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5. 독일 프랑크푸르트
아침 일찍 눈을 떠 서둘러 짐을 챙겼다. 이제 여행 첫 도시인데 벌써 이렇게 캐리어를 잠그기 힘들면 어떡하냔 말이다. 드디어 첫 기차 이동, 프랑크푸르트에 가는 날이다. 하도 '볼 거 없는 도시'로 악명 높아 주변에서 왜 가냐고들 했지만, 그 도시가 별로인지 아닌지 그건 내가 판단해. 나름 세 번째 독일인데, 아직 한 번도 안 가본 독일 대표 도시라 궁금했다.
몇 달 전 야심 차게 구매해놓은 유레일 패스를 드디어 오늘 개시해야 하기에, 1시간 정도 여유를 두고 베를린 중앙역에 도착했다.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면서 여기서 개시하는 게 맞겠지, 내가 빠뜨리고 온 서류가 있나, 설마 진짜 캐리어를 자전거 자물쇠로 묶어둬야 하나 온갖 걱정 투성이었는데 다행히 순조롭게 패스 개시 성공! 이제 커피와 간단한 요깃거리를 사서 기차 타면 된다. 뭐 먹을지 너무 고민하다가, 결국 급하게 핵뜨거운 스벅 아메리카노와 맛없는 야채랩 같은 걸 사서 기차 출발 2분 남겨두고 겨우 뛰어가서 탔다.
처음 타본 독일 ICE 기차는 대만족. 2등석인데도 깔끔하고, 좌석마다 예약 구간 표시도 잘 되어있고, 와이파이도 무료로 펑펑 터진다. 4시간을 가는데 잠도 안 오고, 눈치 보여서 음식도 못 먹고 (사실 그 뜨거운 커피를 무릎에 쏟아 한바탕 했다더라.) 베를린 사진 정리나 하다 드디어 도착!
숙소 체크인까지 시간이 남아 라커에 짐을 보관해야 했다. 맨 처음 보관소에는 빈 라커가 없고, 그다음 찾은 보관소에는 작동이 정상적으로 되는 라커가 별로 없고, 겨우 빈자리를 찾았더니 잔돈이 없고, 편의점에 다녀오니 자리를 빼앗겼고, 결국 팔도 안 닿는 맨 위칸에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겨우 골인. 빼는 건 미래의 나에게 맡기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프랑크푸르트야 내가 왔드아!
정말 소문대로 역을 나오자마자 금호타이어가 뙇! 하고 반겨준다. 괜히 반가움. 중앙역 앞에서부터 직선으로 쭉 뻗은 도로가 인상적이었다. 결코 큰 도로는 아니었는데 위치나 조형이 이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길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 사인을 보니 비로소 내가 유럽 경제의 중심지 프랑크푸르트에 와있구나 싶었다. 유로 타워는 지금까지 유럽에서 본 그 어느 건물보다 높고 크고 독일스러웠다. 너무 배고파서 이 앞에 서서 다 찌부된 야채랩을 꺼내 먹었다. 비둘기 떼 어택을 당해 반은 버렸지만.
지도를 보며 시내 중심지 같아 보이는 곳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그런데 갈수록 인적이 드물어 의아했다. 나름 대도시라 바글바글한 걸 기대했는데 텅 비었다. 아직 대낮인데 왜 그러지.. 핸드폰 시계를 보고 깨달았다. 아, 오늘 일요일이구나.
집-회사-집-회사 하는 일상에서 일요일이란 그 지루한 루트를 벗어날 수 있는 황금찬스, 일요일만 보고 버티며 일주일을 살아낼 수 있는 원동력 같은 거다. 그러나 장기 여행자는 요일을 잊고 산다. 날짜란 여행을 시작한 일차일 뿐, 내가 무슨 요일에 뭘 했는지는 알 필요가 없다. 주말이 대목인 우리나라와 달리 유럽은 대부분의 상점이 일요일에 휴무다. 여기 사람들은 일요일에 장도 안 보고, 집에서만 밥 먹고, 어디서 뭐하고 노나.
나의 여행에 있어서 카페는 매우 중요하다. 가끔은 꼭 가보고 싶은 카페 자체가 행선지의 목적이 되기도 한다. 베를린에 비하면 카페 불모지(...) 수준인 프랑크푸르트에서는 딱 두 곳을 기대하고 왔다. 괴테가 매일 아침 우유 사갔다는 가게 터에 세운 100년 전통의 카페 Wacker's Kaffee, 분명 내가 좋아할 거라며 누군가 추천해준 카페 Pause.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두 곳 모두 일요일 휴무. 낮에 커피를 한 잔도 못 마시게 생겼다니, 절망적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시간 되면 가려고 알아본 미술관 두 곳도 휴관에 공사 중이다. 프랑크푸르트 나한테 진짜 왜 이래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 때쯤, 저 멀리 오픈한 것 같아 보이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파이브가이즈! 6년 전 미국 생활 추억에 젖어 홀린 듯이 들어갔다. 치즈버거와 솔트 캐러멜 셰이크. 진한 아메리칸 플레이버 (a.k.a 칼로리맛) 그 자체. 먹고 나니 이제 좀 살 것 같다.
배를 채우고 둘러보니 이 텅 빈 도시에서도 나름 예쁜 구석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칙칙한 건물 틈 사이 귀여운 시계탑이 빼꼼 고개를 내밀고, 일요일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이 로맨틱해 보였고, 도시 분위기에 안 어울리게 트램이 너무나도 귀염뽀짝했다.
