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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왜 자꾸 나한테 끼 부려?

Day2. 독일 베를린 미떼 - 프렌츠라우어베르그

by 이리터

시차 때문인지, 아래층 아줌마의 코 고는 소리 때문인지, 새벽 5시에 절로 눈이 떠졌다. 컴컴한 방에서 눈치 보며 나갈 준비를 하고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2년 전에 갔을 때 에그타르트가 다 떨어졌다고 해서 못 먹고 그냥 나온 카페 'THE BARN Roastery'로 향했다. 숙소에 보조배터리를 두고 온 건 트램이 출발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당당하게 오늘의 첫 손님으로 입장. 다행히 오늘은 에그타르트가 있었고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이 맛은 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여기 포르투갈도 아니고, 홍콩도 아닌데 에그타르트가 이렇게까지 맛있는 건 좀 barn칙 아닐까. 이름처럼 곳간 같은 공간에서 커피 로스팅하는 소음마저 흥겨운 비트로 들리던 베를린에서의 첫 아침. 오늘은 어제보다는 느낌이 좋았다.

이건 좀 Barn칙




북쪽으로 꽤 올라온 김에 마우어 파크까지 가보기로 했다. 지난여름에는 플리 마켓이 열리는 일요일 낮에 갔었어서, 시장 구경도 하고 버스킹이랑 노래자랑도 보고 흥겨웠던 기억이 있다. 쌀쌀한 평일 가을 아침의 마우어 파크는 황량함 그 자체였다. 그 푸르던 잔디는 어디 가고, 메마른 누런 잔디 틈에 버려진 담배꽁초와 병뚜껑뿐이다. 오늘도 생각했지. 역시 베를린은 여름에 와야 해..

날이 개니 조금 낫긴 했지만

황폐해진 기분을 씻어버릴 상큼함이 필요하다. 마우어 파크 왼쪽에 빨주노 색의 예쁜 아파트가 있던 게 기억났다. 다시 봐도 참 예쁜 색. 왜 한국 아파트는 하나같이 다 못생긴 색일까. 나도 이런 밝은 집에서 살면 매일매일 기분 좋을 같은데.

노란 집에 살고 싶어요

베를린에서 THE BARN과 양대산맥으로 유명한 카페 Bonanza Coffee Roasters는 지난번에 갔기 때문에 이번에는 패스하기로 했다. 예쁜 외관이나 다시 한번 볼까 해서 지나가다 맞은편의 가게에 시선 강탈당하고 마는데..


이름부터 'VEB Orange', 세상 모든 오렌지색 물건은 다 진열해 놓은 듯한, 대놓고 오렌지 덕후 인증하는 가게였다. 들어가 보니 숨이 막힐 정도로 예쁜 빈티지 샵. 촬영 금지라 사진을 남겨오지는 못했지만, LP부터 그릇에 옷까지 없는 게 없었고, 디스플레이 센스와 분위기는 웬만한 스튜디오 못지않았다. 집념이 강한 누군가의 보물함을 살짝 엿본 느낌. 요즘 대세인 빈티지 컵을 몇 개 사 오고 싶었지만 출발 전부터 캐리어 꽉 찬 사람.. 대신 2달러짜리 빈티지 핀으로 소소한 만족감을 느꼈다. 나도 언젠간 이 사장님 만한 덕력으로 '옐로우샵'을 열 수 있는 성공한 덕후가 되어야지.

여기 아무한테도 안 알려주고 싶었는데

지난번에는 그냥 지나쳤던 카페 Kauf Dich Glücklich. 하지만 이름 뜻을 알게 된 이상 찾아가야만 했다. ‘당신을 기쁘게 하는 걸 사가세요’ 이 가게에 있는 모든 것을 살 수 있단다. 그래서인지 카페 안 테이블이나 의자도 뭐 하나 똑같은 게 없었다. 하나의 거대한 쇼룸 안에서 카페 경험을 하는 느낌.

