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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흐를 찾아서, 아를

Day12. 프랑스 마르세유 - 아를

by 이리터

푹 자고 일어난 상쾌한 아침. 커튼을 힘차게 걷었는데, 맙소사. 분명 어제 햇살이 쏟아지던 창밖에는 추적추적 굵은 빗줄기가 내리고 있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안 돌아가서 우선 당 충전부터. 어제 사 온 까눌레와 이름 모를 머랭 가득한 디저트를 아침으로 먹어본다.

참 예뻤는데 다 망가뜨린 내가 미안해

철저하게 계획대로 여행하는 편이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애초에 비워뒀었다. 비올 걸 예상하고 그런 건 아니었고, 선택지는 많은데 걔 중에 딱히 엄청 꽂힌 건 없어서 그랬을 거다. 우선 30분 거리인 아를은 무조건 갈 거고, 시간이 남을 텐데 그냥 아비뇽에 있을지, 엑상프로방스를 가볼지, 아니면 마르세유를 가볼지가 고민이었다.


사실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은 마르세유. 대도시가 살짝 그리운 타이밍이라 프랑스 제2의 도시는 어떤지 궁금했고, 무엇보다 내가 항구도시 특유의 느낌을 워낙 좋아한다. 그럼 대체 왜 망설이냐? 프랑스인들조차 잘 안 갈 정도라며 하도 치안 안 좋다고 겁 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게다가 오늘 비도 오는데, 더 무서울 거 아니야. 혼자인데 위험하지.

탈 아비뇽

그런데 엥? 정신 차리고 보니 마르세유행 기차에 올라타 있어요. 역시 사람은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아야 한다. 밤늦게까지 있을 거도 아니고 정신 똑바로 차리면 되겠지. 다행히 빗줄기는 조금 그쳤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마르세유의 첫인상. 기차역에서 나오자마자 저 멀리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성당'이 보였다. 그리고 그 사이로 낮은 건물들이 빽빽한 광경은 꽤나 이국적이었다. 가본 적 없지만 살짝 중동 지역 느낌도 나는 것 같고. 아무튼 내가 경험해본 적 없는 새로운 세계의 도시임은 확실하다. 쫄지 말고 탐험하자.

Gare de Marseille-Saint-Charles

계획을 세우고 오지는 않았기 때문에 어디로 갈지 고민하다가, 우선 지도상으로 개선문이 가까워 보이길래 무작정 걸어봤는데. 그냥 안 봤어도 좋았을 것 같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쪽 동네가 마르세유에서 유일하게 무섭다고 위협을 느낀 곳이다. 사진상으로는 그냥 평범한 골목길 같아 보이지만 뭔가 희한한 냄새가 나고, 거리 전체에 여자도 없고, 혼자 다니는 사람도 없다. 나처럼 혼자 다니는 여자는 신기해서 다들 쳐다볼 정도. 대체 뭐하는 동네길래 허름한 검은 옷을 입고 무리 지어 다니는 아저씨들 뿐일까.

피할 수 있으면 피하십시오

사람들과 절대 눈을 마주치지 않고, 겁나 센 표정을 장착하고, 빠른 걸음으로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그래도 개선문 봤다고 이 상황에서도 사진을 찍은 나, 무사해서 다행이다. 괜한 모험심을 부렸나. 그래도 항구에 가면 나 같은 관광객들이 많겠지 싶어 발걸음을 돌렸다.

저는 눈 깔고 걸었어요

그래 이거지! 내가 딱 마르세유에 기대했던 항구도시 느낌. 배는 바다로 떠날 준비를 하고, 사람들은 분주하고, 갈매기떼가 날아다는 곳. 생동감 넘치는 현장이다. 보기보다 꽤 규모가 있는 항구라, 어느 편에 서서 어디를 향하느냐에 따라 다 다른 풍경이 보인다. 끝에서 반대편 끝까지 항구에서만 1시간은 족히 걸었을 테다.

Vieux Port de Marseille

그리고 구름이 조금만 더 갰다면 훨씬 멋있었을 뷰. 아까 기차역에서 봤던 노트르담 대성당이 얼마나 높이 있으면 여기서도 보인다. 마르세유의 가장 확실한 랜드마크. 시간이 없어 저기까진 못 올라갈 것 같으니 이렇게라도 봐 둬야지.

