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10. 스위스 피르스트 - 그린델발트 - 하더쿨룸
같은 방을 쓴 언니와 밤늦게까지 얘기를 나누다 잠들었었다. 아침에 언니가 준비하는 소리에 잠에서 깨니 오늘은 어디 가냐 묻더라. '피르스트 펀패키지'를 할 생각이라 하니 마침 같은 코스라고, 액티비티는 혼자 하면 재미없으니 본인이 구한 동행들과 같이 가자고 하더라. 순간 진짜 고민했지만 괜히 피해 끼치는 건 아닐까 싶어, 나는 혼자서도 잘 노니 걱정 말라고 했다. 혼자서 액티비티, 괜찮겠지?
피르스트에 올라가려면 그린델발트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곤돌라로 갈아타야 한다. 이름부터 '그린'인 그린델발트는 스위스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마을이었다. 푸른 초원 위에 듬성듬성 나 있는 통나무 집들을 보며 대리 힐링의 기운을 느껴본다. 그린델발트 구경은 이따 돌아가는 길에 마저 하는 걸로. 우선 피르스트 정상까지, 아직 갈 길이 멀다.
낯선 아저씨들과 함께 탄 곤돌라에서 무려 25분의 숨 막히는 정적을 뚫고, 정상에 무사히 도착. 날씨 운이 거의 항상 좋은 편이었는데 특히 오늘은 정점을 찍었다.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은 파랗고, 햇살은 따사롭고,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온다. 아무것도 안 하고 숨 쉬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아지는 날씨에 피르스트에 오게 되어 다행이다.
정상에는 절벽을 따라 걸을 수 있는 '피르스트 클리프 워크' 코스가 있다. 철근 몇 개에 의지하고 있는 철판 길인데, 그래도 유럽 관광지니까 안전하게 공사했겠지 싶어 믿고 걸어보기로 했다. 별 대수롭지 않게 세상을 다 가진 듯 씩씩하게 걸어보니 재미있었다.
중간쯤에서 망할 호기심이 들어 한 번 쓱 두 발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뿐인데, 갑자기 정신이 아찔해지고, 온몸이 굳어버리고, 지금 내가 밟고 서있는 바닥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떨어져 버릴 것 같은 무서움에 다시 안전한 육지를 밟으러 호다닥 가던 길을 되돌아왔다. 휴, 바닥을 보면 안 되는 거였구나.
그렇다. 사실 나는 겁이 많다. 스릴 있는 놀이기구나 액티비티를 썩 즐기지 않고 '무서운 걸 왜 굳이 돈 주고 해?'라고 생각하는 편에 가깝다. 그런데 이상하게 피르스트 정상에서부터 플라이어 (짚라인) - 마운틴바이크 - 트로티바이크를 타고 내려오는 액티비티 코스 '피르스트 펀패키지'는 꼭 하고 싶더라.
하필 클리프워크 갔다 잔뜩 쫄고 온 터라 플라이어 대기줄에서 내적 갈등이 심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됐는데 벌써 내 차례가 되어 장비를 매고 있었다. 출발대에 서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아 다리가 후들거렸다. 지금 환불해달라고 하면 혼날까 별 생각을 다했네.
결국 내 의지와 상관없이 출발! 엄청난 속도로 하강하는데 처음에는 눈 질끈 감고 소리 지르다가, 정신 차려 보니 무서워하기엔 너무 아까운 시간이었다. 눈을 떠보니 말도 안 되는 풍경이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지며, 아드레날린이 미친 듯이 샘솟는 짜릿한 기분이었다. 그 와중에 손에 핸드폰 꽉 쥐고 열심히 동영상 촬영을 했는데, 결국 내리고 확인해보니 촬영 버튼이 안 눌렸던 게 함정이지만.
