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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마흔_13

죽어야 끝나

by 나우히어

그렇게 일주일이 흘러갔다. 하루하루는 더딘데 돌이켜보면 빠른 것도 같았던 날들.


수민이가 예약해 둔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럭셔리한 장소로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효인이가 올 거라 기대하고 케익은 효인이가 좋아하는 고구마케익으로 유정이가 사 왔다. 륜은 우리들의 추억의 음식인 떡볶이를 만들어왔고, 은재는 최근 10년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첩을 만들어왔다. 효인이가 오면 같이 먹고 같이 보려고 준비해온 것들은 다들 테이블에 올려놓은 채 가게에서 준비해준 와인과 핑거푸드만 조금씩 입에 댔다.


유정이는 다음 주에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가정 법원에 제출하는 일만 남았다고 했다. 남편이 그래도 자신의 잘못은 아는 사람이어서 부모님과 유정의 뜻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협조해 생각보다 빨리 정리가 되어 간다고 했다. 그에 맞춰 유정의 미국행도 하나씩 준비가 되고 있었다. 얼바인 쪽에 선배가 있어 그 선배 병원에 페이닥터로 가기로 했는데, 오전에만 근무하고 오후에는 쉴 계획이라고 했다. 그러니 언제든 편하게 와서 자기랑 놀아달라고 했다. 위자료도 많이 받았으니 비행기 티켓은 자신이 끊어주겠다고 했다.


륜의 남편은 23년을 몸 바친 회사에서 잘린 후유증으로 2주 정도는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만 있어 속을 뒤집어 놓더니 다행히 2주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요즘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치킨집이나 카페 창업, 택배일 등을 알아보더니 편의점 인수로 마음을 먹고 몇 군데 컨택 중이라고 했다. 80대이신 시아버지는 좋은 대학 나와 대기업 다니던 아들이 편의점을 하겠다고 하자 이해를 못 하시고 결사반대 중이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으니 오래 못 갈 거라고 했다. 륜은 남편이 편의점을 하면 애들 등원시켜놓고 자기가 오전 알바하면 딱이라며 내심 기대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은재는 딸을 주말에 하루 친정에서 재우고 남편과 오랜만에 술잔을 기울이며 많은 얘기를 나눴다고 했다. 아직 남편이 은재의 선택을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늦게라도 자신에게 힘들었던 부분을 얘기해주니 고마워했다고 했다. 은재 자신은 그동안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심리에만 귀를 기울여왔는데 이제 자신을 더 이해해야 되겠다는 생각에 글쓰기를 시작했다고 했다. 우리 중에 책을 제일 많이 읽는 은재였지만 읽는 것과 쓰는 것은 또 다른 영역일 텐데 역시 어려운 상황에서도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것이 은재다웠다.


원래 마흔이 이런 거니?
우리 다 왜 이렇게 힘들어.


유정이가 투정을 부렸다.


원래 사는 게 그런 거야.
모든 건 죽어야 끝나는 거지, 안 그래?


륜이나 효인이가 할 것 같은 말이 우리 중에 다정함을 맡고 있는 수민의 입에서 나오자 일제히 수민을 쳐다봤다.


엄마가 아파. 췌장암 말기라 병원에서 너무 늦었다고, 마음의 준비하라고 하는데 아득바득 살아보겠다고 있는 돈 다 써도 좋으니 어떻게든 자기 살려내라고 진상 부리고 있어.


마흔 정도면 주변 지인들 부모님 장례식장에 갔다 와본 경험들은 있어도 막상 내 부모의 죽음 앞에서는 담담하거나 차분해질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수민은 드라마에 나오는 캐릭터를 말하듯 자기 엄마를 말한다. 그 시대에 이미 조건에 맞춰 결혼하셨던 수민의 부모님은 이혼을 하게 되면 서로의 재산에 더 큰 타격이 오기에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을 유지하시는 경우이다. 보고 자란 것의 영향을 무시할 수가 없는지 수민도 비슷한 결혼을 했다. 수민에게 가족은 재산을 유지하고 더 늘리기 위한 수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존재인 것이다. 그래도 막상 엄마가 죽음을 앞두고 있으니 감정이 복잡한 건지 평소답지 않게 시니컬하다.


돈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 엄마가 아픈데 아빠는 병원에 와보지도 않는다. 그런 아빠 보면서 나한테도 비슷한 일 생기면 과연 남편이 따뜻한 말 한마디 해줄까 싶더라. 뭐 나도 마찬가지일 거 같고. 암튼 정말 우리 엄마가 죽어야 진상이 끝날 거 같네.


아무리 친해도 가족은 건드리는 거 아니기에 다들 할 말을 찾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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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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