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9. 스위스 융프라우 - 뮈렌 - 인터라켄
알림도 안 맞춰놓고 오랜만에 꿀잠을 잤다. 여유롭게 준비를 마치고 조식 뷔페를 먹으러 1층으로 내려갔다. 이 숙소를 찾는 아시안 관광객이 많은지 조식에 밥과 미소 된장국도 준비되어 있다.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맛이었지만. 산에 올라가면 언제 끼니를 챙겨 먹을 수 있을지 몰라 전투적으로 먹어뒀다.
그때 옆 테이블에 앉은 한국인 커플의 대화가 들려왔다. "너 그거 봤어?" 한 연예인의 사생활에 대한 무시무시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우연히 듣고 너무 놀라서 여행 중 처음으로 포털 연예 기사를 찾아보다가 이내 현타가 와서 바로 껐다. 한국에 있는 나에겐 중요한 일이었겠지만, 지금의 나는 이런 이슈는 굳이 몰라도 되는 여행자다. 사건·사고·가십의 청정 구역으로 피신 나와있는 이 자유를 누리자.
이제 진짜 청정 구역으로 올라간다. 한국에서 미리 예약해온 VIP 패스를 발권하고, 알프스 최정상인 융프라우요흐부터 정복할 계획이다. 청자켓 안에 후리스와 경량 패딩까지 껴입고 완전 무장했다. 이 두꺼운 몸으로 기차를 한참 타고 올라가야 한단다. 라우터브룬넨, 벵엔, 클라이네 샤이텍에서 무려 세 번이나 갈아타야 한다. 벌써부터 살짝 지친 듯한 느낌.
본격적으로 산속에 들어오니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높은 산에 기찻길을 어떻게 놓았을까, 어떻게 지치지도 않고 쑥쑥 잘도 올라갈까. 자연도 위대하지만, 인간도 참 대단하다.
융프라우를 오르는 열차는 다른 기차에 비해 창이 크게 나있다. 덕분에 창밖으로 비치는 풍경을 감상하느라, 긴 시간이 지루하지는 않았다. 창문이라는 프레임 안을 들여다보니 흡사 영화 같기도 했다. 엄청난 풍경이 시시각각 다이내믹하게 변하는 대자연 블록버스터.
자, 이제 드디어 클라이네 샤이텍에서 융프라우요흐로 향하는 마지막 기차가 왔다. 올라오는 길도 이렇게 멋있었는데 대체 정상에서 보는 경치는 어느 정도란 말인가.
부푼 기대와는 달리 융프라우요흐에 오르자마자 몸에 이상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우선 추워도 너무 추웠다. 갑자기 들이 닥친 영하 날씨에 있는 옷을 다 껴입었지만 제대로 된 방한복이 아니라 역부족이었다.
더 심각했던 건 산소 부족으로 숨을 쉬기 어려웠다는 것. 나는 아직 젊고 건강하다 생각해서 고산병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거다.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호흡이 부족하니 엄청 무거운 무언가가 머리를 꾸욱 누르는 듯이 아파왔다. 설상가상으로 물 챙겨 오는 걸 깜빡해서 급하게 전망대 매점에서 샀다. 생수 한 병에 우리나라 돈으로 7천 원. 물 마시고 정신을 차렸다.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그냥 돌아갈 순 없지.
사람의 흔적이 닿지 않은 새하얀 흰 눈으로 사방이 뒤덮인 세계. 어디선가 엘사가 옷자락을 휘날리며 '레릿고'를 부르고 있을 법한 신비로움이다. 확실히 처음 보는 '색다른' 풍경이긴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융프라우는 나에게 엄청난 감흥을 주지는 못했다. 내 컨디션 탓도 있었겠지만 그 고생을 해서 올라왔는데 '이게 다야?' 싶었을 정도. 눈으로 덮인 산봉우리는 멀리서 어렴풋한 배경으로 볼 때 더 신비로운 것 같다. 막상 내가 그 위에 올라와있으니 이게 뭔지, 여기가 어디인지 잘 모르겠더라.
그렇게 헛헛한 마음이 들던 중 빨간 스위스 국기를 발견했다. 여기 포토스팟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그렇게 줄 서서 기다리는 거구나.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상에 올랐다는 인증샷이 중요할까. 굳이 애써 정상에 올라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한국에서 끊어온 VIP 패스에는 융프라우요흐 매점에서 먹을 수 있는 신라면 쿠폰이 포함되어 있다. 컵라면을 여기서 보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구석에서 관광객 수십 명이 쭈그려 앉아 컵라면을 먹는 광경은 짠했지만, 컵라면을 받아 든 순간 남의 시선, 체면 그런 게 상관 없어졌다. 순식간에 먹어 치웠고, 미련하게도 국물 버릴 곳을 못 찾아 한 방울도 안 남기고 쭉 들이켰다. 진심 살 것 같았다.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노곤노곤해져 잠깐 졸았더니 컨디션이 한결 나아졌다. 표 검사하는 역무원 때문에 깼는데 이렇게 서윗-한 선물을 주다니. 받자마자 입안에 넣고 달콤함을 즐겼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창 밖으로 비치는 풍경이 '그림 같다'는 말 밖에 안 나온다. 올라가는 길에는 배경이 되는 자연에 놀랐지만, 내려가는 길에는 그 안에서 움직이는 주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 건너편에 올라가는 기차는 어디로 향하는 걸까.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손 흔들며 인사해주는 저 하이커들은 어떤 기분일까.