꼭 뷰포인트 올라오면 급 흐려지지

항구에 왔으니 오랜만에 해산물을 먹어야겠다. 그냥 뭐 하는 곳인가 메뉴 보다가 호객행위에 끌려 들어온 곳.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메인 요리인 플라로는 가장 무난해 보이는 연어 스테이크, 그리고 앙트레로는 한 번쯤 먹어보고 싶었던 마르세유 전통음식, 생선 수프라는 '부야베스'가 있길래 주문했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생선 수프가 아닌 웬 튀김 접시가 나왔고, 이게 부야베스 맞단다. 혼란하다 혼란해. 내가 모르고 시킨 거니 어쩔 수 없이 먹는데 딱 빙어튀김 맛이다. 마르세유에서 고향의 맛을 느끼다니, 초장이 땡겼다. 엄청 맛있지도 엄청 나쁘지도 않았던 쏘쏘한 점심. 노트르담이 보이는 뷰에 의의를.

L'Hippocampe Vieux Port Marseille




MuCEM, 생장 요새(Fort Saint-Jean) 쪽으로 꺾어보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세련되고 정돈되고 여유롭다. 구 항구가 사람들이 오랜 시절 가꿔온 복작복작한 삶의 터전이라면, 이곳은 아주 잘 계획된 미래의 항구도시 느낌. 나는 둘 다 좋다.

마르세유 첫인상과 180도 다른 모습

그리고 짠하고 나타난 마조르 대성당. 유럽 여행 다니다 보면 성당은 하도 많이 봐서 별 감흥 없어진다고 하는데. 애초에 종교도 없고 역사 배경 지식도 없어서 (자랑이다) 순전히 내 느낌만으로 성당을 보기 때문에, 아직 유럽 12일 차인 나는 성당이 지겹지 않다. 똑같이 생긴 성당은 하나도 없다.

Cathédrale La Major

그래도 나는 유적지나 성당보다는 길거리의 소소한 풍경 보는 게 재밌더라. 마조르 대성당 근처에서 시선 강탈당한 두 작품. 왼쪽은 아마도 마조르 대성당과 관련된 그림의 그라피티로 추정되고, 오른쪽은 갑자기 분위기 문어 괴물. 벌써 할로윈 준비를 하는 건가.

이제 슬슬 마르세유를 떠날 시간이 다가온다. 마지막으로 롱샹 궁전(Parc Longchamp)만 살짝 구경하고 가야겠다. 사진으로 보고 반했던 곳. 상상 속 신전에 있는 정원 같은 곳이었는데 실제로 보면 얼마나 예쁠까 두근두근

Parc Longchamp

...은 흐린 날씨 탓인지 스산한 기운뿐. '물의 궁전'이라면서 분수는 또 왜 이리 흙탕물 색인지. 무엇보다도 눈살이 찌푸려졌던 건 군데군데 있는 낙서. 'ridiculous'라는 글자만 서너 개는 본 것 같고 'tourist go home'도 압권. 관광객 싫어할 수는 있지만 역사 깊은 멋진 궁전에 왜 낙서하니.

ridiculous

그래, 가라니까 가야지. 다시 마르세유 기차역으로 돌아왔을 때쯤엔 밀린 빨래를 내다 걸 정도로 흐린 구름이 걷히고 파란 하늘이 보였다. 분명 흐리고 어둑어둑한 날씨의 영향이 컸을 테다. 마르세유 하도 치안 안 좋다고 해서 괜히 싸하긴 했지만. 역시 사람 사는 동네였고, 확실히 다른 도시에서 보지 못한 모습들을 봤다는 점에서 오길 잘했다 싶었다.

다행히 안 다치고, 아무것도 안 털리고 떠납니다. 안녕, 마르세유!

잘 있어라!




아를 기차역에 내리자마자 기분 좋은 바람이 이끄는 대로 따라 걸었다. 그 끝엔 고흐의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의 배경인 론강이 흐르고 있었다. 아를에 온 이유는 오로지 빈센트 반 고흐 때문이었다. 작품의 배경이 된 곳을 실제로 보고 싶었고, 그러면 그가 어떤 생각으로 그림을 그렸을지 짐작이라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아직 대낮이라 별은 못 볼 줄 알았는데, 햇빛이 강물에 부서지는 게 꼭 고흐가 봤을 법한 별들처럼 빛나고 있었다.

