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 한달살이 Day 20
7월 25일 오전 9시에 시작한 <Bali Global English Camp> 일정이 조금 전(8월 12일 오후 4시) 마무리되었다. 내일 발리에 입국할 예정인 남편이 비즈니스맨의 관점에서 돈을 들인 만큼 효과가 있었냐 물어보는데, 흠 글쎄 그걸 딱 평가하기가 나로서는 어렵다.
새로운 경험과 좋은 추억을 쌓은 것을 효과라고 하기엔 들인 돈이 너무 많은 걸까? 애초에 3주 영어 캠프로 아이의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던 내가 너무 안일했던 걸까?
이틀 전, 우붓 데이투어를 하러 갔던 날, 4시에 끝난 딸은 내가 돌아오는 6시까지 같은 반 언니네 방에서 놀고 있기로 했었다. 그런데 4시 조금 넘어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불길한 예감. 딸은 방에서 아이패드와 간식을 챙겨 언니네 방으로 가려고 우선 우리 방으로 왔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평상시에 멀쩡히 작동하던 룸키가 작동이 안 되었던 것이다.
뭐 그다지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으나 혹시라도 딸이 혼자 해결을 못할까 봐 조금 걱정이 되기는 했다. 우리 층에 지나가는 직원이 있으면 말을 해보고 없으면 로비에 가서 키를 바꿔달라고 요청을 해보라고 했다. 다행히 잘 대처했는지 중간에 통화를 하니 이미 그 언니네 방에서 초4, 초5, 중1 3명의 아이들이 엄마들의 부재는 아랑곳하지 않고 신나서 게임을 하며 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음 날 어제 딸이 룸키가 안되어 잠깐 왔다 갔다 하는 사이 딸과 마주쳤던 다른 엄마가 그 상황을 나에게 전해주며, “아주 씩씩하던대요~”라고 칭찬을 해줬다. 그래 내 딸이지만 내가 봐도 앞으로도 어디 가서 주눅 들거나 할 말을 못 하거나 해서 손해보고 살 성향은 아닌 거 같다. 그리고 그 성과가 나중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발현될지는 모르겠으나 나름 어려서부터 아빠 엄마가 부지런히 국내외 여기저기를 많이 데리고 다녔기 때문에 어느 나라에 가서 살든 제 밥그릇은 챙기고 살지 않을까 싶다. 그거면 됐지 뭐.
오늘 3주 간의 일정을 마무리하며 일종의 졸업식 같은 시간이 있었다. 반별 사진도 찍고 담임선생님과 사진도 찍고 우수 학생도 뽑고 등등. 우리 아이는 앤디샘(담임샘)이 특별히 베스트 서퍼라고 모두 앞에서 배지를 주며 칭찬해 주었고, 페이샘(보조샘)에게 좋아하는 젤리와 손편지도 받았다. 자신이 배지를 제일 많이 모았는데(42개), 다른 학생이 최우수 학생으로 뽑혔다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졸업식을 마치고 엘리베이터에 같이 탄 엄마 중에 캠프에 2주만 참여했던 엄마가 3주 모두 무탈하게 잘 참여한 것에 대해 학생들 뿐 아니라 학부모들에게도 상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 맞다. 아이가 3주 동안 딱 한번 컨디션이 안 좋아 오전 수업을 빠진 것, 아 그리고 어제 마지막 수업을 땡땡이치게 한 것 말고는 아무 문제없이 캠프의 나름 하드한 일정에 성실히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중간에 나도 아프거나 다치거나 하지 않고 같이 잘 버텨주고 아이의 비유를 잘 맞춰줘서 가능했던 것임을.
어제 다른 엄마들과의 얘기 중에도 아직 저학년 친구들은 엄마(아빠)와 함께 하는 게 그저 좋아서 그럴 일이 없지만, 고학년 친구들 중에는 3주 내내 엄마랑만(아빠랑만) 붙어 있다 보니 갈등이 생겨 언성을 높이고 싸우거나 한 경우도 있다는 말이 나왔다. 솔직히 나는 한국에서도 아직까지는 딸과 크게 싸우거나 딸을 크게 혼내거나 한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돈 들여 여기까지 와서 굳이 그럴 일이 뭐가 있는가.
뭐 앞으로 딸이 사춘기에 접어들고 나도 갱년기에 접어들면 (최악의 상황은 자녀의 사춘기와 엄마의 갱년기가 겹칠 때라고들 하던데) 우리 사이에 고성이 오고 갈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으나 아직까지 우리 사이는 이상 무.
이제 내일부터 일주일은 진짜 딸 그리고 남편과 하루 24시간을 함께 할 일정이다. 진정한 Family Vacation. 그 시간을 또 평화롭게 잘 보내기 위해 나는 오늘 오전에 나만의 시간을 오롯이 즐겼다.
요가 수업 후 호텔 수영장으로 고고. 사람이 1도 없어, 혼자 양주잔에 담겨 나와 실망한 칵테일도 마셔보고, 만족스러운 수영장 셀카도 남겨보며 한낮에 작렬하는 태양을 만끽했다. 그리고 어제처럼 또 발마사지를 받으며 20분 정도 단잠을 잤다.
한국에 돌아가도 나는 또 알아서 혼자만의 시간을 틈틈이 잘 만들어서 잘 쓰겠지만, 여기는 발리니까 느낌이 다르니까 이제 당분간 돌아오지 않을 이곳에서의 혼자만의 시간은 끝이 난 것 같아 그야말로 그. 립. 다.
이 매거진의 이름을 <벌써 그리운 발리>라고 지으면서 조금 고민을 했었다. 그립다는 단어는 보통 과거의 상황, 지나간 일이나 사람을 떠올릴 때 쓰는데, 벌써 그립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까? 하지만 그런 표현도 있지 않은가?
너를 보고 있어도 네가 보고 싶다.
그래, 나는 지금 발리에 있지만 발리가 그립다. 그런 감정이 들 수가 있는 것이다.
북극성은 지구에서 워낙 멀리 있기 때문에, 그 빛이 우리에게 도달하는 데는 300년이 넘게 걸린다.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의 빛이 우리에게 오는 데도 4년이 걸린다. 책은 별과 좀 비슷하다. 독자가 지금 읽는 것은 저자가 오래전에 열중했던 내용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가끔은 그저 책을 쓰고, 편집하고, 인쇄하고, 배포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라고 해도 말이다. 책을 만드는 데 그렇게 시간이 걸린다는 것은 곧 그 내용이 글쓰기에 앞서 있었던 관심의 잔류물이라는 뜻이다.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184p - 리베카 솔닛
내가 쓰는 이 글도 마찬가지다. 매일매일 있었던 일을 1시간이든 5시간이든 일정 시간이 지난 후에 글로 쓰는 것이기 때문에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이미 나의 지나간 과거를 읽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나에게도 역시 지금 내가 쓰는 것은 키보드를 누르는 순간 왼쪽에서부터 나의 과거가 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니 그리울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