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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스의 10월은 아직 한여름

Day13. 프랑스 니스

by 이리터

나름 정들었던(?) 아비뇽을 떠나 니스로 이동하는 날. 아비뇽 TGV역은 작고 오래된 중앙역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스케일도 웅장하고 세련됐다. 기차 안에서 아침으로 먹을 빵과 커피를 샀다. 운 좋게 미리 예약해둔 1등석에 타게 됐다. 테제베도 처음, 1등석도 처음이라 촌놈처럼 두리번두리번 거리면서 속으로 '너무 좋다' 백번 외쳤다. 좌석도 편하고 이게 기차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승차감도 만족스러웠다. 유일한 단점은 열차가 너무 빨라서 이제 좀 적응하니 다 왔다고.. 내리라고..

IMG_7923.jpg 무슨 맛이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니스 중앙역에는 유독 사람이 많았다. 한국인의 눈으로 백인들의 국적을 알아보기란 쉽지 않지만, 왠지 다들 나처럼 타지에서 온 사람들인 것 같았다. 다들 큰 배낭과 캐리어에 설렘을 담아온 게 보였다. 기차 타고 니스라니, 우리가 제주도 휴가 가는 느낌이려나.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휴양지에 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IMG_7957.jpg Gare de Nice-Ville

중앙역 바로 앞에 있는 호스텔에 체크인하고, 방 안 창문 커튼을 확 걷었다. 오늘 아침 아비뇽에서는 비가 스멀스멀 내렸는데 니스로 내려오니 이렇게 맑고 청명할 수가 없다. 참 다행이다. 30일 여행 중에 가장 제발 비가 오지 않기를 바랐던 니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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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숨을 고르고 니스를 구경하기 위해 시내로 향했다. 숙소에서 마세나 광장까지는 천천히 걸어서 20분 정도면 갔던 것 같다. 가는 길에 하늘 구경, 건물 구경, 상점 구경, 사람 구경, 구경할 게 참 많았다.

IMG_7976.jpg 배고파요..

이 좋은 햇살 아래 야외 테이블에서 늦은 점심식사를 즐기는 사람들을 보니 미친 듯이 배가 고파왔다. 근데 오늘따라 피자, 파스타, 이런 게 정말 안 땡겼다. 아시안 푸드가 먹고 싶어 한참을 돌아다니며 헤매다 겨우 찾아낸 중국 음식점. 볶음밥과 오렌지 치킨, 미국에서 먹던 판다 익스프레스 생각나는 맛. 길거리에 앉아서 허겁지겁 먹는데 이게 뭐라고 왜 이렇게 맛있냐. 힘이 나더라.

IMG_8016.jpg 배 터지게 먹고도 반이나 남았다

배도 든든히 채웠고 본격적으로 니스를 여행해볼까. 제일 먼저 눈에 띄었던 건 형형색색 건물의 외관이었다. 주로 빨강, 주황, 노랑, 핑크 등 따뜻한 계열의 색 건물이 많아 눈이 즐거웠다. 세상에 이렇게나 다양한 색깔이 있는데 왜 내 일상에서 만나는 건물들은 다 똑같은 회색인 걸까.

IMG_8010.jpg 어떻게 저런 색 칠할 생각을 했지

특히 마세나 광장은 여기가 장난감 인형 세트장인가, 레고인가, 에뛰드 하우스인가 싶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색감이었다. 사진이 실물을 못 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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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ce Massena

광장 옆에 있는 분수 공원. 카메라가 젖을까 봐 먼발치서 멈칫하다가 아예 가방에 넣고 분수 가까이 다가갔다. 사이다에 얼음 띄워 벌컥 마시는 듯한 청량감. 시원해서 좋았다. 아이들이 분수에 뛰어들며 까르르 거리는 건 만국 공통인가 보다.

