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3. 독일 베를린 노이쾰른 -샤를로텐부르크
서둘러 채비를 마치고 숙소 근처에 미리 찾아봐둔 브런치 카페로 향했다. SNS에서 여러 번 봤던 그 예쁜 계단을 실제로 영접했을 때 참 잘 왔다 싶었다. 생크림 크로와상 프렌치토스트와 자몽주스를 주문했다. 달달하고 버터리한 칼로리의 맛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오늘은 어제나 그제에 비해 확연히 쌀쌀해졌는데 아침부터 이렇게 두둑이 먹어뒀으니 지방은 좀 쌓여 따뜻하겠지.
이번 여행에서는 한 숙소에서 가급적 2박 이상은 하지 않는 걸로 욕심 내서 계획을 세웠다. 숙소 그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한 도시 내에서도 가급적 여러 동네를 경험해보고 싶었다. 한 번만 나갔다 들어와도 금세 우리 집처럼 정들어버리는 곳. 아침의 첫 공기를 마시고, 밤의 고요함 속에 하루를 정리하는 곳. 그런 곳을 여러 군데 심어놓고 싶었다.
서독의 세련됨을 느낄 수 있는 중심지 미떼를 떠나, 오늘부터는 동독의 날 것 그 자체를 느낄 수 있는 남쪽 노이쾰른에 있는 숙소에 묵게 된다. 특이하게 체크인이 오전 11시'까지'라 아침에 서둘러 이동했다. 확실히 미떼와는 다른 주변 분위기. 어쩐지 으스스한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다.
무거운 캐리어를 낑낑 대고 들어가자마자 거실에 있는 모두가 나를 환영해줬다. 주인 Anne은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사람도 웃게 만들 법한 친절한 에너지를 가졌고, 룸메이트(?)들도 좋은 사람들 같아 보였다. 지난 이틀 동안 체크인하고 주문하는 거 외엔 거의 다른 사람들과 말을 안 하고 살았으니, 이런 환영은 조금 낯설다.
딱 하나 남은 1층 침대를 차지하고 짐 정리를 하고 나니, 오늘 아직 커피를 한 잔도 못 마셨음을 깨달았다. 구글맵으로 근처에 있는 동네 카페를 찾았다. 숙소에서 걸어 나와 코너를 돌면 바로 짠하고 나타날 줄이야. 사실 특별할 건 없는 카페였고 플랫화이트는 정말 한입거리였지만, 그래도 카페인 충전을 좀 하고 나니 이 추위를 뚫고 돌아다닐 용기가 생겼달까.
서쪽으로 가보자 마음먹었다. 베를린 남동쪽에 있는 노이쾰른에서 서쪽 샤를로텐부르크까지 가는 길을 찾아보니 버스 타고 40분이 걸리더라. 뚜렷한 계획도 없고 쫓기는 것도 없는데, 여유 있게 다니자 싶어서 무작정 버스에 올라탔다.
독일어로 나오는 안내 방송을 못 알아들어 영문은 몰랐지만 승객들이 다 내리길래 중간에 내렸고, 뒤이어 오는 다른 버스로 갈아탔는데 그 버스도 중간에 멈췄다. 원래 다른 곳에 갈 생각이었는데 마침 카데베가 보이길래 그냥 내려버렸다. 무슨 기준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럽 최대 백화점이라는 카데베(KaDeWe). 6층 푸드코트를 쓱 한번 둘러보고 엄청 귀여운 곰 모양의 초콜릿을 샀다. 곰을 좋아하는 (다 큰 성인) 남동생이 분명 좋아할 거라는 확신에 들떴다.
백화점에서 나와 저 멀리 카이저빌헬름 교회가 보이길래 그쪽으로 걸어가 봤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을 맞아 지붕이 반토막 났는데 전쟁의 상처를 잊지 위해 그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단다. 생각해 보니 재작년 베를린 트럭 테러도 이 근처였지. 세상에는 잊고 싶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상처들이 너무나도 많은 법이다.
교회 맞은편에는 '비키니 베를린'이라는 쇼핑몰이 있다. 두 동으로 나뉘어 있는 건물 모양이 비키니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몰 바로 뒤편이 동물원이라 창문을 통해서 동물들이 노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다. 아주 똑똑하게 주위 풍경을 곧 그 공간의 아이덴티티로 만들어버린 케이스. 원숭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글쎄,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재작년에 꽤나 인상적인 전시를 봤던 사진 전시관 c/o berlin은 'European Month of Photography' 오프닝 행사 준비로 들어갈 수 없었다. 저녁에 왔으면 흔치 않은 전시-행사를 볼 수 있는 거였는데.
아쉬움을 접어두고, 재작년에 전시 보고 나오는 길에 먹었던 Curry36의 커리부어스트나 또 먹으러 갔다. 영어 메뉴판이 없는 곳에서 주문할 땐 늘 긴장된다. '원 커리부어스트, 포메 프리테 윗 마요네즈, 앤 어 필스너 플리즈.' 사실 다른 맥주를 가리키며 필스너 달라고 했는데 베를리너 킨들을 받았지만 뭐 이 정도는 애교로 넘어갈 수 있다. 겨우 자리를 잡고 보니 이번에는 병따개가 없다. 돌려서 열어야 하나, 이빨로 뜯어야 하나 멘붕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친절한 부부의 도움으로 열었다.
