젠 여자와 팔짱도 제법 껴가며 걸어 다닌다.

  “날이 많이 어두워졌는데 그만 내려가야 하겠는걸요.”

  “내려가는 것보단 조금만 올라가면 산장이 있으니까 거기서 하룻밤 쉬자고요.”

  불안해하는 여자를 확신 어린 어투로 이끌고 나갔다. 산의 기상이란 지금 생각해도 참 변덕스럽기 그지없다. 맑은 하늘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날은 갑자기 어두워졌다. 산장으로의 방향은 제대로 인지도 알 턱이 없었다.

  “큰일 났는걸. 서둘러서 가보지요.”

  말은 했지만 내 가슴도 불안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자는 달랐다. 나에게, 나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거라는 터무니없는 확신 어린 눈빛!


  그녀의 눈빛을 본다. 언제나 변함없다. 나를 믿어주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스럽다는 눈빛이다. 그렇다. 나는 네 인생의 한 부분을 그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일들을 나는 어김없이 해냈다. 피를 흘려서라도 그녀 앞에서 약해지고 싶지는 않다. 끝까지 그네를 지키는 사람이 되리라. 그녀가 기대하는 그런 사람으로서 영원히 살아가리라.


  여자의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나는 무슨 힘이 들어갔는지 여자를 이끌고 한밤의 비 오는 산중을 확신 어린 발걸음으로 이끌고 나갔다. 멀리 불빛이 얼핏 보이는 것 같았다. 아! 산장이었다. 여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나에게 감사의 눈물을 보이는 것 같았다.

  “아이코, 힘들게 오셨습니다. 지금 난리가 아니에요. 조난자도 꽤 생겼다는데…”

  산장 아저씨는 천만다행이라며 우리에게 커피를 한잔씩 대접했다. 피곤에 마시는 커피여 선지 이내 눈이 감겼다. 젖은 옷을 겨우 말린 채 담요를 뒤집어쓰곤 머릴 맞대고 잠이 들었다. 그리곤 꿈을 꾸었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근식이를 보았던 것 같다. 나광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중간엔 그의 누이가 있었다. 입술이 너무나도 새빨갛던…


  눈을 뜬다. 어느덧 잠이 들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내 얼굴을 조심스레 간지럽힌다.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한 올 한 올 가지런히 정돈해 준다. 그녀도 편하게 눈을 감았었나 보다. 그녀는 또 내가 수전증 증세가 있다며 놀린다. 그게 아닌데,,, 그녀이기 때문에 손에 힘이 들어가고 가슴이 떨려서 손이 떨리는 것뿐인데… 약간은 원망스럽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 띤 얼굴에 내 마음은 사르르 녹아만 간다. 내가 뭘 하려고 했었지?


  다음날 역시 하늘이 찌뿌둥했다. 산장지기의 말에 의하면 산의 날씨는 시시각각으로 변하기 때문에 맑은 날도 안심할 수 없는데 하물며 오늘 같은 날은 더욱 불안하다며 하루 더 묵어가기를 권했다. 하지만 내일이면 다시 한 주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비가 흠뻑 내린 다음날이라서 땅은 질퍽했고, 돌도 많이 미끄러웠다. 여자와 난 조심스레 한 발씩 디디며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악!”

  여자의 외마디 소리가 목덜미를 스쳤다. 뒤돌아본 나의 눈에 그녀는 황급히 몸을 추슬렀지만 이내 발목을 감싸며 고통스러워했다. 조심스레 그녀의 발목을 살펴보았다. 퉁퉁 부어오른게 여간 심상치 않다. 언젠가 축구하다 다쳐 부러졌던 친구의 발목보다 더 부어있었다.


  “어쩜 좋아요… 전 걷기가 많이 힘들 것 같은데…”

  난감했다. 산장에서도 꽤 내려온 터라 되돌아갈 수도 없었고 산장지기를 불러오기엔 혼자 있을 여자가 안심이 안되었다.

  “자. 업혀요.”

  배낭 안에서 쓸모없는 물건들을 일단 빼놓으며 나는 그녀 앞에 내들을 보였다. 멈칫거리다 더 이상의 방안이 없었는지 그녀도 내게 순순히 업혔다.


  두 시간을 그렇게 내려왔다. 날씨가 안 좋았던 관계로 휴일임에도 등산객은 눈에 뛰질 않았다. 땀에 범벅도 되었기도 했지만 미끄러운 땅을 사람을 업고 걷는다는 게 여가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아픔을 느낄 수도 없이 나에 대한 걱정과 미안함으로 침묵하고 있었다.

  “예전에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뒤케란 부부가 살았대요…”

  “…”

  “행복한 부부였는데 그만 에우리뒤케가 오르페우스를 남긴 체 먼저 죽고 말았다지 뭐예요.”

  “그래서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뒤케를 찾으러 저승에 찾아갔고요.”

  “어머! 아시는 얘기군요.”

  “그들의 사랑은 감복한 지옥의 왕 하데스가 에우리뒤케를 풀어줬다죠. 아마도…”

  “예. 하데스는 그들을 풀어주는 대신 조건을 들었어요. 뭐였죠?”

  “지옥을 빠져나가는 동안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였었나?”

  “맞아요. 그거예요. 그래서 온갖 유혹을 뿌리치면서 드디어 지옥입구까지 왔죠.”

  “그런데 그만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뒤케가 잘 따라오나 하는 걱정에 뒤를 슬쩍 돌아봤고요.”

  그녀는 약간 통증을 느끼는지 입술을 질끈 깨무는 것이 느껴졌다.

  “많이 아프죠. 조금만 참아요.”

  “아니에요, 저 때문에 더 힘드실 텐데…”

  “…그래서 어떻게 되었죠?”

  “그만 에우리뒤케는 다시 저승으로 빨려 들어갔어요. 남겨진 오르페우스는 그 후 떠나간 그녀를 그리워하며

   하프로 수많은 애절한 노래를 불렀대요. 그 음악이 너무 슬퍼서 듣는 사람까지도 눈물을 흘렸다는…”


  난 저승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뒤케를 이끌고 나오듯이 그녀를 무사히 데려간다는 일념하에, 이젠 빚만 지진 않겠다고, 그리고 그녀를 절대 잃고 싶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저승의 험한 길에 한 발씩 발걸음 옮기고 있었다. 얼핏 등뒤에 붉은빛이 어린다. 


  “절대 뒤돌아보지 말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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