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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이 시작될 때 막 떠오르던 둥근 해는 어느새 어둠에 반쯤 가려진 달로 바뀌어 있었다. 막 재판이 끝난 법정 앞 복도에 선 김 변호사는 반쯤 열린 창문 사이로 쏟아지는 훈훈한 봄바람을 맞았다. 항상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그 바람이 김 변호사는 오늘따라 새삼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돌아보니 이진영의 누나인 이진경이 아이와 함께 나란히 서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거듭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변호사님. 감사해요!”
“아닙니다. 저야말로 감사해요. 저 같은 초짜를 믿어주셔서. 동생분은 절차만 마치면 오늘 바로 석방되실 거예요.”
“그럼, 혹시 재판은 이걸로 끝일까요?”
“말씀드리기 조심스럽긴 하지만, 아마 항소해도 결과는 똑같을 겁니다.”
이번 사건이 어려웠던 점은 피고인의 방어 행위가 무려 살인이라는 결과에까지 이르렀다는 점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에 상당한 위협을 받았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는 증거들이 여럿 나왔다. 김 변호사는 설령 항소를 한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의 무죄가 뒤집히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뻐하던 진경이 갑자기 몹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변호사님, 마지막에 그 약도요. 박정호 집에서 직접 찾으셨다고 했는데,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아, 실은 전에 현장에 들렀다가 박정호 씨 가족이 집 밖에 쓰레기 더미를 내놓는 걸 봤어요. 별생각 없이 그중에 아이가 버린 스케치북을 넘겨보는데, 그 맨 뒷장에 사건 현장이 그려진 약도가 나오는 거예요.”
진경이 감탄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변호사님. 변호사님 덕분에 동생이 살았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눈물까지 글썽이던 진경이 옆에 서 있던 아이에게 재촉했다.
“정우도 아저씨한테 아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해야지.”
아빠? 아빠라고?
“… 방금 아빠라고 하셨나요? 이 아이 이진영 씨 조카 아니었어요?”
진경이 웃으며 말했다.
“아, 정우가 제 아들인 줄 아셨구나. 얘는 제 동생 아들이에요.”
“… 진영 씨가 결혼을 하셨나요? 기록이 없는데….”
“그게, 혼인신고도 하기 전에 애 엄마가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서 법적으로는 아무 기록이 없어요. 어휴, 진영이가 여태껏 저 혼자 키운다고….”
말하다 감정이 오르는 듯 진경이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궁금해 사정을 더 물으려던 찰나, 김 변호사는 막 법정을 빠져나오는 이진영과 눈을 마주쳤다. 처음 만난 이후로 내내 굳은 표정이었던 이진영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자신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순간, 김 변호사는 그 미소가 어딘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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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2.
성공이다! 정당방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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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일. D-1
드디어 바로 내일이다. 내일 나는 놈을 죽인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점검하자. 모든 준비가 완벽한가? 아, 살인 계획이 담긴 이 문서도 처리해야 한다. 그래. 그렇다면 이제 모든 게 완벽하다!
사건이 벌어진 후, 놈이 나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고 볼만한 증거가 하나둘씩 발견될 것이다. 범행 현장이 그려진 약도도 나오면 좋을 텐데. 언젠가 가게 앞을 지나가는 놈의 아들에게 귀엽다며 학용품 세트를 선물로 줬다. 그중 하나인 스케치북 뒷면에 사전에 살인을 계획한 듯 한 약도를 그려 넣어두었다. 이것까지 발견되면 더더욱 놈이 나를 계획적으로 살해하려 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2024년 1월 27일. D-7
흉기는 이미 준비했다. 독일제 비셀 칼 세트. 육류의 뼈에 붙어있는 살을 떼어낼 때 주로 쓰는 칼인데, 그중에 4호가 가장 적당하다. 가벼운 데다 날이 가늘고 뾰족해 놈의 목숨을 끊기에 딱 알맞다.