'당신을 기쁘게 하는 걸 사가세요'

그렇다고 이케아의 카페 버전 같은 건 아니다. 이곳의 컨셉은 자본주의가 아닌, 소소한 소비가 주는 행복에 가깝다. 진짜 아무것도 아닌데 웃음 짓게 하는 그런 것들. 이를테면 ‘천국에 아이스크림 없으면 나는 안 갈래’라는 테이크아웃 컵 문구처럼. 행복은 이렇게 적은 돈으로 살 수 있는 소소하고 귀여운 것이었다.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녔는데 아직 낮 12시도 안됐다. 모든 게 순조롭다. 입구 찾기가 쉽지 않다는 무료 갤러리 KOW까지 찾아갔다. 입구도, 전시도 예사롭지 않은 곳. 예술이란 무엇일까. 너무 어렵다.

예술 포기 선언

분명 아침에는 흐렸는데 낮에 구름이 점점 개니 날씨가 미쳤다. 저 멀리 얼핏 보이는 공원으로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리고 Volkspark 호수에 비친 하늘을 본 순간,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활짝 (내적) 웃음을 보였다. 역시 날씨는 단번에 사람 기분을 들었다 놨다 한다.

구름 실화?

버스커버스커의 '꽃송이가'. 개인적으로 정말 싫어하는 노래인데 자꾸 머릿속에 그 가사와 멜로디가 맴돈다. 배드민턴 치자고 꼬셔, 커피 한 잔 하자고 불러, 건대 호수 걷자고 꼬셔. 그래, 이런 풍경이라면 세상 모든 진부한 꼬심에 다 'YES'라고 대답할 준비가 되었다. 아니 그러고 보니 저기.. 여기 날씨가 자꾸 저한테 끼 부리는데요? 진짜 어이없네..ㅎ

이번 베를린에서는 서점도 열심히 찾아다녔다. 오늘 하루에만 무려 독립 서점 네 군데를 둘러봤다. Soda, Ocelot, Do you read me, Pro QM. 여행 가서는 그 도시의 서점을 꼭 가보는 편이다. 언어를 읽을 줄 몰라도, 간혹 보이는 영어랑 사진, 디자인 같은 시각적인 요소들로 지금 이 나라의 관심사와 트렌드를 엿보기 가장 좋은 곳이다.

베를린의 서점들

특히 유럽 잡지들은 이 세상 힙이 아니다. 잡지라는 전통 매체에, 전통적으로는 용납 안 될 만한 취향과 관점을 녹여낸다는 게 흥미롭다. 최근 몇 년 사이에 크게 성장한 한국 독립 매거진에도 이런 과감한 시도들이 많아졌으면.


마침 내가 머무는 나흘이 딱 '베를린 아트위크' 기간이라고 하니 미술을 즐기지 않을 수 없다. 쿤스트베르케(KW) 미술관 입장권을 샀는데 웰컴 카드 할인 안된다 해서 정가 주고 들어갔더니 전시관에 달랑 설치미술 작품 한 점뿐이었다. 설마 이게 끝인가? 나가서 물어보고 오려고 했는데 설상가상으로 스티커로 붙여준 티켓을 잃어버려 재입장을 할 수 없었다. 아직도 미스터리다. 진짜 그게 다야? 역시 나는 미술이랑은 좀 안 맞는 것 같다.

Berlin Art Week




하지만 미술관 전시 작품보다도 나를 심쿵하게 하는 게 있었으니. 지나가다 본 카피가 왜 내 맘을 흔드는 건데! 이 카피에 내가 누텔라가 되어 발릴 뻔했다. 하여튼 베를리너들 스윗한 거 알아주라..

내가 선정한 올해의 카피 (땅땅)

늦은 점심으로 유명한 베트남 음식 맛집 Monsieur Vuong에서 '쌀맥' 했다. 국물이 조금 짜긴 했지만 한국에서 먹는 쌀국수보다 훨씬 진하고 맛있다! 쌀국수에 곁들인 Berliner Berg Bantam Pils는 필스너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쌉쌀한 에일에 가까워서 쌀국수의 짠맛을 잘 중화시켜줬달까. 국수 스몰 사이즈 시킨 거 살짝 후회했다.

