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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히어 Dec 26. 2020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0년이 나에게 준 것 1

 

크리스마스도 조용하게 지나가버렸고 이제 정말 2021년이 코앞이다. 2020년 정리하기 프로젝트로 그동안 방치했던 브런치에 《2020년이 나에게서 가져간 것 1~5》 글을 올리다 보니 안 그래도 차분한 연말이 차분함을 넘어 우울함으로만 남을 것 같아 오늘부터는《그럼에도 불구하고 2020년이 나에게 준 것 1~5》 시리즈를 올려보려고 한다.     


혹시 궁금해할 사람들을 위해 예고편처럼 5편의 글의 키워드를 알려주자면, 급여일, 줄어든 집안일, 고양이 두 마리, 태블릿 펜과 수학 문제집, 몸무게이다. 물론 항상 계획대로 흘러가지만은  않는 나의 글의 특성상 위의 키워드 중 일부는 바뀔 수도 있겠지만 첫 번째 키워드 “급여일”만큼은 계획대로 써 보겠다.     


어제 일하던 도중 뇌출혈로 정육점 앞에서 쓰러져버린 40세 택배기사의 영상을 보고 잠깐이지만 마음이 아팠다.


https://n.news.naver.com/article/214/0001088701?lfrom=kakao


몇 개월 전, 내가 편리하게 이용했던 다양한 배송들은 택배기사들의 과중한 업무 및 그로 인한 사망 사고들을 담보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된 후 가급적 이용을 자제하려고 노력 중이다. 하지만 외출이 줄어든 현실에서 우리는 또 먹고살아야 하기에 어느새 온라인으로 계란을 주문하고 물티슈를 장바구니에 담고 배달 음식을 시키게 된다. 사실 요즘 같은 때 배달이 안된다면 어떡하나 싶기도 하다. 그래서 집 앞까지 내가 시킨 물건들은 총알같이 가져다주는 그들의 수고에 조금이라도 감사함을 표하기 위해 엘리베이터에서 택배기사들을 만나면 층마다 눌려진 버튼에 짜증 내지 않고 열림 버튼을 누른 채 기다려주곤 한다. 조금 더 마음을 여는 날은 “고생 많으세요” 정도의 인사말을 건네기도 한다.      


며칠 전 외출을 하기 위해 우리 집인 2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18층, 15층, 13층, 8층, 5층이 눌려져 있고 여러 개의 박스를 실은 카트와 얼핏 봐도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분이 타고 있었다. 가끔 물건을 실어 놓은 채 다른 층에 기사님이 있을 때도 있기에 처음에는 아파트 주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18층 문이 열리기 전 그분이 “죄송해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하며 급히 박스를 들고나갔다 빈손으로 다시 돌아왔다. 여자 택배기사였던 것이다.      


직업에 귀천이 어디 있고 남자가 할 수 있는 일과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나’이지만, 다른 건 몰라도 택배기사일은 ‘여자’가 하기에는 너무 고된 일일 것 같다.      

사실 이 글을 통해 처음으로 밝히는 것이지만, 나도 한때, 택배 아르바이트를 해볼까 진지하게 알아봤던 적이 있다. 자차만 있고 운전 가능하면 누구나 할 수 있고, 근무시간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다른 일에 비해 매력적으로 느껴져서였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택배 알바를 알아볼 때의 그 심정이 떠올라서인지 그 여자분의 선택이 왠지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 날따라 택배기사님이 눌러놓은 층 말고도 다른 층에서 사람들이 자꾸만 탔고,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사람들이 늘어갈수록 그 기사님은 “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를 연발하며 내렸다 타기를 반복했다. 딱 봐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입주민이 타느라 멈춘 층이 자신이 눌러놨던 층 인줄 알고 잘못 내렸다가 당황해하며 다시 타기도 하고, 박스를 들고 내려 두 군데뿐인 현관 앞에서 우왕좌왕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리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데 자꾸만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하는 모습을 보니 그랬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추운  택배기사 일을 시작했을까 싶어 역시나 잠깐이지만 마음 한구석이 찌르르했다. 예전에 하던 일을 그만두고, 지금 일을 시작하기 전, 인생이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던 한 때, 잠이 안 오던 어느 날 밤 인터넷을 이리저리 뒤적이다 발견한 택배 아르바이트 모집 글을 보고 지원을 할까 말까 한참을 뒤척였던 날이 떠올랐다. 이런저런 풍파를 겼었다 하지만, 평균적인 기준에서 보자면 그래도 온실 속의 화초인 나는 결국 지원을 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덜 절박해서였겠지. 그날 밤, 그 아르바이트에 지원을 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조금 비약을 하자면, 크리스마스에 쌓인 물량을 배달하다 힘없이 쓰러져버린 40 택배기사가 나였을지도 모르지.      

다행히 그 이후에 그래도 나에게 어울리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났고, 현재 그 일 덕분에 나는 매월 13일 정말 딱 내가 일한 만큼의 보상을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 나에게도 급여일이 생긴 것이다. 비록 5년 전 급여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작년 대비 올해 연봉이 3배 정도 상승했다. 그리고 코로나로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고 있는 와중에 내가 하는 일은 오히려 수요가 많아 내가 얼마든지 더 하고자 하면 더 할 수 있기도 하다.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급여일은 나에게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을 보장해주었다. 아니 정확히는 경제적 여유이다. 남편이 주는 생활비로도 내가 더 허리띠를 졸라매면 살아갈 수는 있겠지만, 온실 속의 화초인 나는 그렇게 사는 것보다 지금이 훨씬 더 좋다. 내가 번 돈으로 물건을 살 때마다 조금 더 여유 있는 선택을 하는 것이 좋고, 가족끼리 외식을 할 때 가끔 내 카드를 남편에게 쥐어 주는 것이 기쁘고, 곧 칠순이신 부모님을 위해 적금을 시작할 수 있게 되어 뿌듯하고, 친구를 만났을 때 가격 신경 안 쓰고 먹고 싶은 메뉴를 시킬 때 으쓱하다.            



한때 동남아(동네에 남아있는 아줌마)였던 시절, 동네 언니 중에 아이 유치원 보내 놓고 10-2시까지 인근 중학교의 급식실에서 주방보조 아르바이트를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언니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일해서 40만 원인가를 벌었는데, 그 돈이 당장 없으면 안돼서 그 일을 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돈만큼은 온전히 자신을 위한 일에 쓸 수 있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였다.      


물론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40만원이 아니라 4만원도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들도 있기에 이런 글을 쓰는 것 또한 조심스럽지만, 그저 내가   있는 일은 나보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만났을 , 따뜻한  한마디 건네주는 것이겠지. 너무 쉽고 별거 아닌 일 같지만, 그조차도 내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내년에는 조금 더 여유로운 사람이 되어보리라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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