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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 프랑스 사이 국경을 넘어

Day6. 독일 하이델베르크 -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by 이리터

민박집에서 준다는 아침밥을 먹기 위해 잠에서 일찍 깼다. 한인민박이지만 식사는 독일식 빵, 소시지, 샐러드와 과일. 다행히 아직은 빵이 질리지는 않는다. 기차 시간까지는 여유 있지만 서둘렀다. 어제 커피 한 잔도 못 마신 게 분해서, 오늘은 카페 오픈하자마자 한 잔 마시고 시작해야겠다 싶었다.


찬 아침 공기를 마시며 10분 정도 걸어 도착한 Wacker's Kaffee. 괴테가 매일 아침 우유 사러 들렸다는 식료품점에 들어선 100년 전통의 카페라고 한다. 용도는 잘 모르겠지만 오래되어 보이는 가구와 저울, 누군지는 모르지만 옛날 사람 같아 보이는 초상화가 세월의 흔적을 말해준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중장년층 손님이기도 했고.

IMG_3132 2.jpg 1914년생, 205살 카페

따뜻한 라떼로 오랜만에 카페인 충전을 하니 비로소 몸이 깨어난 느낌이다. 오늘은 두 도시를 봐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라 컨디션이 중요하다. 짐을 챙겨 프랑크푸르트에서 만하임을 거쳐 하이델베르크로 가는 기차를 탔다.




IMG_3203.jpg 옛 기차역인 Altstadt 부근

하이델베르크 중앙역 부근 신시가지는 거의 공사판이었어서 사실 기대감이 한풀 꺾였었다.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 버스로 구시가지에 진입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딱 내가 상상했던 '독일의 클래식'한 풍경 그 자체가 펼쳐지는 거다. 맞아, 내가 이런 걸 보러 하이델베르크에 오고 싶어 했지. 베를린의 hip함과 프랑크푸르트의 neat함과는 확실히 다른 독일스러움, 조용한 대학도시 다운 차분함과 고상함. 새로운 걸 보겠다는 기대감에 이때부터 신이 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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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날씨는 꾸물꾸물해 어두웠지만 Kornmarkt 광장의 색은 다채로웠다. 이때 누군가 집 안에서 악기 연습을 하는 소리가 꽤 크게 울려 퍼졌는데, 마치 bgm처럼 광경과 잘 어우러져 더 예뻐 보이는 순간이었다. 눈에 보이는 풍경과 귀에 들려오는 소리가 우연히 잘 어울릴 때 쾌감을 느낀다.

IMG_3388.jpg 하이델베르크 광장

관광할 때 굳이 돈 주고 전망대에 오르는 편은 아니지만 하이델베르크에서는 예외다. 이 도시를 한눈에 담고 싶었다. 땅에서 올려다볼 땐 저 위를 어떻게 올라가지 싶었는데, 사람들이 줄지어 가는 곳을 따라가 보니 한 번에 올라가는 이동수단이 있더라. 어쩌다 보니 한국인 단체 관광객 무리에 섞여 푸니쿨라에 올라탔다.

IMG_3228 2.jpg 하이델베르크 성에 올라 바라본 뷰

안 올라왔으면 후회할 뻔했다. 들쑥날쑥하지 않고 어디에 시선을 두더라도 '아 여긴 하이델베르크다' 알 수 있는 일관성이 좋다. 오늘은 마침 내가 사랑하는 10월의 첫날인데, 온 지붕에도 단풍이 든 듯 가을을 닮은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관이고요 절경이네요.


이 정도 뷰라면 내 사진을 한번 남겨보고 싶을 정도였다. 옆에 있던 외국인에게 부탁했다가 구도와 피사체는 1도 신경 안 쓰는 사진 실력에 절망. 결국 마치 남이 찍어준 것처럼 혼자 셀카 찍는 기술을 터득했다.

