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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히어 Nov 07. 2022

161115-10

오늘 점심으로 카레를 먹을 수 있을까?



누가 들어도 배가 고파서 배에서 보내는 신호임을 알 수 있는 꼬르륵 소리가 났다. 나는 내 배에서 나는 소리인 줄 알았고, 경비아저씨는 경비아저씨대로 자기 배에서 나는 소리인 줄 알았나 보다. 소리가 남과 동시에 둘 다 민망함을 극복하기 위한 약간의 헛기침을 했다.


아이고, 내가 너무 오래 있었네, 그만 가 볼게요.


시계를 봤다. 12시 37분이었다. 나도 나지만 경비 아저씨도 아직 식사를 못했나 보다. 사람이 극한 상황을 겪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변하는 것일까? 아니면 내 식탁에 앉아 있는 아저씨가 왠지 10여 년 전 마주 앉아 말없이 밥을 먹었던 아빠처럼 느껴졌나? 그것도 아니면 콩 한쪽도 나눠 먹으라는 아름다운 말을 갑자기 실천하고 싶어 졌나?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구쳐 올랐을까?


식사하고 가실래요?


경비 아저씨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적잖이 당황했나 보다.


아,, 아뇨. 아가씨 혼자 사는 집에서 무슨.

아니에요, 힘들게 택배도 가지고 와주시고 불도 끄러 와주셨는데. 저 때문에 식사도 못하셨는데 드시고 가세요.


내가 생각해도 빠르다 싶을 만한 동작으로 수저를 놓고 전자레인지의 밥을 꺼내어 접시에 담고 냄비 속의 카레를 꺼내 그 위에 붓고 위에 있는 박스를 뜯어 갓김치와 파김치를 가위로 잘라 작은 접시에 담고 옥수수차를 잔에 더 따랐다. 차려놓고 보니 너무 간소했지만 이상하게 부끄럽지 않고 뿌듯했다.


아이고, 이거 이래도 되나 모르겠네.

괜찮아요, 저희 아빠 같아서 그래요. 편히 드세요.

그럼 내 빨리 먹고 갈게요. 고마워요.

네, 편히 천천히 드세요. 저는 잠시 요 앞에 슈퍼에 좀 다녀올게요.


방에 들어가 모자를 쓰고 안경을 쓰고 지갑과 핸드폰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습관적으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는데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직 고쳐지지 않았구나. 그럼 키도 크고 덩치도 큰 그 전기기사 아저씨는 아직 6층에 있을까? 그러고 보니 그 아저씨에게도 제대로 고맙다는 말을 못 한 것 같다. 슈퍼에서 그 아저씨 드릴 음료수라도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아니다 그 아저씨도 아까 밥을 먹다 말고 온 것 같은데 도시락이라도 사드려야겠다. 어차피 나도 먹을 거 사러 가는 길이었으니까 도시락을 두 개 사서 하나는 그 아저씨 드리고 하나는 내가 먹어야겠다.


도시락을 사려면 아파트 앞 슈퍼 말고 5분 정도 거리의 사거리 코너에 있는 편의점을 가야 했지만 괜찮았다. 어떤 도시락이 좋을까 생각하다 보니 어느덧 6층이었다. 전기기사 아저씨는 없었다. 엘리베이터 문은 닫혀 있어 안은 보이지 않았다. 4층을 지나고 있는데 꼬마 아이가 엄마의 손을 잡고 한 칸 한 칸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등장한 나의 따뜻한 마음은 오늘 나를 도와준 경비 아저씨와 전기기사 아저씨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가 보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상황에서 말없이 그들을 확 앞질러 갔을 텐데 또 한 번 어디서 그런 용기와 다정함이 나온 걸까.


힘들 텐데 잘 걸어가네. 조심해.


아이 엄마는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나도 미소로 화답하며 조심스럽게 먼저 지나갔다. 1층까지 빠른 속도로 걸어 내려왔는데 약간의 숨 가쁨이 오히려 기분 좋은 흥분감을 안겨 주었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 그 말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편의점에서 두 가지 종류의 도시락과 음료수 2개를 사서 나왔다.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서 하늘도 올려다보고 도로 주변의 상점들도 살펴봤다. 5년을 살면서 슈퍼와 편의점, 가끔 세탁소만 이용해봤지 다른 상점들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동안 동네 상점들은커녕 내 주변의 사람들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지냈었다. 그저 최소한의 필요한 행동만을 하며 살아왔다. 그것이 5년 전 내가 운전하던 차에 함께 타고 있던 남편과 돌을 앞둔 아들을 먼저 보낸 내가 취해야만 하는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했었다. 한 차에 있었으면서 나만 살아남은 주제에 기분 좋은 미소를 나누거나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것은 나에게 과분한 사치라고 생각했다.


도로 양 옆으로 꽤나 많은 상점들이 빽빽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카페, 미장원, 미술학원, 피아노 학원, 치킨집, 빵집, 분식집, 고깃집, 통신사, 공방, 철물점 등등 종류도 다양하고 간판도 다양했다. 그러다 아파트에 거의 다다랐을 때 공인중개사 간판과 유리면에 붙은 전단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00 아파트 101동 201호 즉시 입주 가능. 201 호면 2층이겠지. 2층이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닐 필요도 없겠지. 그럼 오늘처럼 엘리베이터에 갇혔다가 힘들게 빠져나오는 일도 없겠지. 혹시라도 깜빡하고 가스레인지에 냄비를 올려놓고 나오더라고 바로 뛰어올라가 불을 끌 수 있겠지. 경비실에 택배가 있더라도 더 빨리 찾으러 갈 수 있겠지.


그리고 2층 정도면 엄마도 우리 집에 올 수 있겠지. 이제는 엄마도 나도 남편과 아들을 먼저 보낸 기막힌 동병상련을 서로 보듬어주고 위로해줄 수 있겠지.


입구를 지나는데 경비 아저씨가 어느새 내려와 있었다. 나를 보고는 웃으며 말을 건넨다.


아가씨 덕분에 점심 잘 먹었어요. 카레도 맛있었고 김치가 정말 맛있었어요.


어느새 나는 용기를 넘어서 능글맞아졌나 보다. 아니 이런 것이 마음의 여유라는 것인가. 아니면 타인에 대한 배려라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나 자신을 받아들인 결과인가.


 아가씨 아니에요. 다음에  식사하러 오세요.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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