청과물 가게를 열고 오픈 기념행사를 했을 때 그놈에게 경품에 당첨됐다고 하면서 비셀 칼 세트를 주었다. 물론 내가 쓸 4호 칼은 빼뒀다. 당시 경품을 받고 좋아하던 놈의 표정이 선하다. 그래. 잘 가지고 있어라. 그래야 너의 목숨을 빼앗은 그 칼이 네 것이라는 증거가 될 테니까.
2024년 1월 25일. D-9
무엇보다 CCTV를 피하는 게 중요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모든 CCTV에 걸리지 않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살인을 저지르는 순간의 CCTV만큼은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역시 청과물 가게 옆으로 난 외진 골목이 최적의 장소다. 인적도 드물고 CCTV도 없다.
그렇다고 아예 영상이 없어도 곤란하다. 적어도 그놈이 나를 위협하는 것만큼은 확인할 수 있는 정도의 영상은 필요하다. 주말마다 내려와 과일을 사 가는 박 교수는 꼭 차를 그 좁은 골목에 세워둔다. 기기에 불이 꾸준히 깜빡이는 걸로 보아 상시 녹화되는 블랙박스인 듯하다. 그 정도 거리에서 찍힌 영상 정도면 딱 적당하다. 녀석을 약 올려서 막다른 골목까지 날 쫓아오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 놈이 나를 향해 달려드는 정도의 모습만 찍히면 성공이다.
2024년 1월 18일. D-16
놈을 죽이는 데에 한 치의 두려움도 없다. 도리어 그 뻔뻔한 얼굴을 계속 마주해야 하는 게 훨씬 더 두렵다. 다만, 내가 여전히 망설이는 이유는 단 하나. 하나뿐인 나의 사랑하는 아들 때문이다. 내가 놈을 죽이고 철창신세가 되면 내 아들은 아비도 없이 자라게 된다. 내가 놈을 죽이는 데 실패하고 죽는다 해도 마찬가지다. 내 아들은 범죄자의 자식이라는 꼬리표가 달린 채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그것만큼은, 그것만큼은 정말 두렵다.
놈을 죽이고도 나는 무죄가 되어야 한다. 놈이 먼저 나를 죽이려 했고, 나는 내 몸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놈을 죽인 것처럼 일을 꾸며야 한다.
2024년 1월 10일. D-24
놈을 마주할 때마다 뜨거운 피가 들끓는다. 더는 견디기 힘들다. 어쩌면 저렇게 뻔뻔한 얼굴을 하고 있을까? 타인을 고통스럽게 만든 적 따위는 단 한 번도 없다는 투다. 놈이 견딜 수 없는 고통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수백 번 상상한다. 치켜뜬 눈의 흰자엔 벌건 핏줄이 서고, 떡 벌린 입에서는 더러운 타액이 줄줄 흐르고, 살이 찢기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추하게 일그러진 놈의 얼굴을 하루빨리 보고 싶다.
놈의 정육점 앞에 청과물 가게를 오픈한 지 두 달이 되어간다. 오늘 그놈을 죽일 적당한 디데이를 정했다. 일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 오늘도 놈이 왜 정육 제품 가격을 올리지 않냐며 상도덕도 없는 새끼라면서 가게로 쳐들어왔다. 놈의 입에서 상도덕이란 말이 나오니 웃음만 나온다.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는 불쌍하게 맞는 척하다가 몰래 놈의 귀에 대고 좆이나 까라고 약 올렸다. 흥분한 놈이 더 난동을 부렸다. 그래. 지금 마음껏 놀아둬라. 이 살인자 새끼야.
2023년 8월 19일.
그놈, 유경이를 죽인 그놈이 오늘 출소했다. 너무 빠르다. 그 죗값이 너무나 가볍다.
7년 전, 그 길거리에 유경이와 내가 함께 있었다면 어땠을까? 유경이를 죽이려고 하는 놈을 내가 보았다면 나는 분명 망설임 없이 놈을 죽였을 거다. 내 아내를, 정우의 엄마를 지키기 위해서는 당연한 일이다.
나는 이제야 놈을 죽이려고 한다. 그러니까 이건 원한에 따른 복수라기보단,
그저 조금 늦게 행사하는 정당방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