IMG_3305 2.jpg 퀴디치 공 날아다닐 것 같은

하이델베르크성 자체도 한 번쯤 볼 만한 구경거리였다. 수 차례의 전쟁과 낙뢰에 일부가 파괴됐지만 여전히 굳건한 웅장함을 과시하고 있다. 황량한 SF 영화 속 배경 같은 느낌도 나고. 사진으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높이 8m의 거대한 와인 오크통도 있다. 저 안에 와인 가득 채워놓고 허우적대면 정말 타락적이고 멋있겠다는 허무맹랑한 상상도 해보고. 신경 써서 전시를 살펴본 건 아니지만 느낌 있었던 독일 약제 박물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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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서 내려다보는 경치에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몇 번을 다시 가서 보고, 사진 찍고를 반복하다 결국 배도 고프고 그래서 마을을 따라 걸어 내려왔다.




하이델베르크에서는 기필코 최고의 맥주를 맛보고 싶었다. 술을 처음으로 접했던 스무 살 대학생 시절, 나는 맥주를 싫어했었다. 아니 싫어하는 줄 알았다. 아마 드럽게 맛없는 맥주만 먹어봐서 일 거다. 동아리에서 자주 갔던 신촌 하이델베르크라는 호프집이 대표적인 예다. 하필 이름도 하이델베르크.


맥주 맛에 실망하지 않기 위해 미리 찾아봐둔 브로이하우스 Vetter's Alt. 가게 안에서 직접 양조하는 통을 볼 수 있어 신뢰가 간다. 독일 왔으니 슈바인학세 한번 뜯어줘야지 싶어서 주문! 사실 고기보다는 사워크라우트가 그리웠다. 맥주는 고민하다가 고민하는 시간이 아까워 샘플러를 질렀다.

IMG_3813.jpg 독일 정식

맥주 맛을 제대로 느끼려면 꼭 오른쪽부터 왼쪽 순으로 (헬레스-바이젠-필스너-둔켈) 마시라는 직원의 친절한 설명도 샘플러를 시킨 자의 특권이겠지. 맥주 다 시켜놓고 골라 마시며 혼자 학센 한 마리 뜯는 여유. 이 정도면 성공한(?) 삶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들이켰다. 낮부터 핑 도는 것 같아 결국 고기 반, 둔켈 반 잔은 남겼지만.


소화를 시키기 위해 좀 걸어야 했다. 운치 있어 보이는 카를 테오도르 다리를 건넜다. 다리 초입에 있는 원숭이상에 머리를 가져다 대면 똑똑해지고, 만지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전설이 있다고 하는데. 원숭이가 너무 망측하게 생겨서 썩 내키지 않아 패스했다. 다리 입구가 공사 중이라 사진에 안 예쁘게 담길까 봐 아쉬울 뻔했는데, 저렇게 원래 모습이 프린팅 되어 있으니 좀 귀여워서 서운하지는 않았다.

IMG_3471 2.jpg 감쪽같은(?)

어째 날씨가 심상치 않더니, 다리를 건너자마자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고, 우산을 꺼내 쓰니 우산이 휙 날아갈 정도로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근처에 있는 버스정류장으로 달려가 급하게 비를 피했다. 소나기였는지 조금 기다리다 보니 금방 그치긴 했다. 천만다행이다.

IMG_3523 2.jpg 10월 달력 사진 그 자체

강 건너편에서 하이델베르크 성, 카를 테오도르 다리, 구시가지 일대를 한 시야에 담아보는 뷰가 훨씬 예뻤다. 다시 한번 느끼지만 가을의 정취와 참 잘 어울리는 도시. 비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어 결국 철학자의 길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는 못 가보게 됐지만, 아마도 이런 느낌이었겠지.

IMG_3561 2.jpg 왠지 여기는 부촌 너낌

내내 흐리다 이제야 해가 나기 시작한 하이델베르크. 살짝 얄미웠지만 이제 겨우 하루의 반이 지났을 뿐. 아쉬운 마음은 접어두고, 서둘러 다음 도시로 이동해야 했다.




드디어 독일을 떠나 프랑스로 향한다. 사실 독일은 4년 전 뮌헨-뉘른베르크, 2년 전 베를린-드레스덴, 이번에 베를린-프랑크푸르트-하이델베르크까지, 벌써 세 번째 오는 거라 친근하게 느껴졌는데 프랑스는 처음이라 괜히 긴장됐다. 독어나 불어나 못하는 건 마찬가지면서.


