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14. 프랑스 에즈 - 모나코 - 니스
눈을 뜨자마자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어제 저녁 동행으로부터 쪽지가 한 통 와있었다. '오늘 니스 대중교통 전부 파업이래요. 꼭 알아보고 가세요.'
아, 망했다. 내일은 선인장 보러 에즈 빌리지 갈 거다, 그거 보러 여기까지 온 거다라며 마냥 설렜던 내가 걱정됐었나 보다. 여기까지 왔는데 에즈에 못 갈 수도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언제 어떻게 본 건지 기억도 또렷이 나진 않지만 Jardin Exotique d'Eze의 사진을 처음 봤던 그때의 느낌만은 생생하다. 실제로 이런 곳이 존재한단 말인가, 내 인생에 한 번이라도 가볼 수 있을까, 선인장을 좋아하는 나에겐 지상낙원 같은 곳이 아닌가, 부럽다. 딱히 대상도 없이 부러워만 한 걸 보면, 아마도 그때부터 에즈라는 곳을 동경해왔나 보다.
어쩌지 생각만 하는 건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우선 준비를 마치고 숙소 밖으로 나섰다. 어제 종종 보이던 트램 하나 안 보인다.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트램길 위를 걸어 다니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말로만 듣던 프랑스 대중교통 파업 여파를 이렇게 몸소 겪어볼 줄이야.
아침부터 먹으면서 생각해보자. 워크하우스 카페. 1층은 카페, 2층은 아마도 멤버십 기반의 코워킹 스페이스로 추정되는 곳. 맨날 선탠하고 서핑하며 노는 줄 알았던 니스 사람들도 일을 하는구나. 아침부터 맥북 켜놓고 심각한 얼굴로 일하는 현지인들 사이에서, 어떻게 하면 에즈 갈 수 있나 더 심각한 얼굴로 알아보던 관광객. 얼마나 가고 싶었으면 우버 견적까지 뽑아놓고, 같이 갈 사람 있나도 알아봤다. 아무도 연락이 없었지만.
하고자 하는 건 무조건 하고야 만다. 포기할 내가 아니다. 어차피 숙소에서 카페까지도 30분 정도 걸어온 건데, 여기서 20분만 더 걸어가면 버스 종점이 있단다. 다 파업해도 혹시 에즈 가는 버스는 운영할 수도 있잖아. 1%의 희망을 안고 가봤다. 그리고 정말 말도 안 되게,
에즈로 향하는 82번 버스가 마침 출발 대기 중이었다. 만세! 이게 무슨 행운이야. 이게 무슨 일인지 아직도 미스터리지만 에즈에 갈 수 있음에 그저 감사하다. 정말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지나 보다.
가는 길엔 무조건 오른쪽 창가에 앉으라는 블로거 선배님들의 충고를 잘 새겨 들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찍은 거라 사진 퀄리티는 아쉽지만. 푸른 바다에 쏟아지는 햇살을 마음껏 눈에 담았다. 설렌다. 꿈꾸던 나의 상상 속 지상낙원 에즈는 어떤 곳일까.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줄 알았던 기대와는 달리, 내 앞에 펼쳐진 건 끝없는 오르막길이었다. 에즈 빌리지가 언덕에 있는 마을이라 우선 길이 나있는 대로 쭉 따라 올라갔다. 구불구불 좁은 길이라 몇 차례 길을 잃기도 했다. 에즈에서 구글맵 보고 길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다행인 건 이 좁은 길 사이사이에 볼거리가 많다. 범상치 않은 포스를 풍기는 예술가들의 작업실, 공방도 꽤 있고, 지중해 느낌 물씬 나는 옷이나 아기자기한 소품을 파는 곳들도 눈에 띄었다. 소문난 대로 참 예쁜 마을이다. 예쁘고 소박한 옛날 영화 세트장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
드디어, 돌고 돌아 입구를 찾아 입장권도 사고, 고대하던 열대 정원이 눈 앞에 펼쳐지던 순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아침부터 고생해서 버스 타고, 더운 날 여기까지 올라온 보람이 있다. 과연 '지중해의 정원' 다운 뷰. 제각각의 모양을 한 선인장, 그 뒤로 빨간 지붕의 에즈 마을, 그 뒤로 하늘과 바다의 경계선이 구별도 잘 안 될 정도로 눈 부시고 새파랗던 지중해 바다. 이 모든 게 하나로 어우러져 이루는 이국적인 절경. 내 눈으로 드디어 봤다!
