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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메다 Dec 25. 2020

평수보다 꿈이 더 큰 집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며칠 전 유튜브에서 청약통장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하나 봤다.

다큐 잇it - 청약통장_#001 - YouTube

청약통장이 뭔지도 모르는 대학생이라 재미있게 보았다. 집을 갖기 위해 직장 선배와 같이 세들어 살며 청약을 드는 청년, 청약에 성공해서 유튜브를 하는 젊은이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나와 청약통장에 얽힌 자기네 삶을 보여준다.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늘 재미있다.


굳이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 재미때문은 아니다. 마지막 멘트가 참 기억에 남아서 그런다.

청년의 집은 평수보다 꿈이 더 큰 집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우리는 낭만을 잊어버린 것 같다. 오늘날 우리에게 낭만이란 넓고 큰 집이고 많은 돈이다. 꿈이라는 말이 자리할 곳은 적어도 21세기 대한민국에는 없어보인다. 돈 없이 세상을 살 수는 없다고 하지만, 이리 저리 가는 곳마다 모두 돈, 돈, 돈얘기만 한다. 보이지도 않는 현실을 이야기한다. 젊은이들은 모두 나아갈 길이 정해진 열차같다. 전부 취업을 위해서, 성공을 위해서 달려나간다. 이런 저런 이유떄문에 돈이 필요하고, 돈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군다. 조금만 이동 시간이 늦어도 인생이 다 망할 듯이 조바심을 낸다. 그러면서도 정말 성공이 무엇인지 모른다. 남들이 성공이라고 하는 삶을 성공이라 믿고 달려나간다. 열차의 특징은 앞만 보고 달려간다는 것이다. 다른 특징 하나는 행로를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버렸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하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나도 아직 20대 초반이라 세상을 잘 모르겠다. 세상은 내 생각처럼 살만한 곳인지, 아니면 내 생각보다 훨씬 험악하고 차가운 곳인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말하는 '현실'이 어떤 놈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내가 아는 것(아니, 믿는 것)은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사실이다. 앞길이 불투명할수록, 현재가 불안정할수록 노래를 불러야 한다. 지금이 아니면 정말 노래를 부를 때가 없다. 별똥별이 된다 해도 노래가 필요한 세상이다.


만약 내 생각처럼 현실이 살만한 곳이라면, 더 즐겁게 살기 위해 우리는 지금 노래를 불러야 한다. 만약 내 생각과 달리 현실이 훨씬 위험한 놈이라면, 물살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노래라는 말뚝을 박고 버텨야 한다. 노래를 부를 형편이 안 된다 하더라도 노래를 불러야 한다. 당장의 현실과 마주하면서도 충분히 노래부를 수 있다. 우리 선조들은 노래를 부르며 힘든 농사일을 해냈다.


어린 시절의 노래가 있기에 세상은 더 살만한 곳이 된다. 어려서부터 현실을 마주하고 일찍 철이 든 아이는 불쌍한 아이다. 사람은 나잇대마다 저마다 가져야 할 행동양식과 사고가 있다. 젊은이는 노래를 부를 시기이다. 노래를 불러본 적이 있는 사람이 노래를 부를 줄 알고, 노래를 부를 줄 알아야 노랫말을 현실에 옮길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 너무나 힘든 세상이다.


사회는 우리를 끝없이 압박한다.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야지, 대학 졸업한 지가 언젠데 이제 취직해야지, 취직을 할거면 못해도 대기업이나 공무원은 돼야지, 나이가 이정도 됐으면 결혼을 해야지. 뭐 그렇게 할 게 많은가? 우리가 해야 한다고 믿는 일들이 정말로 '내가' 해야 하는 일인지, 아니면 사회가 해야 한다고 하는 일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인생은 한 번 뿐이기에 겪어봐야만 아는 것이라 하지만, 그래도 소중한 인생 절반을 남의 삶을 살다가 영영 간다면 너무 허무하지 않을까. 노래를 부르고 싶다. 노래를 불러야 한다. 비록 중년이 돼 아무도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금의 나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 그래야 내 삶을 살 수 있다. 어려운 일이다. 평수보다 꿈이 더 큰 집에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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