IMG_8030.jpg Promenade du Paillon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드디어 대망의 니스 해변. 저 멀리 파란색 수평선이 보일락 말락 할 때 괜히 떨리더라.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마주한 바다는 생각보다 짙은 파란색이었고, 해변과 맞닿은 부분은 청량한 캔디바 색이었다. 어린 시절 문방구에서 팔던 불량식품 페인트 사탕 색 조합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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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유럽에서 해변은 처음이다. 사실 바다만 보면 엄청날 건 없는 이곳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건 쪼르륵 놓인 파란색 의자라고 본다. 꼭 선베드나 돗자리가 없어도, 지나가던 사람들도 부담 없이 앉아 잠깐이나마 비치 라이프를 즐길 수 있는 장치다. 나 같은 바쁜 여행객도 간접적으로나마 여유로움을 느껴볼 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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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차림을 보면 알겠지만 10월 초인데 거의 한여름의 날씨였다. 반팔만 입고 있어도 덥다 느낄 정도로 햇빛은 강렬하게 쏟아지는데, 바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와 불쾌지수는 마이너스. 뜨거운 피부를 바람이 씻어주는 듯한 촉감이 좋았다. 신기했다. 불과 열흘 전 베를린에서 벌벌 떨며 감기 걸리고 훌쩍거리고 그랬는데.

크으으




사실 이런 데 오면 꼭 해보고 싶은 게 있었다. 버킷리스트라고 하기에는 좀 거창하고, 늘 상상만 하고 실천은 못했던 일.


멋진 풍경을 볼 때면 바퀴 위에 올라타서 감상하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걸으면서 볼 때 보다 좀 더 빠르고 스무스하게 흘러가는 뷰를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람을 가르는 기분도 너무 좋고. 가벼운 여행을 갈 때 늘 작은 페니 보드를 챙겨 가볼까 싶었지만 용기가 안 났는데, 마침 여기 니스에서 렌털 서비스를 찾았다.

IMG_8284 2.jpg 마침 최애 컬러 노랑이

여러 모로 쉽지 않았다. 스케이트 보드는 거의 5년 만에 타보는 거고, 여행하면서 거의 매일 25000보 넘게 씩 걸어서 그런지 신발 앞창이 다 뜯어진 상태였다. 관광지라 길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부딪힐까 봐 조마조마하며 수시로 멈추고, 속도를 못 냈다. 그럼에도 바퀴 위에 올라타서 본 파노라마 바다 뷰는 진리였다. 진짜 오랜만에 보드를, 그것도 니스 바닷가에서 탔다니. 잊지 못할 기억이 됐다.

IMG_8229 2.jpg 헤어지기 아쉬웠던 노랑이

생각보다 체력 소모가 꽤 됐다. 안 그래도 더운 날에 땀이 쭉 났다. 1시간이 너무 짧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결국 내가 먼저 지쳐서 일찍 반납했다. 갈증 나서 맥주 한 캔 사서 자갈 해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보드 타고 크로넨버그 라거 때리는 삶이라니, 인생 너무 재미있다. 이제 여행 다한 것 같은 기분에 넋 놓고 한참을 앉아있었다.

IMG_8331 2.jpg 블랑 싫어하고 라거 좋아하는 타입

새파랗던 바다가 해가 지고 구름이 끼며 회색빛으로 채도가 낮아지는 순간을 실시간으로 감상했다. 그때 뭔가 신경 쓰이길래 뒤를 돌아보니, 어떤 아저씨가 나를 쳐다보며 뭐라 뭐라 하는 거다. 나는 불어를 알아들을 수 없다고 했는데 자꾸 말해서 그냥 무시하고 이어폰을 꽂았다. 속으로는 엄청 불안했지. 여기서 맥주 마시면 안 되나? 다들 마시는데. 나한테 뭔 짓 하려고 하나? 표정이 음흉한데. 싸한 낌새에 주위를 둘러보니 이상한 제스처를 취하며 이제 아예 다가오길래 쿨하게 무시하고 바로 자리를 떴다. 하, 아저씨 뭔데 내 평화 방해해.