발걸음이 닿는 대로 걸었더니 가장 유명한 관광지 뢰머 광장까지 와버렸다. 그리고 할 말을 잃었다. 무슨 행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광장에 사람들이 가득 차서 움직이기가 힘들 정도. 한쪽에서는 꽤 규모 있는 음악회 공연을 하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삼삼오오 모여서 맥주나 와인에 길거리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 일요일에 다들 뭐하고 노나 했더니 여기 다 모여있었구먼.
축제 분위기에 나도 한 잔 안 할 수가 없지. 맥주를 마시려다 어디선가 프랑크푸르트의 애플 사이다가 유명하다고 본 게 생각났다. 애플 사이다는 전혀 내 취향이 아니지만, 그래도 내 생에 프랑크푸르트를 언제 또 와볼까 싶어 도전해보기로. 아펠바인 (apfelwein), 특산물이라니 마셔는 드릴게. 비록 한 입 맛보고 바로 후회했지만.
정신없는 틈을 빠져나오니 마인강이 보였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은 참 매력적이다. 답답한 빌딩 숲 사이에서 흐르는 물길은 이 도시가 정체되어 있지 않는다는 느낌을 주고, 강과 땅이 만나는 곳은 시민들에게 일상 틈의 쉼터가 되어준다. 한강에 비하면 청계천 수준인 베를린의 슈프레 강을 보다 와서 그런지, 그래도 마인강 봤다고 조금이나마 탁 트인 기분이 들더라. 무엇보다 날씨가 완벽했고.
마인강의 명물 아이젤너 다리 (Eiserner Steg)는 사실 다리 그 자체로는 볼품없었지만, 그 위에서 사람들 관찰하는 재미가 있었다. 우연히 프러포즈하는 장면도 목격했다. 둘이 서로를 끌어안은 순간 수많은 사람들의 진심 어린 축하를 받았다.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나도 진심을 다해 박수를 보냈다. 저들은 지금 어떤 기분일까, 어떻게 만났고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강 건너편에는 박물관 대여섯 개가 쪼르륵 나란히 있다. 이때가 오후 5시쯤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다 문을 닫더라. 나는 아무래도 이번 여행에서 전시와는 인연이 아닌가 보다. 그래도 박물관·미술관이라는 존재만으로, 또 걸려있는 전시 현수막의 효과로, 강 건너편보다는 훨씬 여유롭고 풍요롭고 이지고잉 하는 분위기.
해가 지기 전에 다시 중앙역에 가서 짐을 찾고, 숙소 체크인을 했다. 그리고 잠깐 앉아 쉬지도 못하고 바로 나왔다. 저녁을 함께 먹기로 약속한 동행들이 있기 때문이다.
약속 장소까지 숙소에서 도보로 25분 정도 걸리는데 그냥 걷기로 했다. 여기 또 언제 올지 모르니까 저녁에는 어떤 모습인지 봐 두면 좋을 테니. 그러고 보니 프랑크푸르트 시내에서 대중교통을 한 번도 안 탔네. 해가 지고 좀 선선해져서 그런지, 확실히 낮보다 사람이 많았다. 삐까뻔쩍 해 보이는 쇼핑몰도 엄청 많은데, 역시 일요일이라 다 닫았다. 왜 사람들이 프랑크푸르트에 쇼핑하러 온다는지 공감은 못했지만 이해는 됐다.
일요일 저녁에 밥 먹을 곳을 미리 알아둬 다행이었다. 여기 맥주가 맛있다고 해서 찾아뒀는데, 여기 오자고 안 했으면 또 오픈한 펍을 찾아 한참을 돌았겠지. 그래도 독일 왔으니 독일 음식 먹어보자며 슈니첼과 굴라시를 시켰다. 너무나도 김밥천국 돈까스 플레이팅에 엄마가 데워준 김치찌개 비주얼이지만.
사실 음식은 그냥 배 채우기 용이었고, 역시 여기 맥주 맛집 맞네. 첫 잔으로 메뉴판에 Hell이라고 쓰여있는 걸 골랐다. 왠지 지옥에서 온 어두운 맥주 느낌이라 골라봤는데 독일어로 hell이 bright이라는 뜻이라네. 이름대로 정말 밝은 금색의 라거가 나왔고, 그 청량함에 반해버렸다. 헬레스, 제대로 내 취향이다. 찾았다 내 맥주! 그다음에 마신 둔켈은 우리가 아는 진한 흑맥주 느낌이라기보다는 밀맥주 바이젠 맛에 가까워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잔을 비웠고.
너무 운 좋게 베를린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난 탓이었을까,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난 분들과는 별로 기억에 남을 만한 시간을 갖지는 못했다. 돌아오는 길에 한 분과 마인강 야경을 보러 갔는데 음.. 해 질 녘이었으면 볼 만했을 텐데 야경은 칙칙함 그 자체.
숙소로 돌아와 씻고 거실 서재에서 잠깐 책을 보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이번 여행에서 한인민박에 묵을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우연히 서재 사진을 보고 '어머 여기 뭐야' 하고 검색해봤는데 숙소 이름이 흔하지 않은 내 영어 이름과 똑같은 거다. 이건 운명이라며 무언가에 홀려서 예약해버린 곳이었다. 거실 한 면을 꽉 채운 서재는 꽤 멋있었지만, 역시 나는 한인민박과는 잘 안 맞는다. 잘 모르는 친척 어른에 신세 지는 느낌.
그렇게 마무리한 프랑크푸르트에서의 하루. 마인강변에서 강바람을 맞으며 자유를 느꼈던 순간 빼고는 어쩐지 다 뜨뜻미지근한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하필 일요일에 와서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말한 대로 프랑크푸르트가 정말 볼 거 없는 도시였던 걸까. 나는 아직도 헷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