내가 선인장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 세상에 똑같이 생긴 선인장은 없다. 물론 같은 종끼리 비슷하게 생겼을 수는 있지만, 자라는 환경과 햇빛의 방향에 따라 다 다르게 자라난다. 역시 이곳에서도 똑같이 생긴 선인장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렇게 수십 가지 다양한 종을 한 번에 보는 것도 신기한데, 게다가 다 저마다의 개성을 뽐낸다.
키 큰 선인장 사이사이에 숨어있는 조각상이 이국적인 매력을 더해준다. 여기 정말 무슨 신화 속, 동화 속 배경이 아닐까. 조각상의 얼굴들을 뚫어지게 관찰하며 별 생각을 다해봤다.
더 멋진 사진을 건지고 싶고, 사진으로 담기지 않는 풍경의 분위기는 마음에 담아두고 싶어 열대 정원에서만 2시간 넘게 있었나 보다. 그런데 여기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안 그래도 더운 날씨인데 그늘이라고는 1도 찾아볼 수 없는 곳이다. 태양과 나 사이를 막아줄 수 있는 그 어떠한 장벽도 없기에, 직사광선이 내 머리와 피부에 그대로 내리 꽂히는 게 느껴졌다. 더 있다가는 머리에 불이 붙을 수도 있겠다 싶어 아쉽지만 선인장과 작별인사를 나눴다.
너무 목이 말라 물 한 모금이 간절했다. 마실 거라도 사갈까 싶어서 나오자마자 아무 데나 들어갔는데 메뉴에 와인이 있네? 시원한 스파클링 와인을 주문했다. 알고 보니 여기 모든 메뉴를 올리브와 함께 서빙하는 올리브 전문점이라고. 지중해 사람처럼 대낮에 와인에 올리브를 곁들이는 뜻밖의 호사를 누려본다. '가뭄에 단비'란 말, 딱 이럴 때 쓰는 거구나.
운이 좋게 또 타이밍이 잘 맞았다. 바로 모나코로 넘어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버스 탈 땐 운전기사 반대쪽 맨 앞자리를 선호한다. 내가 운전하는 기분도 나고, 큰 창으로 바깥세상 구경하기에도 좋다. 모나코로 가는 길은 내가 태어나서 본 '막히는 길' 중 가장 아름다웠다.
작은 버스 타고 잠깐을 달려왔을 뿐인데 국경을 넘었다는 게 신기했다. 사실 모나코에는 카지노가 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정보 없이 왔다. 아는 게 없으니 기대되는 것도 딱히 없더라. 사람들이 많이 내리길래 따라 내렸더니 그곳이 마침 '몬테 카를로 카지노'였다.
해본 적도, 할 생각도 없지만 관광 차원에서 구경해 볼만은 하다. 바깥세상과 철저히 단절되어 현란하게 돌아가는 시공간. 1%의 확률에 몰두하고, 잃고 얻고를 반복하는 사람들의 표정. 살면서 쉽게 볼 수 없는 다른 세계의 장면이라 더욱 많은 생각이 들게 한다. 다만 라스베가스나 멜버른 카지노에 비해 텅텅 비어있고, 활력이 없어 보이는 점은 아쉬웠다.
답답한 카지노에서 벗어나 시원한 바닷바람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항구를 따라 걷기 완벽한 날씨다. 역시 부자들의 나라답게 항구에서도 부내가 난다. 저 호화로운 요트들도 다 개인 소유겠지. 세금을 안 내고 군대도 안 간다니, 돈 많고 걱정 없는 사람들이 살기에는 천국이겠다.
돈이 없는 나는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점심 겸 저녁 먹을 곳을 찾아 헤맸다. 이왕 돈 쓰는 거 최고의 가성비를 내기 위해 구글맵 평점 높은 곳을 찾아야지. 부자처럼 먹어보자는 마음으로 가장 비싼 파스타와 맥주를 주문했다.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파스타 메뉴 중 가장 끝에 있던 걸로 기억한다.
