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1일. 서부 구치소.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버릴 기세로 하얀 눈이 펑펑 쏟아졌다. 김 변호사는 구치소로 이감된 피고인을 접견하기 위해 아침부터 눈 덮인 도로를 내달렸다. 수임한 사건이 많지 않기도 했고 발 빠르게 자신을 선임한 의뢰인에게 보답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다소 특별한 이 사건 자체에 흥미가 돋았다.
누군가가 나를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고 칼로 죽이려 든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행동할까? 흥분한 상대에게 진정하라고, 정신 차리라고 말로 설득할까? 어떻게든 내 몸을 지키는 정도로만 힘을 쓰는 데 집중할까?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 나는 그렇게 선 넘지 않는 반응만 할 수 있을까? 앞 유리에 득달같이 달려드는 눈을 보며 김 변호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김 변호사와 두 번째로 마주 앉은 이진영은 그사이 꽤 정신을 차린 듯했다. 축 처진 모습만 보여주었던 첫 만남 때와는 달리 앞으로의 재판 진행 과정을 묻거나 김 변호사의 이력을 궁금해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가장 달라진 건 자신을 적극적으로 변호하는 점이었다.
“정육을 싸게 판 건 손님을 끌어들이려는 수단이었어요. 마진 남길 생각이 없다 보니까 당연히 일반 정육 제품보다는 훨씬 싸게 팔 수 있었죠. 잠깐만 하고 말겠다는 게 반응이 좋아서 계속하다가….”
“그날도 마찬가지 문제로 박정호가 따지러 온 건가요?”
“네. 처음에는 저도 그저 그런 날이구나 싶었어요. 욕 한 바가지 먹고 어쩌면 한 대 맞겠구나. 그런데 절 죽이려고까지 할 줄은….”
“진영 씨가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죽은 박정호는 전과가 있습니다.”
“네? 전과요?”
“네. 박정호는 폭행치사로 사람을 죽인 적이 있습니다.”
김 변호사의 말에 이진영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7년 전에 술에 취한 박정호가 길거리에서 마주친 행인을 무차별 폭행한 적이 있습니다. 어깨가 부딪혔다는 이유로요. 특히 머리 쪽에 큰 충격을 받은 피해자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연명했지만 얼마 못 가 사망했습니다.”
“….”
“지금이야 가중처벌을 받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이 법적인 감경 사유라서 형량이 되레 줄었어요. 박정호는 폭행치사로 7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작년 8월에 출소했고요. 그러니까, 사건 당시 박정호는 감옥에서 출소한 지 반년도 채 안 된 상태였던 거죠.”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얼어있는 이진영을 향해 김 변호사가 말을 이었다.
“박정호의 전과가 판결에 큰 영향을 끼치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그게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에요. 진영 씨의 행위가 정당방위로 인정되려면 무엇보다 상당성이라는 게 중요한데 그게….”
김 변호사가 어렵다는 듯 말끝을 흐리자 이진영이 틈을 타 물었다.
“…상당성이요?”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진영 씨가 박정호를 칼로 찌를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당시 상황이 위중했다는 걸 증명해야 합니다.”
“아, 가게 앞 CCTV 영상이 있어요! 정말 천만다행이죠. 영상 다 보셨죠? 거기 보시면 박정호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알 수 있어요. 갑자기 나타나서….”
흥분한 이진영의 말을 김 변호사가 어렵게 잘랐다.
“전후 상황이 아니라, 사건이 벌어진 그 당시 상황이 찍힌 영상이 필요해요. 그걸로는 부족합니다.”
김 변호사의 말에 이진영의 얼굴에 실망한 빛이 역력했다.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그 앳된 얼굴은 그새 많이 늙어 있었다.
면회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던 김 변호사는 대기실에서 자신을 선임했던 피고인의 누나를 발견했다. 그녀는 면회 대기석에 앉아 있었는데 옆에는 그녀의 아들이자 피고인의 조카로 보이는 한 아이가 붙어있었다. 근심이 가득하기로는 아이의 얼굴도 엄마 못지않아 보였다. 그들을 아는 체하려던 김 변호사는 자신이 빠져나가야 할 동선이 그 둘이 있는 위치와 멀리 떨어져 있어 그대로 구치소를 빠져나왔다. 아직 그녀에게 전할 만한 기쁜 소식이 없는 게 미안하기도 했다. 근심 가득한 그들의 얼굴을 보자 김 변호사는 피고인이 억울한 일이 없도록 성심성의껏 사건을 맡아야겠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역시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건이 벌어진 그 순간의 영상이 간절했다.
