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의 월말결산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까워 남겨두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바탕으로 매달을 기록해둡니다.
4월에 읽은 책
• <결혼은 모르겠고 내 집은 있습니다> - 김민정
- 어쩌다 보니 요즘 비혼 여성이 쓴 1인 가구의 삶에 대한 에세이를 매달 한 권씩 꼭 읽고 있는데, 아 역시 비혼 얘기가 세상에서 제일 재밌다. 특히 중간에 '렛잇비'를 개사한 'Let it 비혼' 송에서 빵 터졌고. 작가의 생생한 경험담을 읽고 '야, 나두 내 집 마련할 수 있어'라는 자극을 아주 제대로 받았다. 2년 후의 나도 결혼하지 않고도 혼자 충분히 잘 살 수 있다는 걸 증명해내고 싶다.
"'자기만의 방'을 온전히 갖기 위해선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능력 있는 자가 얻는 게 아니라, 얻고자 하는 자가 얻는다."
• <아무튼 달리기> - 김상민
- 군데군데 심어져 있는 위트 있는 표현에 감탄하며, 마치 페이지라는 트랙을 작가와 함께 발맞춰 달리듯 후루룩 읽어냈다. 구 천식 환자에게 달리기란 멋있어 보이고 부럽지만 나의 것은 될 수 없는 것. 부담이 적고, 루틴으로 삼을 수 있고, 몸과 멘탈을 지킬 수 있는 건강한 활동, '나만의 달리기'를 찾아보고 싶어 졌다.
"할까 말까 할 땐 하고, 살까 말까 할 땐 사세요. 그 돈과 시간만큼의 자산을 남기면 됩니다."
"예견된 실패 앞에서는 언제나 당당해도 좋다. 약간의 뻔뻔함은 도전하려는 마음을 지키는 방패가 되어준다."
• <LOG 록> Vol.2 파도
- 제주 여행 중 묵은 숙소에 비치되어 있어서 후루룩 넘겨 봤다. 여기 나오는 이야기들처럼만 살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했다.
"제주에서의 삶은 어때요? 그 짧은 시간 속에 순간 행복력이 정말 높아요. 제주에서는 행복을 찾아서 일부러 무언가를 하는 게 사라졌어요."
"요리할 때는 가벼운 마음으로 대충 만드세요. 대충과 최선의 맛은 흡사하며 대충이 조금 더 자극적입니다."
4월에 즐겨들은 음악
• 데이식스 미니 7집 <The Book of Us : Negentropy - Chaos swallowed up in love>
- 공백기 동안 마음이 떠났다고 생각했던 오만한 나 자신 반성해.. 요즘 다 놓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힘든 나날을 살아가고 있는 걸 어찌 알고 '놓지 말아 줘~'라고 온 맘을 다해 외치는 노래가 나온 건지.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이 노래들로부터 위로받고 구원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우리는 운명이구나, 당신들은 언제든 내가 지치고 위태로울 때 꽉 붙잡아줄 가수구나 하는 믿음이 생겼다.
데이식스 노래 다 좋다고 7년째 말하고 다니는 사람으로서 이제 노래 좋은 건 뭐 디폴트고. 이번 앨범의 포인트는 전곡이 일관되게 전하는 메시지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사랑이 있다면 다 견뎌낼 수 있고, 그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가 된다'라는 게 이런저런 상황에 대입해보면 눈물 좔좔일 수밖에 없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했던 말인 듯하다. 지극히 일상적인 언어로 그 대단한 사랑들을 눌러 담은 영케이의 작사 실력은 갈수록 더 놀랍고. 아무래도 이번 앨범 내 최애곡은 '둘도 아닌 하나', 차애곡은 'Healer'. 둘하나 떼창 구간 따라 부르고, 힐러 췍췍 예스예스 외치러 콘서트 가고 싶다.. 밴드 라이브 듣고 싶다..
• 샤이니 정규 7집 리패키지 <Atlantis>
- 정규앨범에 이어 리패키지도 샤이니가 샤이니했다. '아틀란티스'는 샤이니가 오랜만에 청량 컨셉으로 K팝 기강 잡으러 온 것 같아서 역사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같은 자리' 이 노래 때문에 돌아버리겠다. 12년 전 줄리엣 앨범에 수록된 '소년, 소녀를 만나다'의 그 소년이 성숙한 어른이 되어 부르는 노래 같다는 망상을 하며 오늘도 과몰입.
• 엔하이픈 'Drunk-Dazed'
- K팝 덕후라면 무조건 심장 뛰는 노래라고들 해서 속는 셈 치고 들어 봤는데 후렴구 중독성 미쳤다. 약간 옛날 유키스 노래 숨어 듣는 느낌이랄까. 보컬 7인 음색과 창법이 다 똑같아 구별할 수 없다는 점에서 나에겐 너무 입덕 장벽 높은 그룹인데, 그냥 구분하려 애쓰지 말고 이렇게 신나는 bgm 삼아 들으면 나름 괜찮을지도.
