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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터 Apr 21. 2019

아주 이기적이고 완벽한 하루

100일 글쓰기 #소확행

번아웃이 된 상태였다. 이 무기력한 상태가 지속되면 안 될 것 같아 휴가를 냈다. 온전히 나만을 위한, 아주 이기적인 하루를 살기 위해.


느지막이 아침 9시쯤 눈을 떴다. 이불속에서 한참 폰을 보다 9시 30분쯤 겨우 침대에서 벗어났을 테다. 허기졌던 탓에 간단한 요리로 아침 겸 점심밥을 차려 먹었다. 유튜브도 보고 뭉그적거리다 이렇게 하루가 가버리면 너무 아까울 것 같아 운동을 하러 갔다. 열심히 땀 빼고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집에 와서 씻고 외출 준비를 했다. 만날 사람도 없지만 그냥 기분 좋아지고 싶어 새로 산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오후 1시쯤 집을 나서 2시쯤 뚝섬역에 도착했다.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카페에 가서 바리스타와 짧지만 유쾌했던 대화를 나누고, 따뜻한 플랫화이트 한 잔을 테이크아웃했다. 커피를 들고 근처에 있는 서울숲의 작은 변두리 공원을 산책했다. 벚꽃은 졌지만 빨갛고 노란 꽃들이 막 피어나고 있었다. 날이 좋아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자리에서 한 시간 동안 책을 읽었다. 과제처럼 읽어야 하는 책이었는데 단숨에 절반을 읽어냈다.

자리에서 일어나 슬슬 서울숲 쪽으로 걸었다. 서울숲에서는 튤립 축제 같은 걸 하나보다. 거의 튤립의 고장 네덜란드에 맞먹는 스케일이다. 형형색색 꽃밭에 사로잡혀 정신없이 사진을 찍어댔다. 그리고 연못가에 자리 잡고 한참을 멍 때리다, 또 한 30~40분 간 책을 마저 읽었다.  

해가 떨어지니 슬슬 추워지기 시작했다. 더 앉아있기 힘들어서 성수역 쪽으로 또 한참 걸었다. 고민하다 코인 노래방을 찾아 들어갔다. 노래방 가는 걸 좋아하는 편이지만 사실 혼코노는 처음이었다. 3500원을 내고 10곡을 불렀다. 내가 어떤 노래를 골라도, 마음처럼 노래가 잘 되지 않아도, 신경 쓰이는 사람  없이 온전히 나 혼자라 편했다. 혼코노가 이렇게 재밌고 합리적인 건 줄 알았으면 진작 코노 죽순이가 되고도 남았을 거다.

저녁 8시에는 오늘 약속되어있던 유일한 스케줄, 독일 맥주 시음회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맥주를 좋아해서 독일만 세 번 가봤지만 독일 맥주의 역사와 종류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준비된 일곱 가지의 맥주, 그리고 수업 전후 보너스로 주신 것까지 총 열 가지의 다양한 맥주를 맛봤다. 옥토버페스트 때 마신다는 메르첸이 가장 내 취향에 가까웠고, 고제라는 재미있는 맥주를 새로 알게 됐다. 그리고 은근히 꽤나 취했던 것 같다.

요리, 운동, 커피, 산책, 독서, 노래, 맥주. 내가 좋아하는 것만으로 온전히 꽉 채운 2019년 4월 19일 금요일. 가끔 이런 시간들이 있기에 또 남은 시간들을 살아낼 힘과 의지가 생기는 거 아닐까. 언제든 또 힘들고 지칠 때면 행복했던 이 날을 기억하자. 또 다음에 있을 이기적이고 완벽할 하루를 기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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