내려오는 코스로 많이들 들리는 그린델발트 쪽에는 내일 가볼 예정이라, 오늘은 반대편에 있는 예쁜 마을 '뮈렌'에 들렀다 가기로 했다. 뮈렌 가는 길이 이렇게 멀고 험할 줄이야. 고소공포증이 있다면 못 탔을 것 같은 곤돌라를 타고, 벼랑 끝을 아슬아슬하게 달리는 두 칸 짜리 작은 열차를 타고 난 후에야 도착했다. 물론 풍경 덕에 절대 지루할 틈은 없다. 그냥 내가 지친 탓이지.
반나절 동안 대자연 속에 있다가 사람 사는 흔적을 보니 괜히 반가웠다. 지도도 안 보고, 계획도 없이 그냥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위험, 경계 따위와는 거리가 먼 곳. 무해한 첫인상에 무장해제되어버렸다.
좀 걷다 보니 그곳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 유명한 포토스팟 '뮈렌 통나무'. 누가 그 나무를 베고 밑동만 남겨놓을 생각을 했는지, 그 위에 올라 사진을 찍으면 배경과 구도가 완벽한 최고의 인증샷이 나온단다. 내가 나온 사진이 부끄러워 웬만해서는 남에게 사진을 부탁하지 않는 편인데, 마침 앞에 한국인 커플이 있길래 사진을 찍어주고, 나도 한 장 부탁해봤다.
자석, 엽서, 열쇠고리 같은 여행 기념품에는 관심이 없다. 유일하게 지갑을 여는 기념품은 평소 수집하는 핀뱃지다. 뮈렌에서 작은 사진/기념품 가게를 구경하다 마음에 쏙 드는 하이디 뱃지를 발견했다. 9일 차에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앞으로 여행하는 도시마다 핀뱃지를 하나씩 구입하면 나중에 여행을 추억하기에 참 좋은 기념품이 되겠다 싶었다. 하이디를 사서 바로 에코백에 달아줬다. 너는 오늘부터 내 여행 메이트다.
하이디와 동행하고 부터 주위 풍경이 하이디 동화의 실제 배경 같아 보이더라. 하이디가 실제로 살았더라면 이렇게 생긴 통나무 집에 살며 잔디 언덕을 뒹굴다 동물들을 돌보았겠지. 한 치의 걱정도 불만도 없을 것 같은 삶. 그런 하이디가 부러워졌다.
뮈렌은 정말 작은 마을인데도 불구하고 각종 운동 시설이 꽤 잘 갖춰져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아이들이 무리 지어 막 뛰어가길래 보니 꽤 그럴듯한 풋살장이 있었다. 거기서 큰 아이, 작은 아이, 남자 아이, 여자 아이 할 것 없이 함께 즐겁게 공을 차고 놀더라. 참으로 건강한 삶이다.
이렇게나 한적한 마을에서 좀 더 여유를 부리고 싶었으나, 다시 그 열차 타고, 곤돌라 타고, 또 기차 타고 갈 생각을 하니 해 지기 전에 내려가는 게 좋겠다 싶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뮈렌 덕분에 한결 정화된 기분을 가득 안고 간다.
무사히 인터라켄으로 내려왔지만 여전히 고산병의 여파로 힘이 없었다. 오늘 저녁에 컵라면이나 빵 따위를 먹을 수는 없었다. 필히 '몸보신'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여행 중 만난 여자 대학생 친구들과 함께 장 봐서 삼겹살을 구워 먹기로 했다. 스위스 식당 물가는 비싸지만 마트 물가는 고기나 야채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저렴한 편이다. coop에서 질 좋은 돼지고기 삼겹살 한 팩과 곁들일 소시지, 버섯, 쌈장 등을 사 왔다.
요리할 곳은 바로 '스위스의 대명리조트'라 불리는 백패커스 호스텔. 대명리조트 말만 들었지만 정말 그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키친에 들어가자마자 자욱한 연기에 삼겹살 냄새가 짙게 배어있고, 정겨운 한국말이 들려왔다. 아니 한국말밖에 안 들렸다. 딱 대학교 MT촌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하나 다른 게 있다면 소주병 대신 와인병, 맥주캔이 나뒹군다는 것. 치열한 자리 경쟁, 프라이팬 경쟁, 접시 경쟁 끝에 드디어 그렇게 간절히 바라던 삼겹살느님을 영접하게 됐다.
단언컨대 인생 삼겹살이다. 같이 먹은 친구들도 눈물 날 것 같다며 유난을 떨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오늘 하루 몸이 고생한 걸 다 보상받는 듯한 최고의 만찬. 여행하면서 한국인 많은 데 싫어하고, 최대한 로컬처럼 여행하고자 했으나 오늘 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다 무너졌다. 역시 한국인은 산에 올라가선 컵라면, 내려와서는 삼겹살이지. 그래야 힘이 나지. 융프라우 겨울왕국의 엘사도, 뮈렌의 하이디도, 이 순간만큼은 안 부럽던 나는야 인터라켄의 코리안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