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4. 독일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 - 미떼 야경
눈을 떴는데 침만 삼켜도 목이 따끔따끔했다. 망했다. 오늘은 베를린에서 보내는 마지막 하루, 지난 3일 간 생각보다 못 본 곳이 많아 오늘 빡세게 쏘다닐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동선을 다시 짜 봐야겠다는 핑계로, 핸드폰을 손에 쥐고 다시 이불속에 파묻혀 미적거렸다. 왜 하필 오늘 감기에 걸린 거냐.
사실 오늘의 첫 행선지는 답정너였다. 2년 전에 갔을 때 말 그대로 '문화충격'을 받았던 카페 Roamers. 그 사이에 인기가 더 많아져 웨이팅은 필수라고 들었다. 숙소에서 걸어서 15분 정도라서, 산책 겸 걸어 가 오픈 10분 전쯤 도착했다. 앞에 이미 세 팀이 대기 중이었고.
우든 테이블 위로 식물이 무성한 플랜테리어, 내가 기억하는 그 모습 그대로다. 달라진 게 있다면 '베를린스러운' 자유분방함 대신, 나 같은 관광객으로 빽빽하게 가득 차, 여유 같은 건 더 이상 느낄 수 없었다는 점.
지난번에 동행과 왔을 때 맛있게 먹었던 플레이트 메뉴에 블랙커피를 주문했다. 큰 쟁반에 빵, 야채, 계란, 후무스, 치즈, 버터 등을 무심한 듯 시크하게 올려놓은 건데, 이게 뭐라고 참 건강하게 맛있다. 여기에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당근 케이크로 마무리해줘야 하는데, 역시 혼자서 그것까지 클리어 하긴 무리다.
밥 먹는데 옆에서 에단 호크, 에단 호크 그러길래 주위를 둘러봤는데 정말 에단 호크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들어와 바 자리에 앉았다. 진짜 에단 호크라기엔 너무 젊었다. 딱 '비포 선라이즈' 속 에단 호크 그 자체. 너무 비현실적으로 잘생겨서 미안하지만 잠깐 넋 놓고 쳐다봤다.
여행하면서 하루 세 끼 중에 아침을 가장 잘 챙겨 먹는 듯하다. 소화시킬 겸 근처에 예쁜 가구점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 봤다. 그런데 문이 닫혀있어 아직 오픈 안 했나 의아하던 찰나, 쌩 달려오던 자전거가 내 앞에 급정거로 멈췄다. 알고 보니 가게 주인, 늦어서 미안하다며 오늘의 첫 손님이라고 환영해줬다.
주인이 문을 열어주고, 어두컴컴한 창고에 불이 하나 둘 켜지니 꼭 영화 <뷰티 인사이드>에 나오는 가구점 같았다. 나도 모르게 '와..'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빈티지 보물로 가득한 이 큰 창고에 혼자 덩그러니 있으니 이 모든 것이 나의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이런 멋진 물건들로 나만의 공간을 꾸민다는 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일까. 언젠간 꼭 해보고 싶은 일.
예쁜 걸 보니 또 예쁜 걸 보고 싶어 졌다. 지난번에 본 노란 바닥 미술관, Berlinische Galerie를 꼭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그땐 갤러리 건물에도 레터링이 있어서 더 특색 있었는데, 외관이 살짝 정비된 듯하다. 그래도 샛노랑 바닥 자체만으로도 취저 탕탕당했고요. 노랑 덕후인 만큼 여기서 내 사진을 예쁘게 하나 남겨보고 싶었는데, 수백 장 중에 하나도 못 건졌다고 한다. 물론 전시는 안 봤다.
오늘은 베를린에서 가장 가장 힙한 지역 크로이츠베르크 도장깨기를 할 계획이었다. 밤에는 술 먹고 춤추고, 주말 밤에는 클럽 가기 전 베를린 힙스터들의 아지트라는 카페 겸 바 Luzia부터 공략했다. 쫄보라 아무도 없는 대낮에 첫 손님으로 입장했다.
그냥 커피를 마실 수도 있었지만, 메뉴판을 보고 이름에 'Berliner' 들어가는 술은 다 먹어보고 싶어서 Berliner Sommer를 주문했다. (참고로 가을이었는데 Berliner Winter는 아직 안 나왔단다.) 달달한 체리맛 술이었지만 보기보다 꽤 알코올 도수가 느껴져서, 아주 천천히 마셨다. 급할 게 없잖아.
