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7. 스위스 스트라스부르 - 루체른
스트라스부르의 아침이 밝았고 나의 멘탈은 박살 났다. 아무리 찾아봐도 화장품 필수템인 선크림과 파운데이션이 없는 거다. 전날 프랑크푸르트 숙소 화장실이 엄청 좁고 복잡했는데 아무래도 거기 두고 온 듯하다. 아침 일찍 연 마트가 있길래 혹시나 하고 들어가 봤다. 물가가 사악하다는 스위스에 넘어가기 전에 해결하는 게 좋을 듯하여, 한국에서도 비싸서 안 쓰는 나름 고가 브랜드의 파운데이션을 어쩔 수 없이 사버렸네.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두고 아침을 먹자. 근처 카페 중 평점이 좋길래 알아봐 둔 L'atelier 116이라는 베이커리에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다시 한번 이곳이 프랑스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바게트, 크루아상 등 온갖 다양한 종류의 빵부터 너무 예뻐서 먹기 미안하게 진열되어 있는 디저트까지. 동네 카페일 뿐인데 눈 돌아갈 뻔했네.
소박하게 에끌레어와 블랙커피 한 잔을 시켰다. 에끌레어 한 입을 베어 문 순간 안에 가득 차 있던 크림이 줄줄 흐르는데 너무 달콤하고 포근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 역시 프랑스 베이커리는 최고다. 미안하지만 독일에서 먹은 빵들은 정말이지 맛없었어.
어디 멀리 가기엔 시간이 애매하여, 어제 저녁 코스 그대로 스트라스부르를 복습하기로 했다. 단체 관광객 틈에 끼어 대성당 내부에도 들어가 봤다. 형형색색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인상적이었지만, 종교도 없고 설명도 없어서 그런지 그 이상의 무언가를 느끼기엔 부족했다. 그래도 누군가의 기도 덕분인지, 분명 아침 내내 흐렸는데 성당 밖을 나설 때쯤엔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다.
맑은 하늘 아래 쁘띠 프랑스는 그 '쁘띠'함이 배가 되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애니메이션 속에 들어와 걷고 있는 듯한 기분.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피었다. 역시 예쁜 걸 싫어할 사람은 없다.
운하를 배경으로 서로 사진을 찍어주던 한국인 모녀를 만났다. '예쁘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딸의 인생샷을 찍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어머니. 우리 엄마 생각이 났다. 나는 반대로 이 배경으로 우리 엄마 사진을 찍어주고 싶었다. 엄마가 여기 오면 참 좋아할 텐데, 언젠가 모시고 꼭 한 번 와봐야겠다는 뻔한 다짐을 하며, 스트라스부르를 떠났다.
이제 기차 타는 게 제법 익숙해졌나 보다. 기차를 어디서 타야 하는지 물어보는 중국인 아저씨에게 친절하게 플랫폼을 알려 주고, 나는 스위스 루체른에 무사히 도착했다.
루체른 한국 여행객의 90%가 묵는다는 백패커스 루체른으로 숙소를 잡았다. 체크인 시간에 딱 맞춰와서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한국인들이 정말 많이 오기는 하는지 체크인 방법과 함께 '참을성을 갖고 기다려 달라'라는 한국어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역시 성격 급한 우리 한국 사람들.
짐을 풀자마자 처음으로 비상식량을 꺼냈다. 엄마가 굳이 손수 은박지에 싸준 김에, 우리 엄마는 못 먹게 해서 몰래 사온 오징어채 볶음까지. 스위스 물가에 충격받기 전에 미리 배 채워두려 먹은 거지만, 사실 한국 밥이 그리웠나 보다. 꿀맛 그 자체.
숙소를 나서자마자 보인 뷰에 놀라서 홀린 듯이 걸어갔다. 바로 앞에 있는 호숫가 풍경이 세상에.
날이 흐려서 기대를 안 했는데 저 멀리 알프스가 보인다. 이게 실화인가 싶었던 순간. 처음에는 놀라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다가, 이내 모든 걸 내려놓고 차분히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다. 쌀쌀한 가을이었지만 옷 벗고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과, 나 같은 인간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고고하게 갈 길 가던 백조까지. 급할 일 없이 평화롭던 배경. 이게 스위스구나.
이제 사람들이 많은 루체른 중앙역 쪽으로 나가보자.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다리라는 카펠교가 보인다. 날이 흐려서인지, 노란 지붕에 꽃 달린 목조 다리가 글쎄 썩 예뻐 보이진 않았다.
그보다는 주변에 보이는 소소한 풍경들이 이곳이 스위스임을 알려주는 게 재미있었다. 루체른 구시가지에서 느낀 스위스스러움은 고급진 전통에 아기자기함을 두 스푼 정도 섞은 듯한 느낌.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손재주가 많고 귀여우신 부자 할머니.
딱히 관광지를 기대하고 온 도시는 아니지만, 실제로 한번 보고 싶었던 명소가 있었다. 바로 '빈사의 사자상'. 프랑스혁명 당시 전사한 스위스 용병들을 기리기 위한 위령비라고 한다. 분명 용맹함의 상징인 사자인데, 왠지 여리고 슬퍼 보인다. 거대한 바위틈에 갇혀 있고, 그 사이 연못이 가로막고 있어 더욱 멀리서 지켜만 봐야 하는 아련한 느낌.
다시 구시가지로 돌아오는 길에 또 한 번 마주한 믿을 수 없는 풍경. 다른 세상에 잠깐 와있는 듯한 두근거림. 지금 이 순간에 잘 어울릴 만한 노래로 '유포리아'를 틀어놓고, 꽤 한참을 멍하니 서있었다. 이런 거에 혼자 감동받고 마음 여려지는 사람.
이 촉촉해진 기분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다. 맥주 한 잔이 필요하다. 아마도 옛날의 시청 건물을 양조장으로 개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Rathaus Brauerei'. 내부는 지하 소굴의 비밀의 방 같은 분위기. 주문한 헬레스 큰 잔이 참으로 만족스러웠다. 아 역시 물이 좋으니 맥주 맛이 좋구나.
1인분 음식 메뉴가 기본 3~40유로길래 새삼 여기가 스위스라는 게 실감 났다. 가장 저렴하다는 이유로 주문한 로스트 치킨 (28유로). 우리가 아는 그 통닭에 감자 맛인데 식으니까 너무 맛없어서 울고 싶었다. 남기고 싶었지만 돈이 아까워서 입에 넣고 맥주로 밀어 삼켰을 지경.
이른 저녁을 먹고 나와 살짝 풀린 눈으로 다시 본 루체른 호수. 가로등 불빛이 너무 번져 보이길래 내가 생각보다 많이 취했나 싶었다. 온통 새파란 세상, 잔잔한 물가, 노란 조명, 그야말로 사진 찍을 맛 나는 최상의 조건.
물가(物價)는 사악하지만 물가(waterside)에서 본 풍경이 아름다워 용서되는 루체른. 내일은 세상 너그러운 마음으로 더 용서해주고 싶으니까,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