하이델베르크에서 스트라스부르까지 지도상으로는 가까워 보였는데, 나름 국경을 넘는 이동이라 그런지 가는 길이 멀게 느껴졌다. 어느 순간부터 기차 안의 공기가 달라진 걸 실감했다. 다양한 인종의 승객들이 타고, 빈자리가 없어 구석에 세워둔 남의 짐(...은 내 캐리어ㅠㅠ)을 깔고 앉는, 예상 밖의 사람들이 등장했다. 아, 프랑스.

IMG_3589.JPG 사실 내부는 전혀 저렇게 안 생겼는데

얼핏 보면 미술관으로 착각할 정도로 예쁜 스트라스부르 중앙역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해가 더 지기 전에, 하늘이 가장 예쁠 타이밍의 쁘띠 프랑스를 사진으로 담아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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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띠쁘띠 그 자체인 쁘띠 프랑스

이래서 프랑스 프랑스 하는구나. '예쁘다'는 감탄사가 10초에 한번 꼴로 절로 나왔다. 분홍빛 하늘이 한몫했지만, 동화 속에서나 본 듯한 건축양식과 잔잔하게 흐르는 운하, 길가 곳곳에 포인트가 되는 화분은 확실히 독일에서는 보지 못한 '가꿔진 예쁨'이다.


사실 나는 프랑스를 별로 안 좋아할 거라는 이상한 선입견이 있었다. 그렇게 예쁘고 화려한 거 별로 안 좋아하고, 독일처럼 투박하지만 깔끔하고 정제되어 있는 취향에 가깝다고 믿어온 편. 그런데 나도 사람인지라 예쁜 거에 설레고 마음 약해지나 보다. 새삼 그동안 이유 없이 미워했던 프랑스에 조금 미안해졌다. 물론 스트라스부르가 독일-프랑스의 국경지대에 위치해있고, 실제로 영토싸움 중 독일에 넘어갔던 역사도 있어서, 독일과 프랑스 문화가 반반씩 섞여있다고 보면 된다고 한다. 덕분에 나의 첫 프랑스는 그렇게 낯설지 않게, 독일과 다르고 신기한 점만 캐치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걸까.

IMG_3718 2.JPG 시내 한가운데 회전목마 있는 건 반칙이잖아

유럽 여행하면서 성당은 하도 많이 보니 큰 감흥이 없을 줄 알았는데,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은 남다른 크기에 압도당했다. 하도 커서 도저히 사진 각이 안 나올 정도. 그 옛날에 이 높은 걸 어찌 쌓아 올렸을까. 하늘 끝까지 올려다보느라 뒷목이 뻣뻣한 느낌으로 기억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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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늦어 성당 안에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외벽에 조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작은 디테일 하나하나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종교가 없는 나에게조차 홀리한 기운이 느껴졌다.




도시에 어둠이 깔릴 무렵 숙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제 슬슬 빵이 질리고, 밥 생각이 조금씩 나나보다. 아까 봐 둔 스시집이 괜히 아른거린다. 고민 끝에 연어 아보카도 롤 작은 사이즈를 포장해왔다. 나름 프랑스에 왔으니 오늘의 마감주(酒)로는 와인을 한 잔 해볼까 했는데, 여긴 작은 사이즈의 와인은 취급 안 하나보다. 결국 알자스 지역에서 만들었다는 맥주를 골랐다. 이 정도면 로컬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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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돌아와 오랜만에 쌀을 먹으니 눈물 날 듯 반가웠다. 맥주도 꿀꺽꿀꺽 잘 넘어가고. 오늘은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호텔 1인실을 쓰는 날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쏼라쏼라 프랑스 방송을 켜놓으니 외롭지도 않고, 새삼 혼자인 게 너무나도 편해진다. 밀린 손빨래도 하고, 이어 플러그 없이 꿀잠을 잤다. 1인실 최고야. 프랑스도 생각보다 마음에 들어. 하루 안에 두 나라를 여행하다니. 휴가 최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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