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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히어 Jan 25. 2019

Why I write

나는 왜 쓰는가?

  

몇 개월 전, 아는 언니의 소개로 어떤 온라인 채팅방을 알게 되었다. 이름은 ‘성장판 독서모임’. 400명 이상이 참여해있는 그 채팅방에 들어가려면 한 가지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바로 프로필명을 ‘이름/현재 읽고 있는  제목으로 바꿔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나의 프로필명이 ‘000/Why I Write’였다. 한 번에 여러 권의 책을 읽는 편이어서 그때 이름 뒤에 어떤 책 제목을 쓸지 잠시 고민 했었지만, 조지 오웰 에세이 나는  쓰는가-Why I Write가 그때 읽고 있던 책 중 제일 두꺼웠고, 그래서 읽는 데 가장 오래 걸릴 것 같았고, 그러면 프로필명을 또 금방 안 바꿔도 될 것 같아서 선택했다. 주변에 꼭 프로필사진이나 프로필명이 바뀌면 그걸 핑계 삼아 뜬금없이 연락해서는 마음을 뒤집어 놓는 인물들이 한 두 명은 있으니까 프로필을 바꿀 때는 나름 신중을 기하는 편이다. 아무튼 그렇게 자의보다는 타의에 의해 프로필명을 바꾸었는데, ‘Why I Write는 그 날 이후 나에게 아직 다 읽지 못한 책 제목이기도 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하게 만드는 중요한 화두가 되어버렸다.      


사실 나의 쓰기의 역사는 꽤 오래전에 시작되긴 했었다. 7~8살 때, 내가 지은 동시들을 모아 동시집을 만든 것이 나의 최초의 ‘책이다. 표지는 파스텔톤의 꽃 그림으로, 속지는 격자무늬로 선이 그어져 있는 레몬색 종이로 되어 있던 정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의 노트. 첫 장을 넘기면 아빠, 엄마의 사랑과 응원의 문구가 나오고 그 뒤로 삐뚤빼뚤 연필로 꾹꾹 눌러쓴 나의 동시들. 정확히 몇 편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래도 노트의 반 이상을 채울 만큼 꽤 많았었고,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시계’를 소재로 한 동시다. 시계를 사람 얼굴로, 초침, 분침, 시침을 그 얼굴을 만지는 손가락으로 비유해 ‘시계는 항상 얼굴이 간지러운가 보다’ 이런 시구를 썼었다. 지금 이 공간에 정확한 내용을 담을 수 없음이 나, 그리고 우리 가족의 아픔 중의 하나이다. 짧은 한 줄로 요약하자면 잦은 장거리 이사로 인해, 그 동시집은 사라지고 없다.



사실 7~8살인 내가 무얼 알았겠는가. 그 동시집은 엄마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절대 원망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사하는 과정에서 그 동시집을 잃어버린 것도 엄마의 부주의가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 와서 잘잘못을 따져봐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서로 마음만 아플 뿐이지.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때 분명 엄마가 나에게 ‘쓰기의 즐거움’을 알려주고 ‘쓰기의 밑거름’을 부어주었던 것 같다. 엄마가 부어놓았던 그 밑거름이 3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조금씩 싹을 틔우려고 작용을 한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그래서 나는 왜 쓰는가? 언제 어느 때고 이 질문을 나에게 던져 봐도 항상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답은 하나다. ‘나의 감정과 생각을 말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어서’. 이 말은 아니 이 글은 내가 말을 하는 것보다는 글을 쓰는 것에 더 자신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감정과 생각이 풍부하고 다양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천재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단어로 무엇인가를 표현하고자 하지만, 이는 우리 능력을 초월해 있다. 모든 말 속에는 약간의 경멸이 있다. 말은 단지 평균적인 것, 중간적인 것, 알릴 수 있는 것을 위해 고안된 것으로 보인다. 말하는 사람은 벌써 말로써 자신을 통속화 한다.” -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중.


물론 이 글에서 ‘말’은 다른 번역본에서는 ‘언어’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 니체는 인간이 만든 ‘언어’ 자체의 한계성을 지적한 것이겠지만, 이 글에서 ‘말’을 ‘글’과 대비되는 ‘말’로 해석한 나는 어려운 수학 문제의 답을 구해낸 것처럼 머리 속이 명쾌해지는 느낌이 들었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 글을 써야 겠다는, 글로써 나의 섬세한 감정과 이리 튀고 저리 튀는 생각을 표현하고 싶다는, 아니 오직 글로써만 활자로써만 그것이 가능하리라는 확신이 들었었다.


하지만 바로 조금 전에 이런 나의 확신에 약간의 제동을 거는 문구를 읽었다.


“사그라들지 않는 욕망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한다. 감당하고 받아들였다고 안도한 순간 다시 욕망이 맹렬하게 또아리를 틀 때, 나는 파고다 공원을 배회하는 노인이 된 듯하다. 그럴 때의 나의 글쓰기란 어쩌면 방황하는 노인의 그것과 같을지 모른다. 진정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으면 굳이 그것을 글로써 추상화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 이석원, ⌜보통의 존재⌟ 중.


진정 하고 싶은 것을 어떤 이유에서건 행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종이에다 글로써만 풀어놓는 것이라는 참으로 기운 빠지는 그러나 참신한 이 글.


때로는 니체의 글을, 때로는 이석원의 글을 그리고 그 외에 다른 많은 좋은 글들을 하루에도 열두 번 씩 변하는 내 마음의 내비게이션으로 삼는다면 앞으로의 길이 막막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처음 글쓰기를 시작한 이래 30여 년 동안 이런저런 글을 여기저기 많이도 쓰고 살았다. 하지만 오늘부로 조금 더 나를 드러내고 나를 깨부수고 나를 찾아가는 글을 써야겠다. 그러기 위해 이제는 너무 많이 공개된 이 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갈 준비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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