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높은 곳에 올라야 비로소
베른이 보인다

Day8. 스위스 루체른 - 베른 - 인터라켄

by 이리터

사실 오늘 일정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루체른 근교에 있는 리기산에 갈 것이냐, 당일치기로 베른을 구경할 것이냐. 아침에 눈 뜨는 순간까지도 고민하다가, 리기산까지 가는 법이 복잡하길래 쿨하게 후자를 택했다. 어차피 내일부터 자연은 질리도록 볼 거니까 하루라도 더 도시를 담아두자.

날씨가 여행을 만든다

어제의 간절한 바람이 닿은 걸까. 청명할 정도로 파랗고 맑은 하늘이 짠하고 나타났다. 호수가 너무 투명해서 자꾸 쳐다보다가 빠져들 것만 같은 충동이 들 정도였다. 이곳 시민들도 맑은 날씨가 반가웠는지, 아침부터 맨몸으로 뛰어들고 수영하는 사람들도 간혹 보였다.


캐리어를 끌고 중앙역까지 호수를 따라 이동했는데, 어쩐지 아쉬워 다음 기차를 타기로 하고 카펠교까지 마저 걸었다. 그렇게 내내 흐리더니 떠나는 날 다 돼서 이렇게 맑아버리면 아 정말 감사합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이렇게 밝고 파란 루체른 못 보고 떠났으면 너무 아쉬웠을까 봐.

완벽한 반영 (reflection)

나의 여행에 있어 카페는 정말 중요하다. 스위스를 다른 나라에 비해 살짝 덜 기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딱히 카페 역사가 깊거나, 카페 문화가 발달한 나라도 아니지만, 무엇보다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비싸다. 그래도 하루에 커피 한 잔은 해야지 싶어 중앙역 지하 Bachmann에서 아침 겸 먹을거리를 사들고 기차에 탔지만. 앞으로 스위스에서 1일 2 커피 할 수 있을까, 애꿎은 지갑만 뒤적여보며 한숨.

연어 토스트와 에그타르트처럼 생긴 커스터드 파이




화상 입을 정도로 뜨거운 커피를 다 식혀 마셨을 때쯤 기차는 베른에 도착했다. 중앙역 라커에 캐리어를 보관해두고, 시내로 나가며 왠지 모를 짜릿함이 느껴졌다. 나에게 주어진 5시간 안에 이 도시를 정복하겠다는 마음.

베른의 첫인상

볼 만한 곳 몇 군데를 미리 찾아봐두긴 했지만, 동선을 짜 온 것까지는 아니라 대책 없이 걸었다. 구시가지에서 한창 사람 구경이나 하다 저 멀리 건물 사이로 뭔가 탁 트인 곳이 보이길래 가봤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그림.

masterpiece

이렇게나 초록 초록한 도시를 본 적 있는가. 알고 보니 연방의회의사당 (Bundeshaus) 건물 뒤쪽 테라스인데, 마침 한창 점심시간 즈음이었다. 근처 직장인들인지 시민들인지, 다들 테라스 의자에 앉아 직접 싸온 도시락이나 테이크아웃 음식을 먹고 있었다. 이런 뷰가 일상의 점심시간 풍경이라면, 출근길이 즐겁지 않을까. 나도 아침에 조금 남겼던 연어 토스트 한 조각을 마저 꺼내 먹었다.

스위스인의 흔한 점심시간 복지

베른 구시가지 한가운데 있는 시계탑(Zytglogge). 시내에 높은 건물들이 없어서 그런지 어디에서나 빼꼼하고 고개를 내미는 것처럼 보인다. 오래된 시계탑이라니, 지극히 스위스스러운 이미지.

장난감 나라에 온 듯한 기분

Kramgasse 양쪽으로 귀여운 상점들이 줄지어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 거리 지하 가게로 들어가는 계단 입구가 건물 안 1층이 아닌, 도로 노면에 있다는 것. 특히 입구가 미끄럼틀인 어느 사탕가게 입구를 보고 너무나 귀여워버린 발상에 심쿵. 평범하게 길을 걷다가 미끄럼틀에 앉는 순간 새로운 세상으로 빨려 들어가는, 어린 시절 동심을 제대로 자극하는 소비 경험.

달달한 거 파는 데는 다 귀엽다




'베른'이라는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곰은 이 도시의 상징이다. 상징 동물이 있는 도시는 많지만, 베른이 조금 더 특별한 점은 바로 도시 안에 무려 '곰 공원'이 있다는 것이다. 아레 강변에 야생 자연 비슷하게 조성해놓은 공원에 진짜 곰들이 살고 있다.


곰은 무서우면서도 귀여운 양면성을 가진 동물이다. 살짝 위협적이긴 했지만 구역마다 각 곰의 이름과 히스토리가 설명된 팻말 덕에 이 곰들에게 친근감이 들기도 했다. 나를 포함한 열댓 명의 관광객이 곰이 움직이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곰이 물 마시러 가는 길을 따라 우르르 떼 지어 따라가는 장면이 웃기면서도 귀여웠다. 아이돌이야 뭐야~

누가 곰 둥글둥글하대? 생각보다 날렵하게 생겼다

이 도시를 둥그렇게 감싸고도는 아레강은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선풍기를 쐬는 듯 시원해진다. 호수도, 바다도 아닌 강이 어찌 저리 맑고 푸르를까. 보기보다 급류도 센 편이라 쏴- 하고 물 흐르는 소리가 마음속 막힌 어딘가를 뻥 뚫어준다.