4월에 본 영화와 드라마
• 일본 TBS 드라마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2016)
- 가사 노동을 대가로 하는 계약 결혼이라니. 내 가치관에 반하는 장면과 대사 너무 많았지만 그냥 뻔한 좌충우돌 우당탕탕 로코는 아닐 거라는 믿음이 있어 끝까지 봤고. 결국 마지막에 그동안 답답했던 것들이 한방에 싹 가시는 만족스러운 결말을 봤다. 집안일도 노동이기 때문에 정당한 페이를 받아야 하는 걸 넘어서, 한 가정을 이룬 사람들은 '공동 경영 책임자'라는 마인드로 집안 경영에 임해야 한다는 것. 많은 사람들이 '좋아함의 착취'라는 대사에 공감했는데, 나는 '보람 착취' 쪽이 좀 더 와 닿았다. 자꾸 잘한다, 고생했다, 네 덕분이다라는 말로만 퉁치며 일을 시켜서는 안 된다. 성취감은 일 하는 당사자가 셀프로 느끼는 감정인 거고, 일을 시키는 상사나 고용주는 처우 개선으로 동기 부여를 시켜주는 게 맞다.
처음엔 남자로서의 매력이 1도 없어 보였던 호시노 재석 (유재석 닮은 호시노 겐)이 희한하게 점점 잘생겨 보여서 좀 짜증 나기도 하고 ㅋㅋ 여주 남주 서로 좋아하는데 둘 다 자존감 낮아서 계속 실수하고 눈치 보는 게 답답하기도 한데, 그냥 둘이 그러고 사는 게 미친 듯이 귀엽다. 극 중 대사에도 나오지만 귀여운 건 최강이에요! 귀여움 앞에서는 복종! 전면 항복이에요!
"다들 누군가가 필요로 해주기를 바라서, 하지만 잘 되지 않아서, 여러 가지 마음을 조금씩 포기하면서 울고 싶은 마음을 웃어넘기고 그렇게 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제 마음을 인수 분해해봤어요. 괜한 것들을 걷어 치우고, 마지막에 뭐가 남는지."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을 할 수 있다. 하나씩 세계가 넓어진다."
• 영화 <야구소녀> (2019)
- 누구나 무난히 좋아할 법한 노력하는 청춘의 도전과 성장 이야기인데, 주인공이 주수인이라서, 그렇게 막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난 떠는 타입도 아니고, 그냥 야구를 더 잘하고 싶어 할 뿐인 덤덤한 그러서, 뻔하지만은 않은 영화가 됐다.
"내가 여자라는 건 장점도 단점도 아니에요"라는 대사가 임팩트 있었다. 여자라서 더 힘들고 어렵다 한 적 없다. 그냥 세상에는 그만큼 어려운 일들이 있는 법이다. 적어도 노력하는 이들이 성별을 이유로 포기하게 만드는 장애물은 없었으면 좋겠다.
"단점은 절대 보완되지 않아. 단점을 보완시키려면 장점을 키워야 돼."
4월에 인상 깊게 본 콘텐츠
- 원래 하도 많이 봐서 고르고 골라 적었던 항목인데, 이번 달에는 뭐 거의 본 게 없다. 너무 충격적이다.
4월에 잘한 소비
• 그랜드워커힐 호캉스
- 운이 좋아 이런 호사를 다 누려본다. 애프터눈 티, 해피아워, 조식까지 다 챙겨 먹느라 바빴네. 이런 고급 호텔은 처음 묵어보는데 큰 방, 한강뷰, 명품 어매니티 다 좋았지만 제일 와 닿았던 건 단연 친절함이었다. 요즘 회사 생활에 너무 치여서 그런지 나한테 이렇게 친절한 사람들 너무 오랜만에 봐서 매 순간이 감동이었다.
• 스튜디오 무드등, 일명 '선셋 조명'
- 원래 충동소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인데, 일하다 너무 빡쳐서 잠깐 인스타 켰다가 오늘의 집 광고 보고 고민도 안 하고 바로 질러버린 ㅋㅋㅋ 까먹고 있다가 한참 후에 배송 와서 깜짝 놀란 문제의 조명. 아담한 내 방 사이즈에 딱 맞는 저렴이인데 밤에 요거 하나 켜놓고 있으면 나름 분위기가 산다.
4월에 갑자기 일어난 일
어느 날 갑자기 조직장이 되었다. 고민할 시간은커녕 준비할 시간도 없이, 정말 말도 안 되게 갑자기 그렇게 됐다. 처음에는 내가 인정받은 건가 싶은 마음에 기쁘기도 했고, 새 조직을 잘 이끌어가 보고 싶다는 의욕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긍정적인 마음은 이틀을 채 넘기지 못했다.