다시 올라가서 한번 더 탈까 고민하다, 대신 계획에도 없던 글라이더를 타보기로. 글라이더는 거대한 새 모양의 기구에 엎드려서 타고,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코스다. 엎드려서 타는 거라 훨씬 무서울 줄 알았는데 너무 천천히 내려와서 긴장감은 확 떨어졌다. 대신 풍경은 눈에 실컷 담아뒀다. 알프스를 날아다니는 자유로운 새 한 마리가 된 듯한 기분.
다음은 마운틴바이크를 타고 내려오는 코스다. 헬멧을 골라 쓰고, 간단히 주행법 설명을 들은 후 자유롭게 달리면 된다. 조금 타 보니 금방 요령이 생기고, 자연 그대로인 돌길·흙길 위를 달리는 스릴도 제법 있었다. 이렇게 완벽한 타이밍에 음악이 빠지면 안 되지. 잠시 쉬어가는 구간에서 이 시대 최고의 청량 밴드 데이식스의 노래를 골라 빵빵하게 틀어놓고 다시 달렸다.
피르스트 추천 플레이리스트 >
DAY6 - Feeling Good, Free하게, 태양처럼, 바래, Sing Me, 쏟아진다
역시 음악의 힘이 대단하다. 마치 내가 청춘의 자유를 갈망하는 가사 속 화자에 빙의한 것처럼 어디론가 일탈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내가 이러려고 휴가를 왔지' 싶었던 순간. 여행 중 재미있고, 기쁘고, 감동받은 순간은 많았지만, 이렇게 제대로 스트레스가 풀리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평생 잊지 못할 극강의 짜릿함. 여기 진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놀이공원 아닐까.
한참 자연 속을 달리다가 점점 집, 가축 등 마을의 흔적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마운틴 바이크 코스가 끝나감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달리다가 속도를 줄여야 하니 아쉬웠다. 정신 놓고 달리다가도, 역시 일탈에 끝은 있는 법.
이렇게 예쁜 놀이터가 있는 곳에서 마운틴바이크를 반납하고 트로티바이크로 갈아탔다. 이걸 그린델발트까지 타고 내려가면 된다. 트로티바이크는 킥보드처럼 서서 타는 건데 꽤 무거워서 중심을 잡기가 쉽지 않다. 사실 몇 번 넘어지고 부딪혀서 살짝 다치기도 했지만, 재밌어서 아픈 줄도 몰랐다.
내가 나온 사진 욕심은 없는 편인데 여기서는 누가 바이크 타는 내 뒷모습을 찍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늘-산-나무-들판까지 완벽한 배경. 나 대신 누군지도 모르는, 지나가는 이의 뒷모습을 남겨둔다. 나의 뒷모습도 저렇게 신나고 자유로워 보였기를 바라며.
일탈이 끝나는 순간은 또 이렇게 금방 찾아온다. 이제 사람 사는 집들이 보이고, 차가 지나다니는 마을에 들어섰다. 분명 이런 데에 바이크 코스를 낼리는 없는데, 어디서 부터 잘못된 건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들었나 보다.
도대체 어디에 반납해야 하는지 블로그를 뒤져보고, 구글맵을 찍어서 겨우 길을 찾아냈다. 바이크가 지나가면 안 될 것 같은 좁고 가파른 지름길(?)을 지났는데, 이 뜻밖의 길에서 내가 막연히 생각했던 '그린델발트'의 전형적인 풍경을 만났다. 공기 좋고, 자연 좋고. 집과 집 사이의 거리만큼 사람들 사이에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나 여기 살면 왠지 착해질 수 있을 것 같아.
우여곡절 끝에 바이크를 반납하고 안도의 한숨과 함께 참아왔던 허기가 밀려왔다. 그린델발트 맛집을 검색할 힘도 없어 바로 옆에 보이는 레스토랑에 무작정 들어갔다. 가게 이름도 모른 채 루겐브로이 맥주 로고가 있길래 그냥 믿고 들어갔다. 가장 저렴하다는 이유로 주문한 기본 마르게리따 피자와 작은 생맥주는 가격 이상의 만족감을 줬다. 역시 몸 쓰고 먹는 음식은 꿀맛이다. 레귤러 사이즈라지만 내가 피자 한 판을 다 먹을 수 있을지 몰랐어 정말.