마침 주말이라고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연락이 와서, 보이스톡으로 첫 통화를 했다. 토요일 밤이라 나 빼고 다 모여 고기 구워 먹고 있다는데 부럽지 않냐고 했다. 글쎄, 아직은 토요일 대낮에 혼술 하는 게 더 좋은 걸.
한 병을 다 비우니 취기가 확 올라왔다. 아직 오후 1시도 안 되었는데 아슬아슬하다. 아무래도 오늘 크로이츠베르크 도장깨기는 실패각. 그냥 발걸음 닿는 대로 돌아다니다 보면 시간이 가겠지. 바로 근처에 있는 베를린에서 가장 유명한 편집샵 Voo Store. 실제로 보면 진한 에메랄드빛의 외관이 참 예쁘다.
독어도 못 읽는 주제에 서점만 보이면 다 들어가 본다. NGBK는 온갖 종류의 서적과 프린트물을 다 파는 그냥 동네 서점 같았는데, 이 동네 자체가 원체 힙해서 예사롭지 않아 보였달까. 지금이 아트위크라 그런지, 원래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안쪽에서는 예술 전시도 하고 있어 짧게나마 감상했다. Motto는.. 건물 구조가 신기했을 뿐 사실 큰 임팩트가 없었다.
걷다가 걷다가 벌써 발이 너무 아파서 마침 오는 버스를 탔다. 대충 오버바움 다리 근처까지 가는 코스를 검색해 구글맵을 따라 내렸다. 이렇게 좋은 날씨에 공원이 나오길래 여유를 즐겨보려고 했는데 여기 심상치 않다. 입구서부터 공원을 통과하는 내내 눈이 시뻘건 무서운 아저씨들이 말을 걸어왔다. 물론 쳐다도 안 보고 무시했지만, 갑자기 술이 번뜩 깨면서 '아 나 잘못 왔구나' 싶었다. 베를린 위험하다고 생각한 적 별로 없는데, Görlitzer Park 여기 조심하세요.
취해서 그리고 무서워서, 얼떨결에 크로이츠베르크를 다 지나와버렸다. 하지만 후진은 없다. 오버바움 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가보자.
꼭 한번 묵어보고 싶었지만 가격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Michelberger Hotel에 가봤다. 숙박은 못해도 로비 구경은 할 수 있으니까. 책장에 기둥, 테이블, 전등갓까지 온통 책 천지. 책을 테마로 하는 곳은 늘 멋있다. 인테리어 소재로 이렇게나 잘 활용하는 곳은 더 멋있다. 로비 카페에서 진저에일 한 잔 하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아마도 베를린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가 바로 근처에 있다. 베를린 장벽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은 아픈 역사를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점이 멋지다. 여전히, 사진 찍는 관광객이 너무 많아 예술을 온전히 감상하기엔 적합하지 않지만. 언제든 누구든 지나가면서 볼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긴 open art gallery.
베를린에 머물렀던 나흘이 마침 딱 1년에 한 번 있는 아트위크 기간이었다. 하루 이틀만 더 있었으면 좋았을 걸. 나흘은 도시만 보기에도 너무 짧은 시간이라 따로 예술을 찾아다니진 못했다.
굳이 미술관에 가지 않아도 베를린 도시 곳곳을 예술 작품 보듯 감상해볼 것을 추천한다. 지나가다 우연히 본 그라피티의 메시지, 과감하다 못해 난감한 베를리너들의 패션, 칙칙한 지하철역에 생기를 불어주는 과감한 컬러. 어느 하나 평범한 게 없는 도시다.
점심도 안 먹고 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니 슬슬 배가 고파왔다. 베를린에서의 마지막 식사가 될 수도 있으니 신중한 고민 끝에 그 유명한 메링담 역 무스타파 케밥을 먹으러 갔다. 그런데 줄 무엇.. 주문하기를 기다리는 사람만 족히 50명은 넘어 보였고, 나도 한 시간은 기다린 듯하다.
맛은 말해 뭐해. 여기 베를린에서 가장 유명한 맛집 중 하나다. 생각보다 너무 오래 기다린 탓에, 약속 시간이 다 되어가 숨도 안 쉬고 케밥을 입에 쑤셔 넣고, 급히 자리를 떴다. (목 막힘)
어젯밤 루프탑 바에서 만난 동행과 오늘 저녁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시내 곳곳에 유명한 건축물에 화려한 빛을 쏘는 일루미네이션 'Berlin Leuchtet'을 한단다. 밤에 혼자 다니고 싶지는 않았고, 사진 찍기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면 더 재밌을 것 같아서. 본격적인 빛 축제는 독일 통일 기념일이 있는 10월 초에 시작되지만, 베를린 돔 일대에서는 맛보기로 미리 보여주나 보다.