한 입 맛보고 놀라서 포크 내려놓고 다시 사진을 찍었다. 파스타 맛에 해물 맛이 제대로 배어 있으면서 약간 매콤해서 질리지도 않고 계속 들어간다. 해물 넣은 오일 파스타가 맛없기도 힘들지만 이렇게까지 맛있기도 힘든데. 유럽 식당에서 꼭 주는 빵은 보통 한두 개 집어 먹고 다 남기는데, 여기서는 파스타 소스에 찍어서 야무지게 다 먹고 나왔다. 모나코 부자들 안 부러웠던 최고의 한 끼.
사람이 참 단순한 게, 파스타를 먹고 나서부터 모나코가 한층 더 예뻐 보였다. 솔직히 정이 간다거나, 여기 살고 싶다거나 그런 마음은 전혀 안 드는데. 그냥 인스타에서 예쁜 남의 집 구경하는 그런 심리로, 예쁘지만 나의 것은 아닌.
걷다가 우연히 쇼핑몰 같은 곳을 찾아 잠깐 앉아 쉬었다. 사실 모나코에서는 지쳤었나 보다. 아침부터 걱정에 마음고생을 하기도 했고, 하도 걸어서 이제 정말 신발이 찢어지기 직전인 데다, 무엇보다 살인적인 더위에 gg 치고 숙소 들어가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돌아가기 전에 맥플러리로 더위 식히며 마지막 뷰 구경. 로투스맛 맥플러리, 왜 한국에 없어요?
니스로 돌아가는 버스를 어디서 타야 하는지 확실하지 않아, 우선 대책 없이 처음 내렸던 곳 쪽으로 걸었다. 그런데 중간에 사람들이 무슨 빌딩 안으로 많이 들어가길래 뭐지 하고 따라 들어가 보니 세상에. 기차역이다. 심지어 자판기로 표만 끊으면 5분 후에 바로 니스 가는 기차를 탈 수 있단다. 하루 종일 교통 운은 기가 막힌다.
다들 서둘러 니스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었는지, 자리가 없는 건 물론이고 서서 타는데 사람들에 엄청 치이고. 고통스러운 시간 끝에 겨우 도착했다. 그래도 니스는 하루 묵어봤다고. 집에 돌아온 듯 마음이 편해졌다.
몸은 힘들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다. 어제저녁 바닷가에서 일몰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해 아쉬웠다. 오늘도 놓치면 후회할 게 분명하다.
서두르길 잘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해가 완전히 져버렸을지도 모른다. 니스는 특이하게 모래가 아닌 자갈 해변이다. 파도가 몰려와서 자갈에 알알이 부딪히고, 다시 그 틈으로 빠져나갈 때 나는 '자갈자갈'한 소리가 참 좋다. 그렇게 왔다 가며 대차게 부서져라. 시원하게.
노을과 바다, 바람과 파도를 배경 삼아 한참 서서 노래를 들었다. 랜덤 재생을 돌리다가 주로 잔잔하고 덤덤한 발라드곡에 손이 멈추곤 했는데, 뜻밖의 곡이 하나 있었다면 선미의 'Black Pearl'. 눈앞에 널려있는 까만 자갈돌이 흑진주를 닮아 보였다. 그저 예뻐라 예뻐라 그저 곱구나 곱구나 그저 빛이나 빛이나 이리 얼룩져버린 게.
해가 완전히 바다에 쏙 빠져버려, 더 이상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알 수 없게 어두워지고 나서야 발걸음을 돌렸다. 오늘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 나이트 라이프를 즐기는 건 실패. 휴양지 와서 너무 혼자서만 잘 놀았네. 그래도 아침부터 부지런히 다닌 덕에 그렇게 가보고 싶었던 에즈에 가서 로망도 실현하고, 열심히 산 하루였다.
피로를 씻어내고 혼자 로제 와인 한 병을 비우며 잠을 청했다. 열네 번째 밤, 이렇게 여행의 1막이 끝났다. 내일은 2막을 향해 비행기로 이동하는 날이다. 낮비행기라 놓칠 일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비행을 앞둔 전날 밤은 늘 긴장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