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10일. D-24
놈을 마주할 때마다 뜨거운 피가 들끓는다. 더는 견디기 힘들다. 어쩌면 저렇게 뻔뻔한 얼굴을 하고 있을까? 타인을 고통스럽게 만든 적 따위는 단 한 번도 없다는 투다. 놈이 견딜 수 없는 고통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수백 번 상상한다. 치켜뜬 눈의 흰자엔 벌건 핏줄이 서고, 떡 벌린 입에서는 더러운 타액이 줄줄 흐르고, 살이 찢기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추하게 일그러진 놈의 얼굴을 하루빨리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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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5일. 남부 경찰서.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내리자 차가운 바람이 김 변호사를 맞이했다. 더운 히터 바람이 답답한 참이었던 김 변호사는 문을 열자 들이닥친 찬 기운이 몹시 반가웠지만 곧 뼈가 시릴 정도의 한기를 느끼고 경찰서 건물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유치장 관리부에 도착한 김 변호사는 창구 앞에서 유치인 접견 신청서를 작성했다. 익숙한 솜씨로 신청서를 제출한 김 변호사는 낡은 나무 벤치에 앉아 다음 안내를 기다리며 사건 경위를 되짚었다.
2024년 2월 3일 밤 11시. 동네에서 청과물 가게를 운영하는 이진영은 가게 문을 닫기 위해 점포 앞에 내놓은 상품들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때 건너편에서 정육점을 운영하던 박정호가 이진영의 눈앞에 나타난다. 갑자기 나타난 박정호는 다짜고짜 욕설을 하는 것도 모자라 이진영의 몸을 거칠게 밀치며 위협했다. 잔뜩 겁먹은 이진영은 청과물 가게 옆에 난 골목으로 도망쳤고 박정호는 그 뒤를 계속 쫓았다. 도망치던 이진영은 결국 막다른 골목에 몰렸고 박정호는 그가 구석에 몰리자 품에서 칼을 꺼내 달려들었다. 둘은 이후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다. 이진영은 자신의 심장을 노리는 박정호의 칼끝을 여러 차례 막았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그의 공격에 결국 칼을 쥔 박정호의 손을 잡아 그의 목을 찌르고야 만다. 쓰러진 박정호를 보고 황급히 가게로 돌아온 이진영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찾아 급히 119에 신고하지만, 경동맥을 찔려 버린 박정호는 차가운 길바닥에 누워 그대로 쇼크사했다. 이진영은 곧이어 출동한 경찰에게 자신이 박정호를 죽였다고 자백했고, 경찰은 그 자리에서 이진영을 긴급체포했다. 이상이 현재 피의자 신분인 이진영이 진술한 사건 경위다.
이진영의 진술을 뒷받침할 만한 정황 증거는 여럿 있었다.
먼저 청과물 가게 앞에 설치한 CCTV에 당시 상황이 고스란히 찍혔다. 가게 앞 상품들을 정리하던 이진영 앞에 갑자기 박정호가 나타났고, 성난 얼굴로 뭐라 소리치던 박정호는 이진영의 몸을 연신 밀치더니 곧 때리려는 시늉까지 했다. 겁먹은 이진영은 급히 앵글 밖으로 도망쳤고 박정호는 그 뒤를 쫓아 달렸다.
인근 주민들의 증언도 다수 있었다. 그들은 언젠가는 일어날 법한 사건이었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청과물 가게를 운영하는 이진영은 자신의 가게에 소량의 정육 제품도 들여와 팔았는데 품질이 괜찮은 데다가 할인율도 높아 꽤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많은 동네 주민이 이진영의 가게에서 정육 제품을 구입하자 전부터 그 맞은편에서 정육점을 운영하던 박정호는 자신의 손님들을 빼앗겼다고 생각했는지 이진영을 찾아가 폭언을 퍼붓고 난동을 부린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고 한다.
김 변호사는 자신을 안내하는 유치장 직원의 뒤를 따르며 이번 사건에서 주요 쟁점이 될 형법 조문을 떠올렸다.
형법 제21조 정당방위.
그 1항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현재의 부당한 침해로부터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法益)을 방위하기 위하여 한 행위는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벌하지 아니한다.’