일에 있어서는 이렇게 약한 사람 아닌데 인간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조직에 사람은 없는데 해내야 하는 업무 자체가 너무 많고, 생전 초면인 신규 과제가 또 계속 생기고, 잘해야 한다고 부담 오지게 받고. 여기저기서 이건 어떻게 하는 거냐 이렇게 해줄 수 있냐 1분에 한 번꼴로 물어오고, 나도 모르는데 답은 해야 하니 미치겠고, 쉴 새 없이 회의하고 카톡 답장한 거밖에 없는데 퇴근 시간이라 정작 내 업무는 밤에 시작해서 자정에 겨우 끝내고. 그렇게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조직원들을 잘 케어해주지 못한 문제가 생기고, 그런 얘기를 듣는 내 멘탈은 그럼 누가 붙잡아주지? 얼레벌레 리더의 고통과 슬픔은 쪽팔려서 어디 털어놓을 곳도 없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건 초반에는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막막함에 압도당한 채로 살았는데, 한 달쯤 지난 지금은 우선 올해만 어떻게든 버텨내 보자라는 생각이다. 일은 여전히 쉽지 않지만 이제는 넘어지고 구르고 까이는 게 두렵지 않고 금방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안다. 처음보다는 스트레스도 덜하고, 이제 생활 리듬과 건강도 되찾아 일보다 더 중요한 내 삶을 회복했다. 나는 다 괜찮아. 다 할 수 있어. 매일 아침 출근 의식으로 스트레이키즈의 'MIROH'를 듣는다. "힘들지 않아 거친 정글 속에 뛰어든 건 나니까 I'm OK ^_ㅠ"
4월에 잘한 일
- 요즘 새로운 한 주를 기다리게 하는 유일한 이유가 되어주는 건 축구. 지난달부터 여자 풋살 클래스를 다니고 있는데 한 지난주쯤부터 새삼 와 이거 미쳤는데? 왜 이렇게 재미있지? 싶다. 경기 뛰면서 아드레날린이 샘솟는 게 느껴지고, 오랜만에 승부욕도 불타오르고, 내가 골 넣거나 찬스 잘 만들었을 때의 희열감이 장난 아니다. 아주 독한 후크송에 중독된 것 마냥 일할 때도, 밥 먹을 때도, 자려고 누워도 푸른 구장이 눈앞에 아른거리고, 발에 닿는 모든 걸 다 뻥뻥 차 버리고 싶을 정도로 심각한 축구 중독 증세를 보이고 있다. 하.. 내 심장에 지소연이 사나 봐. 주 5일 축구하고 하루 쉬고 하루만 일하고 싶다..
- 바빠서 못 쉴 운명인 걸 미리 알았는지, 3월 말~4월 초에 제주도 여행 다녀온 거랑 이미 예약해둬서 바꿀 수 없었던 호캉스 다녀온 거 최고 잘한 일이었다. 역시 쉴 수 있을 때 틈틈이 쉬어줘야 한다. 제주도는 오랜만에 혼자 떠난 여행자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어 좋았고. 호캉스는 오랜만에 호강하고, 맛있는 거 먹고, 밤새 노래 틀어놓고 따라 부르며 놀고, 회사 사람이 아닌 친구와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소중했다. 아마 상반기 중에는 다시 이런 시간 못 갖겠지.
4월에 아쉬웠던 일
- 이번 달에 가장 많이 한 생각 1위 '내 탓인가?'. 보통 이런 생각을 하는 쪽의 잘못이 아닌 경우가 많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리더가 된 후로는 회사에서 생기는 크고 작은 모든 문제들이 다 내 탓인 것만 같다. 그땐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결정을 내린 거였고, 틀렸다면 경험이라 생각하고 다음부터 안 그러면 되는 거다라고 다른 사람들한테 말은 잘하면서 왜 나는 그렇게 못 하~니!
- 스트레스가 바로 몸에 이상 반응으로 오는 게 느껴졌다. 무조건 건강을 최우선으로 챙겨야 한다. 전에는 어리다는 이유로 건강검진에서 패스한 구간들이 꽤 있었는데, 이제 30대가 되어 처음으로 대장내시경까지 받아봤다. 다행히 큰 이상은 없었지만 내가 나를 지켜줘야 한다는 걸 새삼 깨달은 계기가 됐다.
4월에 행복했던 순간
1. 제주에서 서울 올라오는 비행기에서 본 노을
2. 2000년대 초반 노래로 달렸던 호텔 방구석 노래방
3. 축구가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던 셋째 주 주말, 그리고 내가 세 골이나 넣은 미친 텐션의 넷째 주 주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