강이 가로지르는 게 아니라 감싸고도는 도시

건너편 다리에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모습을 찍고 싶어서 뷰파인더를 켜놓고 기다렸다. 어떤 남자가 계단 난간에 걸터앉아 있길래 자유롭게 이 시원함을 즐기는구나 싶었는데, 내가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 강으로 몸을 휙 던져 버렸다. 다행히(?) 유유히 헤엄쳐 나오는 걸 보아 다이빙을 하고 놀았던 모양이다. 너무 놀라 심장이 철렁했던 기억이자 문화 충격.

이 사진만 봐도 심장 철렁

조금 더 올라가면 가장 높은 언덕에서 베른을 내려다볼 수 있는 뷰포인트 '장미 공원'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장미 공원 정상에 올라 서니 나도 모르게 감탄이 터져 나왔다. 이미 오는 길에 연방의회의사당과 곰 공원에서 두 차례나 전망을 봤는데 말이다.


높이 오를수록 보이는 시야가 넓어지고, 보이는 게 달라진다. 같은 색으로 통일되어 있는 지붕, 구시가지의 좁은 골목골목, 빈 틈을 허용하지 않는 빽빽한 나무, 완벽한 오늘 하늘까지. 모든 요소가 눈에 들어오면서 비로소 한 폭의 풍경으로 조화되어 보인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말이 피부로 와 닿던 순간.

햇살과 바람의 찬조출연마저 갓-벽

이 멋진 풍경을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곰 공원 뒤편에 옛 트램역을 개조한 브루어리 Altes Tramdepot에서 한 잔 하고 가야겠다. (이쯤 되면 옛 건물 개조한 브루어리 마니아) 야외 테라스 석에 앉아 베른 시내를 배경으로 헬레스 큰 잔을 들어 올려보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다. 물론, 음식값이 너무 비싸서 풀떼기만 들어있는 샐러드를 안주 겸 점심 삼아 때워야 했지만.

경치를 안주 삼아




베른 대성당은 도저히 한 프레임 안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유럽여행 8일 차에 벌써 큰 성당에 감흥이 떨어진 건지, 오늘은 그 웅장함보다 표정, 몸짓 하나하나 다르게 조각되어 있는 디테일에 눈이 갔다.

거대한 성당 앞에 인간은 한없이 작다

아침부터 내내 감사할 정도로 여행하기에 완벽한 날씨였는데, 구시가지로 돌아오니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새삼 이렇게 회색빛의 도시였나 싶었다. 길바닥도, 모든 건물도 놀라울 정도로 일관적인 색감. 그래도 사이사이 스위스의 상징인 빨간색이 눈에 들어왔다. 카메라를 들 때마다 모든 샷, 모든 프레임에 빨간색 포인트가 하나씩은 잡히던 도시.

트램, 버스, 표지판, 화단 모두 빨갛게 물들여 Red




해가 지기 전에 숙소에 도착하기 위해 서둘러 기차를 탔다. 밥 로스 아저씨의 작품 같은 풍경의 연속 끝에 인터라켄 동역에 도착했다. 역 바로 옆에 있다는 유스호스텔을 잡았는데, 진짜 이렇게 바로 옆에 붙어있을 줄은 몰랐다. 피곤하니 오늘은 일찍 들어가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숙소에 들어가 보니, 대체 이 스위스는 하다 못해 숙소까지 뷰가 쩔어버린다. 방에 하필 인스타 프레임 마냥 정방형 창이 나있는데 알프스 산이 그대로 보인다. 건너편 화장실에서는 두 호수를 잇는 강이 보이는데, 과장 조금 보태서 마시면 소다 맛이 날 것 같은 그런 캔디바 색이다.

흔한 유스호스텔의 방 뷰(좌)와 화장실 뷰(우)

결국 해가 저물 때까지 숙소 주변을 산책했다. 강을 따라 걸어도 보고, 다리도 건너 보고, 벤치가 보이면 잠깐 앉아있기도 했다. 서울에서 일상을 보내던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이 모든 게 너무나도 생소하다.


인터라켄 동역 앞에 꽤 큰 규모의 coop 마트가 있다. 스위스 사람들은 뭘 먹나, 어떻게 사나 구경도 하고, 저녁거리도 살 겸 들어가 봤는데 거짓말 안 하고 50%가 한국인, 30%가 중국인이다. 종류별 라면에 김치, 고추장은 기본. 여기 약간 설악산 초입 상권 같다는 생각이 들어 소름이 돋았다.

네 다음 설악산

coop에서 작은 로제 와인 한 병과 안주로 먹을 손질된 망고, 치즈를 사 왔다. 음식 섭취가 가능하다는 휴게실에 들어갔는데 전원 한국인이었다. 심지어 옆 테이블은 방금 만나 합석해서 음식을 나눠먹기도 하더라.

이게 무슨 조합이냐 싶겠지만

역시 믿고 먹는 컵라면은 맛있었고, 마트에서 사 온 안주도 성공적이다. 어제 루체른, 베른에서도 태어나서 처음 보는 풍경에 감탄했는데, 앞으로 본격적으로 만날 알프스는 대체 얼마나 대단할까. 와인을 마셔서인지 내일이 기대돼서인지, 설레는 밤이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