자신의 법익을 침해한 박정호로부터 자신을 방위하기 위해 행동한 이진영의 행위는 얼핏 정당방위의 요건에 해당하는 듯 보이나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심지어 그 방위 행위의 결과가 살인에까지 이르렀다. 쉽지 않은 의뢰다.
안내 직원을 따라 두 평 남짓한 접견실로 들어간 김 변호사는 녹이 슬어 파래진 철창 너머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이진영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사진보다 더 앳돼 보이는 인상에 김 변호사는 그의 인적 사항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 이진영. 스물아홉. 미혼 …
눈앞에 앉은 넋 나간 남자는 자신과 고작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젊은 남자였다. 그 앞에 마주 앉은 김 변호사가 자신을 먼저 소개했다.
“저는 김재환이라고 합니다. 동생분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누님이신 이진경 님께서 절 선임하셨어요.”
“…네.”
가까스로 대답한 이진영은 김 변호사와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이내 애꿎은 바닥만 응시했다. 김 변호사는 이진영이 만나자마자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줄줄이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눈앞의 청년은 큰 충격을 받았는지 억울함을 호소하기는커녕 입조차 뗄 얼굴이 아니었다. 결국 김 변호사가 또 먼저 입을 뗐다.
“영장이 발부돼서 곧 구치소로 이감되실 거예요. 사실 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진영 씨가 경찰에 자백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쉬운 상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볼 때는 정당방위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니까요.”
“….”
“무엇보다 중요한 게 당시 상황입니다. 정리해 볼게요. 도망치던 이진영 씨가 막다른 길에 몰리니까 박정호가 품에서 칼을 꺼내 이진영 씨 심장을 찌르려고 했고, 이진영 씨가 그 손을 붙잡고 힘싸움을 벌이다가 어쩔 수 없이 박정호 씨 목을 찌르게 된 거죠? 고의가 아닌, 우발적인 사고로요.”
김 변호사의 적극적인 태도 앞에서도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던 이진영이 겨우 입을 뗐다.
“… 박 사장님한테 아들이 있어요.”
“…네?”
“…일곱 살인가, 그래요. 아빠가 죽었는데, 걔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요?”
죽은 박정호에게는 유치원을 다니는 어린 아들이 있었다. 김 변호사는 갑자기 다른 소리를 꺼내는 이진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변호사님. 저 처벌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당시 상황이 어쩔 수 없었든 어쨌든 제가 사람을 죽였잖아요. 네. 맞아요. 변호사님 말대로 제가 박 사장님 목을 찔렀어요. 그때 어떻게든 도망치고 피했어야 했는데, 저도 어쩌면 속으로는 박 사장님을 죽이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수습을 끝내고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 지 비록 채 일 년도 안 됐지만 김 변호사는 나름대로 여러 의뢰인을 접했다. 그중에는 사람을 죽이고도 두 다리 쭉 뻗고 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실수로 남의 몸에 생채기를 내놓고도 죄책감에 잠 못 이루는 사람도 있었다. 김 변호사는 이진영이 후자 쪽 부류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번엔 작은 상처를 낸 정도가 아니다. 사람이 죽었다.
김 변호사가 이진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진영 씨. 저는 이진영 씨 변호인입니다. 진영 씨를 처벌받지 않도록 하는 게 제 역할이에요. 곧 그렇게 될 거고요.”
김 변호사는 불안한 심리를 보이는 피고인을 진정시키기 위해 일부러 더 힘주어 말했지만 속으로는 초짜인 자신이 이런 어려운 사건을 맡아도 되는지 그 역시 불안한 건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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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18일. D-16
놈을 죽이는 데에 한 치의 두려움도 없다. 도리어 그 뻔뻔한 얼굴을 계속 마주해야 하는 게 훨씬 더 두렵다. 다만, 내가 여전히 망설이는 이유는 단 하나. 하나뿐인 나의 사랑하는 아들 때문이다. 내가 놈을 죽이고 철창신세가 되면 내 아들은 아비도 없이 자라게 된다. 내가 놈을 죽이는 데 실패하고 죽는다 해도 마찬가지다. 내 아들은 범죄자의 자식이라는 꼬리표가 달린 채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그것만큼은, 그것만큼은 정말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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