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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예전 같지 않은 거 알지?

Day1. 다시 만난 독일 베를린

by 이리터

지구 반대편으로, 그것도 30일씩이나 홀로 여행을 떠난다는 딸에게 부모님의 잔소리 폭격이 시작됐다. 영혼 없이 네네-하던 딸이 뜨끔하던 대목이 있었으니,


“너 예전 같지 않은 거 알지?”

무리하지 말고 체력관리를 잘하라는 뜻이었겠지만 어쩐지 마음에 콕 박히는 한 마디였다. 실제로 얼마 전 교토 여행 때 '예전 같지 않음'을 몸소 깨달은 나였다. 예전만큼 쉽게 감동받지 못하고, 대신 쉽게 지친 여행으로 기억에 남았다.




하필 베를린이었다. 2년 3개월 전의 그 충격을 잊지 못하고, 이곳이 나의 운명이자 인생 도시라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혼자 의미 찾는 걸 좋아해 2년 전 그때와 같은 비행 편으로 도착해, 같은 버스를 타고, 바로 옆 건물 숙소에, 그때 봤던 야경을 보고 그때 먹은 샌드위치를 저녁으로 때우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헬싱키에 도착했을 때부터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 준비해온 유심이 작동 안 되는 상황이라 2시간 내내 붙잡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비행기도 지연됐다.


그래도 간다. 그렇게 바라던 베를린으로. 몰타 밴드 Airport Impressions의 ‘Berlin’. 이 노래는 사람을 설레게 하는 힘이 있다.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착륙하는 비행기 안에서 이런 뷰를 찍을 정도였다니, 느껴지지 않는가, 이 도시에 대한 나의 애정이 얼마나 대단한지.

테겔 공항 착륙 직전

테겔 공항의 효율성은 오늘도 새삼 문화충격이다. 말 그대로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짐 찾기, 짐 찾고 나오자마자 터미널 출구. 조금도 낭비하는 공간 없이, 이용객 입장에서는 조금도 낭비하는 시간 없이. 그야말로 합리성을 추구하는 독일의 국민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방금 내린 비행기 앞에서 짐을 기다리는 중




역시나 쉽지 않았다. 자신 있게 3 days 웰컴 카드를 샀으나 교통권을 1일권씩 따로 샀으면 더 쌌을 거라는 걸 나중에 깨달았다. 막히는 퇴근길에 트램을 막 놓쳐 한참을 기다렸고, 자신 있게 내렸으나 알고 보니 두 정거장은 더 가야 했다. 낑낑 대며 체크인을 했더니 6인 도미토리 침대 중 입구에 가장 시끄럽고 어두운 자리의 2층 침대 낙점. (심지어 아래 침대 아줌마가 코를 심하게 골아 온 침대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해가 더 지기 전에 슈프레 강변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런 노을을 길거리에서만 보고 있기 아까웠다.

30분만 일찍 도착했어도 더 예쁜 하늘 보는 건데

그리고 드디어 슈프레 강변, 2년 전 나에게 문화 충격을 선사했던, 세상에 라라랜드가 있다면 여기일까 싶었던, 아름다운 그곳...!

왜 아무도 없어요...

...은 텅텅 빈 회색 강변! 아 진짜 예전 같지 않다. Strandbar Mitte에는 단 한 커플만 춤추고 있었고, 전체적으로 사람도 없고 칙칙했다. 버려진 공원 같았달까. 이내 해가 졌고, 베를린 돔까지 가기도 전에 전의를 상실했다.


베를린 올 일이 있다면 반드시 6월에 오라고 말해주고 싶다. 여름엔 해가 길어서 밤 10시가 돼도 밝고, 덕분에 사람들도 밝아 보이고 분위기가 좋다. 이번에는 뭐 새로운 곳에 왔다는 설렘도 없고. 전에는 문 닫아서 못 가봤던 서점 Walther König(발터 쾨니히)만이 새로웠다.

예술 전문 서점 Walther König




인천에서 헬싱키로 올 때 먹은 기내식이 전부였으니, 배가 고플만했다. 지난번 여행 첫날 저녁으로 먹었던 샌드위치 맛집 mogg에 가서 15분 기다렸으나, 마감 전까지 자리가 안 날 것 같다 해서 결국 포기했다. 합석할 용기는 없었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그냥 보이는 큰 레스토랑에 무작정 들어가 알리오 올리오와 베를리너 킨들을 주문했다. 역시 맥주 갖고 장난 안 치는 나라답다. 맥주가 크고 멋지고 잘생겼다. 하지만 파스타는 그저 배를 채우기 위한 용일 뿐이었다. 알리오 올리오를 맛없게 하기도 힘든데 말이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맥주잔만 비웠다.

웬만한 트로피보다 크고 빛나던


그렇게 기대했건만, 다소 허무하게 끝나버린 첫째 날 저녁. 아, 정말 예전 같지 않다. 나 이번 여행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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