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11. 프랑스 아비뇽
얼마나 긴장했으면 새벽 5시에 울린 진동 1초 만에 벌떡 잠에서 깼다. 오늘은 새벽 6시 인터라켄을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베른, 제네바, 리옹을 거쳐 오후 12시 38분에 프랑스 아비뇽에 도착하는 대이동의 날이다. 미친 일정이지만 내가 가고 싶고 하고 싶은 대로 하기 위한 최선의 루트였다. 나만의 여행이니 충분히 감수할 수 있고.
암흑과 적막 속에서 후레시 라이트 하나에 의존해 짐을 챙기고 무사히 기차를 탔다. 베른에 도착할 때쯤 서서히 해가 뜨는 걸 봤고, 제네바에서는 환승시간이 촉박한데 잠깐이라도 새 도시를 구경해보고 싶어 굳이 밖에 나갔다 다시 들어왔다. 한 10초? 며칠만 더 주어졌더라면 꼭 한번 와보고 싶었던 빛의 도시 리옹에서는 'Lyon'이라는 기차 표지판만 보고도 설렜다. 이름이 멋있어.
새벽이 대낮이 되고, 스위스 산속에서 프랑스 들판을 지난 6시간 38분의 시간 동안 사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졸음이 밀려왔지만 혹시나 내릴 역을 놓칠까 봐, 누가 내 짐을 가져갈까 봐, 표 검사를 할까 봐 허벅지를 찔러가며 졸음을 참았다.
긴 여정 끝에 드디어 아비뇽에 도착했다. 어서 호텔에 들어가서 잠시라도 눈을 부치고 싶은 마음에 미친 듯이 캐리어를 끌고 전력 질주했다. 그런데 너무 이른 시각이었나. 아예 호텔 입구가 잠겨있는 거다. 벨을 눌러봐도, 문을 두들겨봐도 아무 대답이 없다. 설마 호텔 망한 건 아니겠지, 나 오늘 잘 곳 없는 건 아니겠지.. 별의별 생각이 들던 순간.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 새벽부터 내내 긴장했던 게 한 순간에 허무하게 풀려버리고, 갑자기 바뀐 언어와 화폐단위, 기온에 적응도 안 되고. 어딘가 나사 하나 풀린 것처럼 낯선 골목길에 주저앉았다.
이럴 땐 본능을 따라야 한다. 인간적으로 너무 배고팠다. 그래, 우선 뭐라도 좀 먹고 생각해보자 하고 트립어드바이저에서 근처 맛집을 검색해봤다. 다행히 도보 2분 거리에 괜찮은 식당이 있다.
지도를 따라 코너를 돈 순간, 아 이래서 남프랑스 남프랑스 하는구나! 파란 하늘과 거대한 나무 그늘, 성당에서 들려오는 종소리. 그 아래 야외 테이블에 사람들이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에 와인 한잔씩 하고 있는 풍경이 펼쳐졌다. 다들 행복해 보여서 내 마음도 안정되었다. 따스한 날씨에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오며 공기가 참 달게 느껴지더라.
그 틈에 자리 잡고 앉아 주문을 했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메인 요리에 디저트, 와인 한 잔까지 점심 코스요리를 주문했는데 18유로쯤 했던 것 같다. 가격도 착한데 맛도 플레이팅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역시 미식의 나라 프랑스답다. 스위스에서 비싸서 잘 못 먹고 다니던 설움이 싹 가셨다. 고기도, 크림 브륄레도 싹싹 비우고 왔다. 빈 접시를 치우니 테이블에 청명한 하늘이 비쳐 보였다. 아, 살 것 같았다.
밥 먹고 다시 가보니 다행히 호텔은 열었고, 일찍 체크인할 수 있도록 정리해주셨다. 오늘과 내일 두 밤을 지내게 될 아늑한 1인실. 시설은 조금 낡았지만 민트색과 노란색의 조합이 상큼해서 기분이 좋아진다.