IMG_8338.jpg 언니들 내 몫까지 즐겨줘여

앉을자리를 빼앗겼으니 또 걸을 수밖에. 언덕 건너편은 항구 마을 같아 보였다. 호기심에 내려가 보면 다시 이 언덕을 걸어 올라와야 할 걸 알기에 멀리서 바라볼 뿐. 약간 이탈리아 포지타노 느낌도 나고 (안 가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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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I LOVE NICE' 사인. 내 사진 찍고 싶은 욕심은 전혀 없고, 바다를 배경으로 저 사인만 놓고 찍고 싶었는데, 한 명이 찍고 나면 재빨리 다음 사람들이 뛰어 들어오는 치열한 현장이라 쉽지 않았다. 저렇게 C자 안에 들어가면 예쁘게 나오나 보다. 심지어는 I, L자 위 꼭대기에 올라간 사람도 봤다. 인증샷이 뭐라고 정말.

IMG_8403 2.jpg 치열한 눈치게임 현장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치열한 I LOVE NICE 사인 뒤편에는 일몰샷을 찍기 위해 삼각대를 설치해둔 카메라 부대들이 있었다. 나도 차라리 그 틈에 끼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샤샤샥 작은 셔터 소리만 들려올 뿐, 모두가 각자의 풍경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IMG_8435 2.jpg 조용한 셔터 전쟁 현장




오랜만에 사람들을 만나 제대로 된 식사를 먹고 싶었다. 나처럼 혼자 여행하는 사람들과 오늘 저녁을 함께하기로 했다. 신기하게도 다들 20대 후반~30대 초반의 비슷한 또래에, 한 달 이상씩 여행 중인 장기 여행자들이었다. 퇴사자 둘, 휴가자 둘.


퇴사자 한 분은 계획 없이 여행 중이란다. 그때그때 심심한데 여기 가볼까, 거기 좋다는데 가볼까 하며 즉흥적으로 행선지를 정한다고. 다음 도시가 어디가 될지는 아직 모른단다. 또 다른 한 분은 한 도시에 오래 머물며 직접 장 봐서 요리도 해 먹고, 살아보는 것처럼 여행 중이라고 한다. 나도 그렇게 대담한 여행객이 될 수 있을까. 30일이라는 시간도 쪼개서 빡빡한 계획에 맞춰 다니는 사람에게 무한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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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스와는 좀 안 어울리는 이름이지만 'Le Safari'라는 레스토랑에 갔다. 봉골레와 생선 요리는 '역시 프랑스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훌륭했고. 호기심에 시켜본 토끼 스테이크는 치킨 맛이랑 똑같은데 너무 퍽퍽해서 또 먹어볼 일은 없겠다.

IMG_8457 2.jpg JMT 봉골레는 이미 클리어

소화시킬 겸 조금 걷자고 했다. 어느새 밖은 깜깜해졌고, 낮에 혼자 걷던 바다와 밤에 함께 걷는 바다는 너무 다르게 느껴졌다. 오르막길을 올라 절벽(?) 같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잠깐 앉았다. 한 분이 스피커를 가져오셨다며 노래를 틀어주셨고, 우리는 서로 말없이 노래를 감상했다. 첫 곡은 '밤편지', 이어서 '라라랜드' OST, '비긴 어게인' OST... 한국인이 좋아하는 노래 TOP 100 리스트 같은 거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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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예상치 못한 전주에 심장이 쿵 했다. 여기서 이하이의 '한숨'이 나올 줄은 몰랐다. 이 노래를 쓴 사람이 얼마나 아팠을까 하는 생각에 평소에도 잘 못 듣는 노래인데. 희미한 불빛만 비추는 깜깜한 밤바다를 배경으로 듣는 건 너무 힘들었다.


일행들은 한 잔 더 하러 가자고 했다. 내가 이런 제안을 거절하는 사람이 아닌데, 너무 피곤했다. 보드를 좀 무리하게 타기도 했고, 노래에 괜히 마음도 약해졌고. 즐거운 여행 하시라고 인사드리고 다시 혼자 20분을 걸어 숙소로 돌아갔다. 고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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