뿌듯한 마음에 요리조리 음식 사진을 찍었는데 앞에 있는 할머니 두 분이 나를 가리키며 뭐라 하시더니 나를 찍어주시겠다고 한 거였다. 독일 음식 처음 먹고 인증샷 남기고 싶어 하는 앤 줄 알았나 봐.. 호의를 거절할 순 없어서 핸드폰을 맡겼더니 초고속 연사로 80장 찍어놓고, 그 마저도 손가락으로 카메라를 다 가려 놓으셨다. 참으로 다이내믹했던 커리부어스트 먹기 미션. 역시나 내가 기억하던 그 맛은 실망스럽지 않았다. 소시지에 감튀가 뭐라고 이렇게 맛있을 일.
맥주를 급하게 마셨더니 살짝 취기가 올라왔다. 여기까지 온 김에 조금만 더 걸어 구글맵에 별표 찍어둔 서점을 구경하기로 했다. 기찻길 아래 있는 예술 전문 서점 뷔헤어보르겐(Bücherbogen)과 19금 서적이 많아 흠칫했던 타셴(TASCHEN).
다음 행선지는 티어가르텐, 베를린 도심 속에 있는 대규모 공원이다. 시내 한가운데 이런 녹색지대가 있다는 건 정말 큰 행운이다. 이런 복 받은 베를리너들. 공원 안에 있는 자연 속 카페 Café am Neuen See. 아름다운 리얼 자연 그 자체의 호숫가에 배, 피크닉 테이블, 비치 베드가 쫘르륵 줄지어 있었으나, 너무 추워져서 인지 물가를 즐기는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 실내에서 식사를 했지만, 나는 밖에 앉아 몸을 녹일 수 있는 따뜻한 차이라테 한 잔을 마셨다.
티어가르텐 한가운데 전승기념탑(Siegessäule)이 우뚝 솟아있다. 저 위에서 보는 베를린 시내 전경이 꽤 멋있다던데, 사실 올라가는 통로를 찾아 헤맸으나 끝내 못 찾아서 포기했다. 하필 내가 있는 동안 터키 대통령의 방문, 독일 독립기념일 행사 준비로 브란덴부르크 문 일대부터 여기까지 도로를 아예 통제해버려서, 결국 한참을 걸어 돌아 나와야 했다.
저녁에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 있었는데 혼자 가기엔 애매해서 동행을 구했다. 노이쾰른에 있는 루프탑 바. 사진으로 봤을 때 노이쾰른에 저렇게 높은 건물이 있을까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쇼핑몰 지상주차장 맨 꼭대기 층에, 어두운 창고나 있을 법한 특이한 위치에 있었다.
저녁 6시 즈음 입장하니 마침 베를린이 노을에 막 물들던 참이었다. 저 멀리 TV타워도 보이고, 내 손에는 생맥주가 있고, 지금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내가 진짜 여기에 와있구나.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동행은 나 덕분에 마음에 드는 사진을 남겼다며 고마워했고, 독일 유학생이었던 동행은 여기 살 때도 못 와보던 핫플에 와볼 수 있어 좋았다고 했다. 다들 마음에 들어하니 다행이다.
이미 노을에 한 차례 취했고, 맥주에 또 취했는데, 이 세상 힙이 아닌 이곳의 분위기에 또 취해버려서 잠깐 꿈을 꿨었나 싶을 정도로 황홀했다. 딱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너무 추웠다는 것. 셋 다 굳이 밖에서 바들바들 떨면서 찬 맥주를 먹다가, 해가 다 지고 도저히 버티지 못하겠다 싶었을 때 자리를 옮겼다.
유학생 동행의 단골집이었다는 근처 수제 맥주 펍에 갔다. 아무리 내가 조사를 열심히 해왔다지만, 역시 진짜 로컬들이 가는 곳은 숨어있다. 무엇보다 실내가 너무 따뜻하고 아늑해서 감동을 다 받을 뻔. 무려 25여 가지의 수제 맥주 중에 고를 수 있는데 나는 '아포가토'맛을 주문했다. 정말 달달한 커피 향이 나서 꿀떡꿀떡 잘 넘어갔다.
풍경과 맥주에 취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불과 2시간 전 처음 만난 우리는 별의별 얘기를 다했다. 베를린을 왜 좋아하는지로 시작해서, 정신 차려보니 잊고 살았던 어린 시절 꿈, 그리고 왜 지금 하는 일이 만족스럽지 못한지까지 털어놔 버렸다. 친구들은 그런 나에게 여행 잘 왔다며 위로해줬고, 내 꿈을 응원해줬다. 미소가 선하다는, 그 어디서 들어보지도 못한 과분한 칭찬까지. 긴 홀로 여행 중 가끔 이런 시간이 필요하다. 무엇을 위해 지금 여행하는지, 잠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였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고마웠던 친구들.
거의 밤 12시가 다되어 헤어졌다. 혼자 여행하며 이렇게 늦게까지 놀다 들어간 일탈(?)은 처음이다. 사실 노이쾰른은 낮에도 안전하다고 생각한 곳은 아니라 잔뜩 긴장하고 지하철을 탔는데, 아저씨 네 명이 맛 간 표정으로 맥주 마시며 뻗어 있는 거다. 설상가상으로 반대 방향 지하철에 잘못 탔네. 순간 무서워서 눈물이 찔끔 날 뻔했지만 침착하게 갈아타고 무사히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다가 너무 추워서 수십 번 깼는데 아니나 다를까, 어마어마하게 지독한 감기에 걸리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