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펜던트 워커 실험기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나는 사실 부럽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 잘 모르면서 겉으로 보이는 것만 보고 부럽다고 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래서 부럽다는 생각이 들면 최대한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대신 무엇이 부러운지 메모를 했다. 최근 메모장을 정리하는데 내가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하고 싶은 걸 하고 산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적성을 찾아 운동하는 국가대표 선수. 그림이 좋아서 그림 그리는 일을 하는 친구까지.
한 번은 강사 미팅을 하러 간 적이 있다. 본격적인 내용을 나누기 전에 분위기를 풀려고 가벼운 대화를 먼저 나눴다. 그러다 업무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강사님의 표정이 싹 바뀌는 걸 보았다. 반짝거리는 눈으로 제안하는 그 표정이 너무 예뻐 보여 부러웠다. 나도 저런 표정으로 하는 일을 찾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근래 나에게도 그런 표정이 있었음을 깨닫게 해 준 사건이 있었다. 퇴사하기 전에 인수인계 겸 기획 미팅에 참여했었다. 내가 생각한 아이디어를 마구 쏟아내다가 문득 팀장님의 얼굴을 봤는데, 그때의 나와 같은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계셨다. 이 일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싶은 표정으로.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나는 기획하고 제작하는 일을 할 때 반짝거리는 표정을 짓는다는 것을.
이 일이 아니었다면 못 버텼을 것이다
나는 휴학생일 때 인턴으로 입사했었다. 계약직을 거쳐 정규직 사원이 될 때까지 친구 중 회사원은 나 혼자였다. 메일 쓰는 기초적인 것부터 시작해 섭외 방법, 미팅 방식, 계약 서류 작성 전부 혼자 깨우쳐야 했다. 나에게 회사 다니는 친언니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몇 번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하나하나 직장 선배에게 물어보기엔 타이밍도, 내용도 생각해봐야 할 게 많았으니까. 지금은 그런 시간이 언젠간 필요했던 과정이라 생각하지만, 당시엔 괴롭고 힘들어 도망치고만 싶었다. 나랑 안 맞는 업무인 건 아닐까 늘 고민했었다. 일을 즐기기보단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회사를 3년 9개월을 다녔다. 지금은 PD가 아니었다면 대리를 달 때까지 못 다녔을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내가 만약 회계사였다면, 개발자였다면 아마 금방 그만뒀을 것이다. 나는 나랑 안 맞는 건 죽어도 못 하는 성격이니까. 첫 회사이니 힘든 건 당연했다. 그래도 좋아하는 일이었으니 계속 다닐 수 있었다.
PD에 대한 갈망은 계속됐다
PD로 입사해서 3년간 일하다가, 올해부턴 PL로 일을 시작했다. 주로 브랜딩과 온·오프라인 강좌 기획을 했다. 기획한다는 업무의 결을 비슷했기에 나쁘지 않았지만 자꾸만 PD 일이 그리웠다. PD였을 땐 내 아이디어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는데, PL일 땐 강사의 아이디어가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일반 콘텐츠가 아닌 강좌이다 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디어를 자꾸 조율해야 하다 보니 업무가 지루하다고 느껴졌다. 악어는 땅에서도 걸을 수 있지만, 물에서 더 빠르고 멋지게 헤엄치지 않는가. PD일 땐 내가 물에서 노는 악어 같았는데 PL이 되니 땅에서 기어 다니는 악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이긴 했지만 나에게 더 어울리는 일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큐멘터리를 보고 다시 PD가 되리라 결심하다
KBS 다큐 인사이트 '국가대표'편에 대한 반응이 좋길래 궁금한 마음에 재방송을 챙겨봤다. 자정이 다 되어 가는 늦은 시간이었는데, 사실 나는 그 시간에 TV 잘 보지 않는다. 가족들이랑 다 같이 사는데 거실에서 TV를 보면 혹여나 피해가 갈까 싶어서 말이다. 그런데 다큐 인사이트는 음량을 1로 해놓고서라도 보고 싶은 마음에 챙겨봤다. 훌륭한 실력을 갖춘 국가대표 선수가 성별을 이유로 차별 대우를 받고 있다는 메시지의 다큐멘터리였는데, 스토리텔링 방식도 영상미도 좋았다. 선수들은 전부 같은 크기의 태극마크를 달고 있다는 마무리도 인상적이었다. 영상을 보는 내내 연신 좋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속으론 한 가지 생각을 했다.
'나도 저런 영상 만들고 싶다!'
나는 내 아이디어로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
나는 계속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해야 할 말을 하는 / 감동을 주는 / 유익한 / 때론 쉼이 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고. 나 스스로가 깨닫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요즘 묵혀두었던 원고를 다듬어 브런치에도 올린다. 다이어트 강박을 조성하는 분위기가 사라져야 한다는 누군가가 해야 할 말을 해보고 싶어서. 다이어트 강박으로 힘든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공감과 위로를 건네고 싶어서다. 그런데 자꾸만 욕심이 든다. 나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플랫폼, 채널에서 더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런데 하고 싶은 일을 발견한다고 끝이 아니었다. 어떻게 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내가 알아본 바 (취업 사이트 내에서) PD는 광고 / 가벼운 예능 / 철저히 교과 중심으로 분야가 나뉘었다. 다양한 콘텐츠를 넘나들며 만든다면 방송국도 있겠지만, 내 학벌로 공채는 무리였다. 프리랜서 PD는 만들어진 프로그램에 보조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고 기획보단 편집 업무가 위주인 것 같아 나와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요즘 나의 가장 큰 고민거리 중 하나이다. 하고 싶은 일을 어떻게 하면 할 수 있을 것인지. 이제 시작 단계에 들어섰고 갈 길이 멀지만 벌써 즐겁다. 원래 게임도 이제 막 시작했을 때가 가장 즐거운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