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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히어 Oct 17. 2019

아직도 채워야 할 네가 좋아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를 읽고

어쩌면,
우리는 늘 부족하고 채워지지 않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 결핍이 있어야 우리 안으로 새로운 것들이 들어올 틈이 생기지 않을까?
그러니 조금은 덜 채우고 살아가자.

-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김동영 저 -



내가 한때 애정 하던 <마녀사냥>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신동엽도 같은 맥락의 말을 했었다.

“사람에게는 결핍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우리(요즘) 아이들은 결핍이 너무 없다.
그래서 어떻게 결핍을 경험하게 해 줄지 늘 고민해.”

결핍, 공허, 죽음.
솔직히 나는 이런 단어들을 좋아한다.


물론 의미, 기쁨, 관계.
이런 단어들도 역시 좋아한다.

위 단어들의 공통점은?

글자 수.

사실 나는 두 글자짜리 단어를 좋아한다.
그리고 핵심을 나타내는 한 문장을 좋아한다.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는 사람보다는 촌철살인의 한 마디로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사람을 좋아하고,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어 사는 사람보다는 흘러가는 시간 속에 자신의 삶을 내맡기는 사람을 좋아한다.

한 마디로 자신의 삶에 여백의 미를 허용하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할 여지를 남겨두는 사람을 좋아하고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나에 대한 모든 것을 낱낱이 공개하고, 알려주고, 이해시켜야 하는 사람보다는 내가 보여주는 모습 이면을 알아서 추측해내는 사람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더 오랫동안 친구로 지낼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딱 내가 보여주는 모습으로만 나를 판단하거나 아니면 그조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그래서 나는 최근에는 자꾸만 책 속으로 파고 들어가 그 안에서 위로를 받게 된다.


삶이 일순간 그렇게 가라앉을 때, 경험의 폭은 무한해지는 것 같았다... 그 아래는 온통 캄캄하고, 온통 퍼져나가고, 헤아릴 수 없이 깊다. 그러나 우리는 간간이 수면으로 올라온다. 사람들은 그 모습으로 우리를 본다.
- 「등대로」, 버지니아 울프 저 -




책을 읽다가 우연히 이런 글귀를 만나면 기쁘고 가슴이 벅차오른다. 나의 생각과 딱 들어맞는 내용을 잘 정리된 텍스트로 만나게 되어서. 그리고 비록 동시대의 또는 가까이에 있는 인물은 아니지만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었) 다는 걸 알게 되어서.

작년 어느 날부터 책을 읽고 그 감동을 혼자만 간직하는 것이 아쉬워 이런저런 곳에 글을 남기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글을 공유하고 있다. 글을 쓰다 보니 나의 관심 분야가 조금씩 손에 잡히기 시작했고, 그 분야를 더 알아보고 싶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그동안 읽지 않았던 책들을 더 찾아 읽게 되었다.

최근에 강의를 들었던 박권일 칼럼니스트는 “남의 글을 읽다 보면 자기 글을 쓰고 싶어 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글쓰기가 최종단계는 아니다. 글쓰기는 다시 책 읽기로 돌아가야 한다. 더 나은 사유로 나아가기 위해서다.”라고 했다. ([월요 칼럼] 읽기, 쓰기, 그리고 ‘교양’에 관하여, http://www.newsmin.co.kr/news/42263/) 

“더 나은 사유” 이 말이 참 와 닿는다.

사실 나는 꽤나 오래전부터 책을 가까이 해왔지만, 내가 읽는 책의 수준은 글을 쓰기 전과 후로 확연히 나뉜다. 최근에 이사를 하며 소장하고 있던 책을 분야별로 나누어 책장에 꽂아 보았다. 물론 나의 오래된 책들 중에는 “꼭 다시 읽어봐야지.” 싶은 책도 많지만, “이런 책을 돈을 주고 샀구나.” 싶은 책도 많았다. 하지만 책 자체를 좋아하는 나이기에 그런 책이어도 쉽게 버리지는 못하고 책장의 아래쪽에 일단 다 꽂아는 두었다. 그리고 아직 꽂을 공간이 더 남아있었지만, 새로운 책장을 하나 더 주문했다. 그 책장은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에 (다시) 읽은 책들 위주로 채워볼 생각이다.



새로운 책장이 오늘 오전에 도착해 아직 그 책장은 텅 비어 있다. 그 텅 비어 있는 책장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오른쪽 뒤편에 있다. 글을 쓰며 자꾸만 돌아본다. 10칸으로 나뉘어 있는 빈 공간을 한 칸 한 칸 채워나갈 모습을 그려보니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는 느낌을 알 것만 같다. 새로 산 책장에 책이 꽉 찰 때쯤,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아직도 채워야 할 네(책장)가 좋아. 여전히 비어있는 네(책장)가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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