여기, 작은 pho에 필스너 하나요

로자 룩셈부르크 플라츠역부터 하케셔 마르크트, 알렉산더플라츠 사이에 멋진 샵들이 가득하다. 내가 이쪽 동네를 좋아하는 이유. 패션은 물론이고, 문구류, 서점, 안경, 액세서리, 차까지 다양한 물건들을 세상에서 가장 간지 나게 파는 샵들을 한 번에 쭉 구경할 수 있다.

ic! berlin - P&T - RSVP mitte
Soho Haus Berlin - Mykita - Type Hype

그리고 아트 포스터 샵 Schee. 가져가기 번거로운 포스터를 살 일은 없느니 그냥 쓱 한번 둘러보고 나오려고 했는데. 우연히 발견한 엽서 한 장에 생각이 많아졌다. 고작 엽서 주제에 나를 너무 신경 쓰이게 해서 결국 구매했고, 이 엽서를 전해줄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문제는 어떻게 전해줄 것인가였다. 남은 28일 동안 고민해 보는 걸로.

'셰'라고 읽는다고 한다

하케셔 마르크트에 있는 드럭스토어 DM에서 이번 여행 동안 쓸 샴푸, 린스, 바디워시를 샀다. 어차피 1~2유로 밖에 안 하는 싼 제품 사서 펑펑 쓰다 버릴 거지만. 괜히 향도 킁킁 맡아보고, 번역기까지 돌려가며 신중하게 골랐다. 비록 떠돌이 여행자지만, 이런 생활필수품을 살 때 잠깐이나마 내가 이곳에 사는 듯한 기분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짜 베를린에 살면 어떤 기분일까.




다시 찾은 베를린 돔. 유럽에 이보다 크고 오래된 성당 많다지만, 나는 베를린 돔이 참 좋다. 민트색 돔 지붕도 예쁘고, 뒤에 TV타워가 살짝 보이는 구도도 예쁘고, 앞에 펼쳐진 잔디밭도 평화롭다. 돔 뒤로 해 지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다, 배경으로 셀카를 예쁘게 남기고 싶었는데 실패.

어제보다는 활기찬 몽비쥬 파크

오늘 하루 동안 찍은/찍힌 TV타워 사진만 수십 장. 나는 TV타워도 참 마음에 든다. 동독 시절 방송 수신 탑으로 쓰인 탑이라 베를린 역사의 한 축인 사회주의 시절 느낌도 남아있고, 시내 어디서든 보여서 방향 이정표 역할도 해준다. 이 사진을 찍고, 왠지 느낌 있어서 엄청 마음에 들어했다. 제목도 붙여봤다. <둘이 옥상에서 뭐해?>

오늘의 베스트 컷

조용하고 깔끔하게 딱 한 잔 하고 들어가면 좋겠다 싶어 동행을 구했다. 휴가로 왔다는 조용조용한 성격의 30대 초반 언니와 함께. 슈프레 강변 바에 자리 잡고 앉아 맥주 두 잔과 커리부어스트를 먹었다. 다행히 다른 날보다는 덜 추웠어서 모두가 편하게 기대앉아 chill 하는 분위기. 조금만 일찍 덜 어두울 때 왔으면 좋았을 걸.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본 나의 베를린 최애 스팟. 다행히 오늘은 소소하게나마 댄스파티가 열렸다. 다시 봐도 자유롭고 흥겹고 아름다운 모습. 우리가 보통 고상하고 엄숙하다고 생각하는 박물관이라는 곳 바로 앞에서 이런 술판+춤판이 벌어진다는 게 참 멋있다. 이렇게 다시 예쁠 거면서 어제는 왜 그랬대? 나 잠깐 서운하게. 베를린한테 밀당당하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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