큰 거울로 보니 더 심각해 보였다. 며칠 전부터 얼굴과 목, 팔, 손가락 군데군데 의문의 벌레에 물린 흔적이 생겨났다. 가끔씩 미칠 듯이 가렵더니 자국이 점점 커져갔다. 이게 그 유명한 베드 버그인가 싶었지만 검색해보니 내 상처와는 모양이 많이 달라 더욱 미스터리. 영 찝찝했다. 말이 안 통하는 나라지만 약국에 한번 가봐야겠다.
다행히 영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을 만나 대충 증상을 설명하니 연고를 하나 주더라. 여행 중 몸에 이상이 있을 땐 쫄지 말고 무조건 약국에 가볼 것. 마음이 한결 편해졌으니 본격적으로 아비뇽 관광을 시작해볼까.
아비뇽에서 가장 기대했던 곳은 역사 유적이나 유명한 관광지가 아닌 미술관, 그것도 중세도시 아비뇽에서 다소 뜬금없는 현대미술관이었다. Yves Lambert라는 한 개인의 아트 컬렉션을 전시해둔 'Collection Lambert Avignon'.
기대 이상이었다. 현대미술 중에서도 빛·색·메시지가 강렬한 작품을 좋아하는 편인데, 내 취향인 작품들이 끝없이 나와서 신이 났다. 이번 여행에서 가본 그 어느 유명한 미술관, 박물관보다도 집중해서 전시를 감상한 곳. 지난 며칠 내내 자연만 보다가, 오랜만에 문화생활 좀 하니 다시 현대인으로 돌아온 기분에 안도감이 들기도 했고.
오자마자 트렌디함의 끝을 봐서 잠시 잊었을 수도 있는데, 사실 아비뇽은 중세 시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걸로 유명한 도시다. 14세기 교황청의 거처였고, 여전히 구시가지 전체가 잘 보존된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다. 역사도 종교도 잘 모르지만 아비뇽 골목을 걸으며 과거의 어느 한 페이지로 시간여행을 와있는 듯한 느낌은 받았다.
날 좋은 주말 오후라 그런지 다들 laid-back 되어 보였다. 현대인에게서는 결코 느껴질 수 없는 여유라, 이곳이 더욱 과거의 어느 시점에 머물러있는 것 같아 보였을지도.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소도시의 매력에 조금씩 적응해가면서도, 너무 피곤해서 졸음과 싸우느라 혼났다. 거의 반수면상태로 좀비처럼 걸어 다녔지.
아비뇽에서 인상 깊었던 점 중 하나. 놀랍게도 어디를 가든, 어디를 보든 항상 그림이 있다. 역시 프로방스의 위엄인가. 하긴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산다면 없던 예술적 영감도 꿈틀거릴 것만 같다. 그런데 꼭 이렇게 각 잡고 진열해둔 그림뿐만 아니라,
오래된 건물 창문 곳곳에 그려둔 그림들이 재미있었다. 옛날에 이 집에 살던 사람들이 계속 살고 있는 것 마냥, 2D의 옛날 사람과 4D의 요즘 사람이 함께 사는 마을 같았다. 처음에 우연히 발견하고 신기해서 '숨은 그림 찾기'처럼 창문만 쳐다보며 계속 찾아다녔네.
사람들이 줄지어 가는 쪽으로 따라가 보니 골목 사이로 무언가 엄청난 게 보이기 시작한다. 드디어 아비뇽 관광의 하이라이트, 교황청과 대성당에 거의 다 왔나 보다.
카메라에 다 담기도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건물 앞에 서서 한동안 멍하니 쳐다봤다. 로마에 가본 적은 없지만 아비뇽 교황청의 스케일만으로도 그 시대 사람들에게 종교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어느 정도 짐작 가능했다. 나는 종교가 없는데 왜 무슨 기운 같은 게 느껴지는 것 같고 그러냐.
건축물에서 잠시 줌 아웃해서 시야를 넓혀보니 교황청, 대성당 앞 공터에서 사람들이 놀고 있더라. 그것도 아주 역동적이게, 한쪽에선 자전거 묘기가 또 한쪽에선 스트릿댄스가 한창이었다. 아비뇽의 청춘들이 토요일 오후를 즐기는 방법인가 보다. 성당과 힙합 뮤직, 댄스와 묘기라니.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그렇게 잘 어울려 보일 수가 없었던 순간.