아마도 다음 주, 통일 기념일 행사가 가장 크게 열릴 브란덴부르크 문 앞. 아쉽게도 행사 준비로 통제 중이라 반대편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때까지 여기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번에 독일의 매력에 제대로 빠진 동행과 벌써 세 번째 독일 여행 중인 나, 우리는 미래에 열릴 축제 모습을 상상하며 운터 덴 린덴을 지나 돔까지 걸었다.
베를린 돔은 정말이지.. "좋다, 멋있다, 예쁘다"라는 말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실제로 봤을 때의 장엄함과 거대한 아름다움에 말을 잃었다. 마치 한 편의 대형 뮤지컬을 본 기분. 그저께 본, 2년 전에 본 그 베를린 돔이 맞는지.
가만있어도 좋은데 자꾸 이렇게 빛 쏘고 그러면 내가 베를린을 어떻게 떠나? 너무 좋아서 2년 만에 다시 왔는데 이제 또 떠나야 한다니. 이런 장관이 도시 전체에 펼쳐질 걸 못 보고 떠나야 한다니. 여행 계획을 너무 빡빡하게 짠 과거의 나를 잠깐 원망했다.
한창 넋 놓고 감상하다 불이 꺼지고 깜깜해졌길래, 혹시 이제 다른 그림 나오면 나 기절할 거라 농담으로 그랬는데 정말 기적이.
일루미네이션의 여운에 흠뻑 젖은 채 박물관 섬을 산책했다. DSLR을 가지고 다니며 여행 중 만난 사람들의 사진을 찍어주는 걸 좋아하는 동행이 내게 인생샷을 선물해주겠다며 이런저런 포즈를 요구했다. 나는 사진 찍는 건 좋아하지만 찍히는 건 민망해 어쩔 줄을 몰라하는 사진 알러지 보유자라. 내가 너무 딱딱하게 굳어있고, 표정도 못 지어서 미안하다고 했는데, 오히려 그는 모델의 베스트를 이끌어내는 건 사진가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라며 최선을 다해줬다. 여행 중 찍은 내 사진이 거의 없어 뒤늦게 아쉬움이 좀 드는데, 이때 좀 더 열심히 해볼걸. 민망하면 뭐 어때, 누가 신경 쓴다고.
즐거운 여행 되시라며 동행과 작별인사를 하고, 늦게까지 연 슈퍼가 있길래 물과 맥주를 한 병씩 샀다. 아무리 라들러라지만 맥주캔이 이렇게까지 상큼할 일인가 싶은 베를리너 킨들 라들러. 숙소 가서 씻고 자기 전에 한 캔 하면 딱이겠다.
사진 정리하며 혼자 조용히 한 잔 하려고 숙소 거실에 나왔다. 거실에는 오늘 같이 방을 쓰는 우크라이나 남자와 뉴질랜드 여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도 자연스레 대화에 합류하게 되었는데 이 우크라이나 남자가 문제였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니까 눈빛이 달라지면서, 자꾸 일방적으로 한국에 대한 질문을 쏘아붙였다. 처음엔 자기가 한번 먹어본 코리안 디저트가 있는데, 묘사를 하더니 그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결국 앙금이 든 떡 같은 것으로 밝혀졌는데, 구토하는 모션을 취하며 외계인이 먹을 법한 음식이었다 그러는 거다. 뭐, 식감이 생소했을 수도 있고, 사람 입맛은 다 다르니까.
여기까진 좋았는데, 자기가 여행하면서 한국 사람을 엄청 많이 보았단다. 요즘 젊은 한국 사람들 여행 좋아한다 정도로 대답했는데 아니래. "What is wrong with Korean people?" 한국에 뭔가 문제가 있으니까 자꾸 밖으로 도망쳐 나오는 게 아니냐 그러더라. 황당해서 사회에 문제 있는 게 아니라, 개인이 휴가로 해외여행을 택한 거지, 너도 나도 지금 해외에 나와있지 않냐. 그렇게 우리는 한참 동안 한국의 문화와 사회 구조에 대해 공격하고 방어하고를 반복했다.
무례한 질문과 태도에 불쾌해져, 남은 맥주를 원샷하고 그냥 방에 들어와 버렸다. 나도 한국(..이라기 보다는 그곳에서의 나의 일상) 지긋지긋해서 쌩까고 여행 온 건데, 베를린까지 와서 그래도 열심히 사는 나라라고 변호하고 앉아있다니. 분해서 한동안 잠을 못 이뤘다. 불쾌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