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효율적인 아빠가 너에게 남기는 가장 확실한 보험
오늘도 퇴근길이 즐겁다. 오랜만에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 뒤로 아내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온다. 수화기 너머로 시온이가 내뱉는 알 수 없는 옹알이가 섞여 든다. 아빠 목소리를 알아챈 것일까, 부쩍 기분이 좋아 보이는 너를 만나러 가는 길. 오늘은 오랜만에 아내와 너와 함께 산책했다.
매일 걷던 익숙한 산책길이 너와 함께하니 전혀 다른 풍경으로 다가온다. 네 시선이 머무는 곳을 따라 천천히 눈길을 돌려본다. 아, 벌써 봄이 왔구나. 네가 세상에 처음 찾아왔던 그 찬란한 봄이 다시 돌아왔다. 메마른 가지에는 연둣빛 새싹이 돋아나고, 하늘은 시샘하듯 맑다. 멀리 보이는 산은 어느새 푸르른 옷으로 갈아입었고, 너의 옷차림만큼이나 나의 걸음도 가벼워진다.
하지만 시온아, 네가 커가면서 이런 안온한 하루가 매일 주어지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아빠는 알고 있단다. 세상이 그리 녹록지 않다는 걸 언젠가는 네게 알려줘야 할 텐데, 아빠 마음은 그날이 조금만 더 더디게 왔으면 싶구나.
네가 마주할 좌절과 실패, 믿었던 사람에게 받는 상처와 배신, 최선을 다해도 결과가 보장되지 않는 재능의 벽들. 때로는 스스로가 한없이 초라해 보이고 세상이 지독하게 불공평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올 거야. 혹은 네가 누군가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에 취해 우쭐거리는 못난 모습과 마주할 수도 있겠지. 그 모든 순간이 바로 '삶이 너를 속이는 때'란다. 이제 곧 마흔을 앞둔 아빠가 보니, 동화 속 세상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참 많이 다르더구나. 어쩌면 이 비정한 세상이 틀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좌절의 골짜기에서도, 혹은 그 속에서 길어 올릴 환호의 순간에도 아빠는 네 인생의 가장 열렬한 서포터즈가 되어줄게. 아빠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거든. 네가 이뤄낼 성취의 결과보다, 네가 흘린 땀방울과 남모를 노력에 아빠는 더 깊은 눈길을 보내고 싶다. 오늘 우리가 함께 본 저 작은 새싹들처럼 말이야. 봄의 정령처럼 세상에 '뿅' 하고 나타난 저 싹들도 사실은 시린 겨울을 묵묵히 이겨냈음을 기억하려 해. 네 열정 뒤에 가려진 '겨울'의 시간들을 끝까지 알아봐 주는 아빠가 되고 싶구나.
네 고개가 사경으로 비뚤어졌을 때도, 뒤집기를 못 해 끙끙거릴 때도 아빠는 언제나 너를 응원했단다. 네가 성장하며 내가 도와줄 일이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아빠는 감사하면서도 못내 서운했다. 가끔은 내가 너를 키우는 게 아니라, 네가 나를 키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네게 사랑을 쏟으며 나는 비로소 제법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효율과 논리를 따지는 종류의 사람이다. 감상보다는 생각을, 정성보다는 정량적인 수치를 신뢰했지. 그런데 너를 만나고 나서 나는 비합리적일 만큼 거대한 사랑을 깨달았다. '계산할 수 없는 마음'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걸 처음 알게 된 거야.
그래서 아빠는 이제 기꺼이 비효율적인 사람이 되어보려 한다. 더 많이 양보하고, 더 열심히 돕고, 더 많이 웃으며 행복해지려 욕심을 낼 거야. 힘든 이의 손을 먼저 잡고, 불의 앞에서도 정의가 살아있음을 말하는 아빠가 되고 싶어. 나의 이런 '비효율'이 너에게는 조금 더 '합리적인 세상'을 만들어줄 거라 믿기 때문이야. 나의 다정함이 세상에 온기로 남는다면, 그것이 훗날 너의 삶을 따스하게 지켜줄 가장 확실한 '인생 보험'이 되지 않겠니.
너를 만나고 아빠는 비로소 평온해졌다. 완전함의 시작이 무엇인지 이제야 말할 수 있게 되었어. 그 고백이 바로 네 이름 '시온'이 되었지. 너는 네 이름처럼 아빠보다는 조금 더 평온하길, 그리고 존재 그 자체만으로 완전하다는 자신감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길 바란다. 그 당당함의 근거가 아빠이길 바라며, 나는 네 생의 가장 깊고 단단한 뿌리가 되어줄게.
시온아, 혹시 오늘 이 책을 꺼내 읽고 있다면 하루가 제법 고되었던 모양이구나. 엄마 아빠가 곁에 없는 순간이니? 아니면 누군가의 사랑이 의심되는 밤이니? 아니면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용기가 필요한거야? 아빠는 이 글을 쓰며 네가 이 책을 자주 꺼내 보지 않기를 기도한다. 행복한 순간이 너무 많아서, 아빠의 촌스러운 고백이 담긴 이 책이 책장 귀퉁이에서 외롭게 낡아가기를 바란다. 네 하루가 너무 빛나서 아빠의 사랑이 서서히 잊혀지면 좋겠어.
아빠는 과거를 후회하며 지냈던 시간이 참 많았어. ‘공부를 더 잘했더라면’,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하며 못난 습관처럼 과거로 돌아가 나를 괴롭히곤 했지. 그런데 참 신기하지? 너를 만난 이후로 단 한 순간도 네가 없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 너와 함께한 이후로 아빠는 오직 ‘내일’만 생각하게 되었단다.
너와 함께 맞이할 여름의 수영장, 가을의 단풍 책갈피, 겨울의 핫초코와 눈사람, 그리고 다시 돌아올 너의 생일인 봄의 벚꽃까지. 아빠는 네가 천천히 컸으면 좋겠다고 기도한다. 내 품에서 잠들고, 퇴근한 나를 향해 성큼성큼 기어와 안기는 이 작은 너를 조금 더 오래 보고 싶어. 그러다가도 또 네가 빨리 컸으면 좋겠다는 기도를 해. 내가 만든 음식을 너가 먹으면서 간이 딱 좋았다고 말해주면 좋겠어. 네가 틀어주는 음악을 들으면서 옛날 얘기들을 했으면 좋겠어. 이유 없이 엄마를 위해 네가 꽃을 사온 날에 내가 사진으로 그 다정함을 기록하는 하루를 꿈꾸면서 말이야.
삶이 너를 속일지라도 시온아, 이것 하나만은 기억해줘. 너의 모든 계절 곁에는, 계산 없이 너를 사랑하는 아빠엄마가 늘 서 있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