대성당 옆 아비뇽에서 가장 높은 언덕, 로셰 데 돔 공원에 오르면 아비뇽 시내와 교외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고 한다. 저 멀리 론강 건너편 '생 탕드레 요새'도 보이고,
'생 베네제교'도 보인다. 사실 아비뇽은 사전 조사를 많이 하고 오지는 않았기에, 이렇게 반이 뚝 끊겨버린 다리가 있는 줄 모르고 봐서 더욱 놀랐다. 무슨 사연일지 궁금했으나 그 자리에서 바로 검색하지는 않았다. 전쟁 때 폭격을 맞았을까, 왕실이나 교황청의 쇠락으로 미처 완공을 못한 걸까, 별의별 상상의 나래를 다 펼쳐봤다. 어쩐지 슬프고 외로워 보이는 다리였다. 건너기 위해 시작했지만 건널 수 없는, 만나기 위해 다가갔지만 만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 그래서 결심했다. 저 다리 위를 걸어봐야겠다고.
다리 위에 올라가 보려면 입장권을 구매해야 했다. 매표소 직원이 어디서 왔냐기에 한국에서 왔다니까 대뜸 서울에서 다음 달에 블랙핑크 콘서트 하는데 가냐고 묻더라. 이렇게 구체적으로 훅 들어오는 K팝 팬은 처음이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다리 자체는 정말 이게 끝이다. 생각보다 시시했지만 마침 슬슬 저물어가는 햇빛이 강물에 부서지는 게 압권이었다. 눈이 부셔서 눈을 잘 못 뜨겠기도 하고, 진짜 너무 졸려서 힘들기도 했고, 햇살과 강바람을 느끼며 가만히 서서 눈 감고 조용히 노래 듣다 왔다. 아련 폭발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뚝 끊긴 쪽까지는 무서워서 못 가본 거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다리 반쪽은 홍수에 떠내려 간 거라고..
걷다 보니 사람들 북적이는 번화가가 나왔다. 한 번쯤은 들어본 명품 브랜드부터 전위적인 디스플레이로 시선을 사로잡는 각종 매장이 쭉 줄지어 있었다. 여기 아비뇽의 패션 디스트릭트 같은 데가 아닐까 나 혼자 추측하며, 괜히 추레한 내 몰골이 신경 쓰였다.
지나가다 본 어느 빵집에 줄을 엄청 길게 섰길래 괜히 나도 서봤다. 동네 사람들도 믿고 먹는 디저트 뭐 그런 건가? 내일 아침거리로 미리 사가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이것저것 주문했다. 직원이 영어를 못해서 나는 한국말로 아는 디저트 이름을 최대한 불어스럽게 말해보는 별 오그라드는 짓을 다 했다. 까..까눌레? 머랭,, 머뤵~?
아비뇽에 도착한 순간부터 당장 뻗고 싶을 정도로 피곤했는데 이젠 정말 몸에 한계가 왔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 일정을 갖는 건 무리다. 주말 저녁의 소도시, 웬만한 가게들은 해가 지기도 전에 문을 다 닫더라. 급한 대로 까르푸 마감 10분 전에 들어가서 물과 와인을 사고, 맥도날드에서 이것저것 사서 양손 무겁게 숙소로 돌아갔다. 이렇게 맛있는 게 많은 나라에서 맥도날드라니.
깨끗이 샤워부터 하고, 낮에 사 온 연고도 바르고 조촐하게 저녁상을 세팅해봤다. 처음 들어본 메뉴라 프랑스 전용 메뉴인가 싶어서 사본 버거와, 나름 몸 생각한다고 샐러드, 그리고 프랑스니까 와인. 뭐 맛있지는 않았지만 혼자여서 편안했던 식사였다.
그리고 그날 밤, 어떻게 잠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마 알아듣지 못하는 TV 소리를 자장가 삼아 기절했을 테다. 내내 졸린 채로 구경해서 그런지, 잠결에 몽롱한 도시로 기억될 아비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