트윙클 어쩌나

아를의 길거리 구석구석이 너무 그림같이 생겨서 흠칫 놀랐다. 오래된 건물 벽이나 빛바랜 파스텔톤 창문이 실제 건물 같지 않고 꼭 널빤지 따위일 것만 같아 보였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세트장 같달까. 고흐의 그림 속을 걷는 영화의 세트장. 고흐가 생각보다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구나.

아를의 흔한 길거리 풍경

마침 엽서를 파는 곳을 발견했다. 실제 아를의 장소를 배경으로 그린 작품 세 장을 골랐다. 1유로도 안 되는 가격에 훌륭한 소품을 득템했다. 그와 나의 연결고리.

과거 고흐가 머무를 당시 정신병원이었다는 레스빠스 반 고흐 (L'espace Van Gogh). 지금은 그를 위한 헌정 문화 공간이라고 한다. 그림처럼 화려한 꽃이 피어있는 정원은 아니었지만, 그림처럼 선명한 샛노란색임에는 분명했다.

L'espace Van Gogh

고흐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도 내가 좋아하는 노란색을 즐겨 썼다는 점이다. 고흐의 노란색에는 그의 불안정한 정신상태가 반영된 것이고, 실제로는 다른 색이어도 환각 때문에 그의 눈에는 노란색으로 비쳤을 가능성도 있다고 어디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아를에는 얼마나 노란빛이 많을까, 혹여나 덜 미친(?) 내 눈에는 안 보이진 않을까 걱정도 했지만. 작품의 실제 배경을 내 두 눈으로 확인했을 때, 참으로 채도 높은 순도 100% 노랑이어서 다행이었다.

Le Jardin de la Maison de Santé a Arles, 1889

이어서 또 다른 노랑 플레이스. 좀 더 유명한 작품 <밤의 카페테라스>의 실제 배경 Le Café Van Gogh, 일명 '반 고흐 카페'다. 밤이 되면 좀 화려해지려나. 사람도 없고 볼품없었다. 여행 준비하며 찾아보기로는 정말 불친절하고 맛도 없다고, 이 카페가 보이는 맞은편 카페를 갈 것을 추천한다고 한다. 세계 최고의 화가가 준 복을 발로 차 버리다니 안타깝다.

Le Café Van Gogh

한참 동안 주위를 맴돌며 고흐가 이쯤에 서서 봤을까, 이 각도가 맞을까 쓸데없는 상상 대입만.

The Cafe Terrace on the Place du Forum, Arles, at Night, 1888

(유감이지만) 고흐에 큰 관심이 없다면 다른 볼거리로는 원형극장과 고대 극장도 있다. 직접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2000년이 넘는 건축물이라고 생각하니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감히 상상도 못 할 그 긴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이곳에 담겼던 걸까. 많이 훼손되긴 했지만 지금도 간혹 연극이나 콘서트 같은 공연을 한다고 하니 3000년, 4000년, 그 이상을 기대해봐도 되는 걸까.




이제 저녁 6시가 다 되어가고 슬슬 해가 지려고 한다. 론강에 본격적으로 노을이 지면 왠지 엄청난 풍경이 펼쳐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다시 강변으로 걸어 나왔다. 마침 강에는 배를 빌려 한참을 유유자적 타고 노는 한 무리가 있었다. 둑에 걸터앉아 그 배가 떠다니는 걸 보면서 멍 때리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구경은 다 했고, 배 고프지만 일요일이라 연 식당은 없고, 이미 기차는 하나 놓쳤고. 급할 게 없었다.

그렇게 한 40분 정도 지났나. 고개를 들어보니,

2018년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화려한 도시나 무성한 자연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강에 노을이 비치고 그 위에 배 한 척이 떠있을 뿐인데, 그 잔잔함이 주는 울림이 깊었다. 묘하게 물결 표면이 고흐 특유의 일렁이는 붓터치와 오버랩되어 보였다. 아직 밤하늘은 아니라 별은 없었지만 별보다 빛나는 석양이 더 좋았다.

Nuit étoilée sur le Rhône, 1888

마음 같아서는 그 자리에 눌러앉아 밤하늘까지 보고 싶었지만 너무 깜깜한 어둠이 들이닥치면 지금 이 감상이 다 깨버릴까 봐. 아쉽지만 이쯤에서 아비뇽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러 갔다. 돌아가는 길 내내 이상하게 가슴이 설렜다. 일렁이는 물결과 노을의 여운에 배고픔도 잊고 그렇게 잠에 들었다.

안녕, 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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