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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히어 Sep 07. 2022

어젯밤 배가 고파서 책을 읽었다

책은 수면제일까 각성제일까


11년 전 오늘 낮 12시 19분 딸이 태어났다. 오늘은 딸의 생일. 발리를 다녀온 후 다시 일하랴 미뤄왔던 골프 강습도 다니랴 나름 바빴던 탓에 요즘 좀 딸에게 신경을 못 썼다. 혼자 괜히 미안한 마음에 오늘 저녁에 파티를 할 예정이었지만 생일날 아침을 시리얼이나 식빵 쪼가리를 먹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오늘 아침은 거하게는 아니어도 밥과 미역국, 불고기, 밑반찬 등으로 밥을 차려줘야겠다 다짐했다. 그러려면 평소보다 조금은 더 일찍 일어나야 했고, 요즘 들어 부쩍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딸을 조금이라도 더 재우기 위해 어젯밤 각방을 쓰기로 했다.      



그게 문제였다. 딸과 같이 잘 때면 딸이 잠들길 기다리다 보통 나도 같이 잠이 들어버린다. 그런데 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괜히 좀 늦게 자고 싶어졌다. 그때 마침 친구가 톡으로 조금 의미심장한 내용을 보내왔다고 생각하고 대화 내용을 올려보니 내가 불을 지핀 거긴 하네. 어쨌든, 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 아무말 대잔치와 철학적 주제 그 사이 어디쯤에서 나름 통하는(그러니까 2시간 넘게 톡을 했겠지) 대화를 주고받은 후 다음날을 위해 폰을 내려두었다.     



자야지 하는데 이상하게 감고 있는 눈이 더 선명해지고 정신이 더 또렷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 그때부터 배고픔이 나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역시 발리를 다녀온 여파로 체중이 약간 늘어난 상태라 최근 들어 간헐적으로 저녁을 안 먹고 있는데, 어제는 남편이 사 온 즉석떡볶이와 꼬김을 조금 먹었었다.    


     

과학적 또는 의학적으로 말이 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내 경험상 저녁을 아예 안 먹은 날보다 조금이라도 또는 적당히 먹은 날 밤늦게까지 깨어있을 때 더 배가 고픈 것 같다. 어젯밤 아니 새벽이 딱 그랬다. 물론 저녁을 먹고 너무 오랜 시간 동안 깨어있었던 것이 문제였지만, 어쨌든 그 문제로 인해 다른 문제까지 생긴 상황이었다.      



그래도 나는 배고픔을 잘 참는 편이기는 한데, 어제는 그 상태로 2시간 반을 더 깨어있자니 (새벽 3시 반에야 눈을 감고 잠이 들었음) 과장을 조금 보태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잠이 바로 들 것 같지는 않고, 또 폰만 들여다보고 있기는 싫어서 낮에 읽던 책을 집어 들었다. 저자가 추천했던 바흐의 골든베르크 변주곡을 틀어놓고 책을 읽었다. 내가 엄청 고상한 부류여서가 아니라 내 나름대로는 클래식 음악과 책을 수면제로 처방한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책이 또 재미있다는 것이었다. 아 침대 옆 협탁에 몇 년 동안 앞부분만 읽고 쌓여 있는 책들 중 한 권을 집어 들었어야 했는데, 수면제가 아니라 각성제를 처방한 꼴이 되었다. 책을 읽고 기록해둘 구절이 나오면 페이지 귀퉁이를 접어두고 가끔씩 내가 쓸 문장들을 떠올려 보다 보니 금방 3시가 넘어가버렸다. 솔직히 두 시간 동안 책만 읽은 건 아니고 중간중간 내 글에 라이킷을 누른 사람의 브런치에 들어가 다른 글들도 읽었고, 인스타에 들어가 골프 스윙 영상도 보고 그러기는 했지만.      


당연히 모르는 사람



3시 반이 되어가자,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는 상황으로 나를 끌고 가야겠다 싶었다. 다음날(오늘)은 아침에 생일상도 차려야 하고 5일 만에 아침운동도 해야 하고 오전에 골프 연습도 해야 하고 오후에 수업도 있고 저녁에는 파티도 있는 긴 하루가 될 테니까 조금은 자두는 방향으로.      



마음 같아서는 그리고 책의 내용상 날이 밝아올 때까지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오랜만에 책을 읽으면서 밤을 한번 새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러지 않았고 그러지 않기를 잘한 것 같다. 그랬으면 아마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수면제는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고 각성제라고는 커피가 전부다. 핫식스 류의 에너지 드링크도 내 기억에 먹어본 적이 없다. 뭐 어떻게 보면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어야 하거나 각성제를 먹고 잠을 자지 않아야 할 만큼 고된 삶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선천적으로 약물에 의존하는 삶을 추구하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더 큰 관점에서는 먹는 행위 자체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서이기도 할 것이다.      



아무튼 어제의 그리고 그동안의 경험상 잠이 오지 않는  책은 나에게 수면제보다는 각성제에  가까운 것임을 알게  지금  다른 각성제인 커피를 마셨음에도 눈이 감긴다.        


https://m.blog.naver.com/2gafour/222875217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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