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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터 Apr 25. 2019

파란 하늘은 당연한 게 아니다

100일 글쓰기 #날씨

'날씨' 하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날이 있다. 때는 바야흐로 6년 전, 교환학생으로 미국에서 혼자 1년 동안 살았을 시절이다. 내가 살던 지역은 일 년의 반 이상, 사실상 여름 빼고 가을 겨울 봄이 우기(雨期)였다. 먹구름 가득 흐린 회색 하늘이 계속되고, 비가 오다 그치다만 반복되는 날씨라고 보면 된다. 아침에 눈을 떠도 세상은 어두웠다. 학교 가는 길도, 집에 오는 길도 축축했다. 그렇게 우중충한 나날들이 계속되니 자꾸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지고, 혼자서 깊게 파고드는 감정은 점점 아파왔다. 안 그래도 어린 나이에 혼자 타지 생활을 한다는 게 쉽진 않았는데, 몇 달 동안 밝은 햇빛을 못 보고 사니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먹고살기 위해 장을 보러 간 어느 날이었다. 차도 없고, 짐도 무거운 건 당연한데 제일 서러운 건 양손 가득 비닐봉지나 종이봉투에 담아오는 짐이 비에 다 젖어버린다는 거다. 그날도 거의 내 몸뚱이만 한 큰 백팩과 양손에 먹을거리와 생필품을 한 가득 쟁이고 집에 오는 길이었다. 너무 무겁다, 빗방울이 차갑다, 다 놓아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갑자기 어디선가 뜨거운 빛이 느껴져 뒤를 돌아봤다.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버렸다. 서럽게 눈물이 났다.


반대편 하늘에는 비가 그치고 조금씩 날이 개고 있었다. 몇 달 만에 보는 파란 하늘과 쨍한 햇빛이다. 20년 넘게 살면서 '하늘이 파랗다'는 건 너무 당연한 진리라고 생각해왔는데, 하늘이 파란 건 결코 당연한 게 아니었다. 참으로 귀하고 감사한 거였다. 그 날의 눈부신 햇살에서 힘든 미국 생활을 마저 잘 버텨낼 수 있으리라는 한 줄기 희망을 봤다. 그 옆에는 그림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크고 아름다운 무지개가 둥글게 뻗어있었다.

 

2013년 2월 말, 그 날의 무지개


그 날 이후 날씨를 꼼꼼히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날씨가 좋은 날엔 감사한 마음으로, 바쁜 시간을 쪼개서 잠깐이라도 날을 충분히 즐기려고 한다. 날씨가 궂은날엔 오늘 하루도 무사하기를 바라며 다음날, 다다음날, 주간 날씨까지 확인해본다. 나쁜 날씨가 있으면 좋은 날씨도 올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는 날씨에 영향을 참 많이 받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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