***
2024년 1월 25일. D-9
무엇보다 CCTV를 피하는 게 중요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모든 CCTV에 걸리지 않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살인을 저지르는 순간의 CCTV만큼은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역시 청과물 가게 옆으로 난 외진 골목이 최적의 장소다. 인적도 드물고 CCTV도 없다.
.
.
.
.
***
2024년 2월 20일. 법무법인 비원.
천운이다. 경찰이 사건 당시의 상황이 찍힌 영상을 입수했다. 사건이 벌어진 그 막다른 골목 근처에는 타지 생활을 하다가 주말에만 집에 내려오는 한 노교수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집에 올 때마다 사건이 벌어진 그 골목 근처에 차를 세워두곤 했다. 집 근처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졌고, 그 때문에 곤란한 처지에 놓인 사람이 자신이 평소 기특하게 여겼던 청과물 가게의 젊은 사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차에 달린 블랙박스 영상을 확인했다. 다행스럽게도 상시 녹화 중이었던 블랙박스에 당시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다만 너무 먼 거리에서 찍힌 데다 광량도 충분하지 않은 탓에 그 상황이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김재환 변호사는 스페이스 바를 눌러 입수한 영상을 재생했다.
막다른 골목에 이진영이 나타났다. 길이 막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진영에게 곧 한 남자가 거칠게 달려들었다. 박정호였다. 엉겨 붙은 두 남자는 몸싸움을 벌였다. 얼마 안 가 박정호의 힘에 밀린 이진영이 바닥에 쓰러졌다. 박정호가 단숨에 쓰러진 이진영의 몸 위로 올라앉았다. 카메라가 비추는 각도상 박정호의 등만 보여 이후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는 명확히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갑자기 박정호가 옆으로 픽 하고 쓰러졌다. 벌떡 일어나 쓰러진 박정호의 상태를 잠시 살펴보던 이진영이 어디론가 허겁지겁 달려가며 화면에서 사라졌다. 이후 이진영은 자신의 가게로 달려가 스마트폰을 찾아 119에 신고한 것으로 보인다.
저 때 박정호는 경동맥을 찔렸다. 경동맥이 끊기면 뇌로 가는 혈류가 급격히 줄어들어 대게는 얼마 못 가 사망한다. 이진영의 입장에서는 운이 없었다. 아니, 박정호가 계속 자신을 죽이려고 했을 테니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뒤늦게 발견된 영상은 너무 먼 거리에서 찍힌 데다 어두웠지만, 적어도 박정호가 이진영을 위협하고 달려드는 모습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피고인이 정당방위를 주장하는 데에 분명 큰 도움이 될 만한 증거다.
“흉기가 안 보이잖아.”
옆에서 함께 영상을 보던 유 변호사가 안도하던 김 변호사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김 변호사는 조언을 구하기 위해 같은 법인 소속이자 검사 출신인 유 변호사에게 함께 영상을 보아 달라고 부탁했다. 유 변호사가 이어 말했다.
“흉기가 죽은 피해자 거라는 증거는 나왔어?”
“아니요.”
“피해자가 칼 들고 있는 모습이 찍힌 영상은?”
“그런 영상은 없어요. 하지만 이 영상을 보면 피해자가 피고인을 위협하는 건 분명히 확인되니까….”
반론하던 김 변호사는 어딘가 찝찝한 느낌이 들어 말끝을 흐렸다.
“피고인은 뭐래? 상대가 언제부터 흉기를 들고 쫓아왔대?”
“피고인도 정신없이 도망치느라 그건 잘 모르겠다고 해요. 저 골목에서 피해자가 자기 몸 위에 올라탔을 때 품에서 칼을 꺼낸 거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결국 빈틈인 거야.”
“빈틈이요?”
“봐봐. 이 영상을 봐도 처음에 누구 손에 칼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잖아.”
김 변호사는 거기까지 듣고 유 변호사가 말하려는 게 무엇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유 변호사가 다소 과장된 톤으로 말을 이었다.
“평소에도 피해자에게 위협을 느끼고 있던 피고인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 대비해 늘 칼을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위급한 상황이 닥치자 피고인 이진영은 자신의 품에서 그 칼을 꺼내 박정호 씨의 목을 찔렀습니다…라고, 내가 검사라면 주장할 거란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