주변에 카페는 없어서 마트에서 파는 커피우유를 사들고 마을을 산책했다. '예쁘다'는 말 밖에 못하는 나의 어휘력이 한심할 정도로, 이 아름다움을 뭐라고 더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을 정도로, 그린델발트는 비현실적으로 예뻤다. 어렸을 때 보던 밥로스 아저씨 그림 같은 풍경 속에서 내가 지금 숨 쉬고 걸어 다니고 있으니까. 이게 현실인가 싶고.
누군가 알프스에 딱 하루만 머무를 수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피르스트-그린델발트 코스를 추천할 것 같다. 풍경을 감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온몸으로 체험하며 느껴보고, 일상에서 적립해온 스트레스까지 해소하며, 가장 만족스러운 여행을 할 수 있는 곳 아닐까. 내가 진심으로 만족했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도 한 번쯤 꼭 와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안고 그린델발트를 떠났다.
숙소에서 잠깐 쉬다가 해가 지기 전에 다시 나왔다. VIP 패스로 일몰이 아름답다는 하더쿨룸에도 올라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숙소에서 강 건너 바로 있는 하더반에서 '푸니쿨라'라는 열차를 타면 된다. 다들 일몰 시간대 맞춰서 가는지 한참 기다렸다 겨우 올라탔다.
사실 크게 기대 안 했는데 푸니쿨라 타고 올라가면서부터 살짝살짝 보이는 광경에, 하더쿨룸이 잘하면 피르스트를 위협하는 스위스 베스트 여행지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찌 이런 곳에 전망대를 설치할 생각을 했는지, 알프스 만년설을 중심으로, 그 아래에는 인터라켄 마을이, 좌우로는 튠 호수와 브리엔츠 호수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해가 지면서 만년설 봉우리가 붉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데,
그리고 조금 더 기다려 보면,
오렌지빛 봉우리에 핑크빛 하늘, 말로 다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사실 어제오늘 이틀 내내 본 알프스라 그냥 전망대에 오르는 것만으로는 큰 임팩트가 없었을 텐데, 해가 지면서 이 똑같은 풍경을 아예 다른 색으로 칠해버린다. 우리가 일몰을 보러 찾아다니는 이유 아닐까. 익히 봐왔고 잘 알던 모습에 다른 색을 입혀 더욱 기억에 남게 하기 위하여. 강렬하게 기억 속에 자리 잡은 내 인생 최고의 선셋.
남은 스위스 프랑을 다 써야 해서 coop에서 간단히 장을 봐왔다. 저녁거리와 기념품으로 사갈 스위스 초콜릿, 그리고 독일에서도 못 본 커리부어스트용 커리맛 하인즈 케첩까지. 알차게 쇼핑해 기분이 좋았다. 그럼에도 결국 몇 프랑 남겨왔지만.
오늘은 미루고 미뤄왔던 대망의 빨래를 해치워야 한다. 한 번 빨래하려면 빨래 돌리고, 건조 돌리고, 꺼내오고, 키 반납하는 등 여러 번 왔다 갔다 보통 일이 아니다. 그사이에 내 윗 침대를 쓰는 새 룸메이트가 들어왔는데 자는 것도 아니고 핸드폰 하면서 방 불은 꺼달라고 하더라. 저녁 8시인데..! 유난스러운 룸메이트 때문에 눈치 보며 서럽게 복도에서 빨래 개고, 짐 정리하고 한 밤 중 생쇼를 했다.
혹여나 제때 못 일어날까 긴장하며 잠을 청했다. 내일은 무려 새벽 6시 기차를 타기 위해 5시에는 일어나 준비해야 한다. 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