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효 Oct 19. 2021

그렇게 또 살아가게 된다


브런치에 글을 안 쓴 지 벌써 두 달이 되었다. 두 달간,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1

엄마가 아팠었다. 처음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땐 청천벽력이었다. 엄마 앞에선 아무렇지 않은 척 애썼지만 뒤로는 눈물을 삼켰다. 적어도 가장 놀랐을, 가장 힘든 시기일 당사자 앞에선 울고 싶지 않았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자식으로서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한낱 자존심에 불과했던 것 같다. 엄마를 생각했더라면 우리 둘 다 펑펑 울지언정 서로 껴안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12시간의 긴 수술을 무사히 견뎠고,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입원해있었다. 입원했던 나날들도 엄마에겐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엄마는 해냈다. 의사도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회복하며 퇴원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굳세게 견딘 엄마였지만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통화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저렸다. 엄마도 그저 어린 막내딸에 불과했다. 엄마와 아빠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단단히 지켜온 딸의 껍데기가 녹아내리는 순간이었다.



#2

엄마가 퇴원만 하면 모든 게 좋아질 줄 알았건만, 야속하게도 그렇지 않았다. 나는 쉽게 회복이 되지 않았다. 독립적으로 일하는 것은 내 생각보다 더 쉽게 풀리지 않아 불안했고 갑작스레 찾아온 간병 생활은 나를 더 무너뜨렸다. 나는 그렇게 두 번째 우울증을 맞이했다. 매일같이 외출하던 내가 단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카페에 가서 커피라도 사 오자 다짐해도 힘에 겨워 그만둘 정도였다. 매일, 매 순간 죽을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병원에 다시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럴 힘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보낸 후 겨우 병원에 갔다. 예약을 하고 가야 했었는데, 충동적으로 간 거라 그럴 생각조차 못하고 갔었다. 역시나 병원엔 사람이 북적였고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나는 그냥 밖을 나와버렸다. 그러고 복도를 걸어가다 냅다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선생님이 곧 나를 찾아 나오셨다. 사람이 많아 늦게 나와서 미안하다면서. 나는 그저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고, 선생님과 함께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병원에 다시 다닌지는 한 달 정도 된 것 같다. 지금은 그때가 아득할 정도로 상태가 좋아졌다. 선생님도 고비를 넘긴 것 같다고 하신다.



#3

요즘엔 취업 준비를 하고 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내가 독립적으로 일하기엔 경험이 부족하다고 느껴서다. 퇴사 후 브런치와 유튜브에 나의 콘텐츠를 업로드하는 일이 즐겁긴 했다. 조금씩 쌓여가는 리스트와 늘어가는 팔로워를 보는 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하지만 다른 인디펜던트 워커들을 보며 내가 다른 기업이나 프로젝트와 협업할 정도는 아님을 뼈저리게 느꼈다. 한 회사에서만 근무했던 나는 프로젝트의 다양성도, 인맥도 부족했다. 첫 번째 회사보다 더 큰 규모에서 일하며 경험과 인맥을 쌓을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또한 가족을 지키기 위해선 안정적인 경제력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아빠의 회사가 아니었다면 엄마의 병원비와 반려견 둥이의 치료비는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아빠가 정말로 사회생활을 마무리하게 된다면 나의 몫인 일들이었다. 나는 내 가족이 아플 때 눈치 보게 만드는 사람이고 싶지 않았다. '걱정하지 말고 치료에 신경 쓰자.'라고 근거 있는 한 마디를 하는 가족이고 싶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오징어 게임을 보고 이 생각은 더욱 견고해졌다.


취업 준비는 역시나 쉽지 않다. 기업에 맞춰 자기소개서를 수정해야 하는 것은 물론, 직무에 따라 포트폴리오도 전면 수정해야 한다. 열심히 쓴 서류가 탈락할 땐 씁쓸하기 그지없지만 어쩌겠는가. 슬퍼할 시간에 자소서 한 줄이라도 더 쓰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4

살면서 또 어떤 풍파가 닥칠지 모르겠다. 그때 되면 나는 또 쓰러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에겐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위로할 글이 있고, 이젠 든든한 병원과 의사까지 있다. 다시 침대에서 힘 없이 누울 일이 생긴다 할지라도 나를 좀 기다려주면 된다. 무기력이 무서운 건 언제 끝날 지 모른다는 거였다. 무기력을 겪었던 내가 증언컨대, 반드시 끝나게 되어 있다. 그저 방전된 나를 기다려주면 된다. 두 번째 우울증을 맞았을 무렵, 첫 번째 우울증일 당시 썼던 글을 얼마나 들여다봤는지 모른다. 부끄럽지만 이 글이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까 싶어 옮겨 적어본다.



물러 터진 과일은 단단해질 수 없다. 그래서 버려진다. 가치가 없으니까. 그 당연한 순리를 물러 터진 과일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물러 터진 과일을   있다고 고집을 부리는 이가 있다. 이곳저곳   있는 곳이 많겠다며 자꾸 들춰본다. 단단하고 속도   과일이 많은데, 굳이? 그가 무슨 생각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물러 터진 과일버려지지 않았고, 공장으로 보내졌다.


공장은 삭막했다. 사람이 있으나 사람이 없는 것 같았고, 색깔이 있으나 색깔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물러 터진 과일을 받아준 곳이다. 겉보기엔 별로여도 꽤 좋은 곳일지 모른다.


물러 터진 과일은 다른 과일들과 섞였다. 누가 봐도 탐스럽게 생긴 과일, 모양은 약간 달라도 흠집이 없는 과일, 겉보기엔 물러 보여도 속은 단단한 과일들이었다. 그런 과일들과 같이 있게 되자 물러 터진 과일은 자신도 보통의 과일이 된 것 같았다.


다른 과일들은 물러 터진 과일이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그간 본 적 없는 과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과일들은 물러 터진 과일이 짜증 났다. 무른 부분이 자신에게 묻을까 봐 거슬렸고, 같이 있는 내내 신경 쓰다 보니 피곤했다. 이제 과일들은 물러 터진 과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물러 터진 과일도 그걸 안다.


물러 터진 과일은 자신이 싫다. 과일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싫고, 보통의 과일이 아닌 것도 싫다.


자신을 버리지 않고 쓸 수 있다 말한 그가 생각난다. 그가 원망스럽다. 애초에 버려졌더라면 겪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그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왜 물러 터진 과일을 선택했을까? 아무도 그걸 알 수 없다.



나는 물러 터진 과일이었고, '그'는 나를 세상에 보낸 누군가였다. 그렇게 '그'를 원망하던 내가 시간이 흐른 후엔 이런 글을 썼다.




그러니 우리 다들 살아가 보자. 지금 힘든 일을 나중엔 허허 웃으며 말할 날이 오길 바라며. 나는 요즘 강민경 영상 끝으로 나오는 노래가 그리 위로가 된다. 여러분에게도 작은 위로가 되길 바라며!





이상 두 달 간의 기록 끝!

작가의 이전글 나 다시 PD 하고 싶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