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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메다 Dec 28. 2020

법정의 글은 별로다

법정 스님 <오두막 편지>, 피천득 <인연>

이번 주에 법정 스님의 <오두막 편지>라는 글을 읽었다. 내게 타인의 글을 평가할 자격은 없다지만 뭔가 아쉬웠다.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사색의 깊이에는 소로의 <월든>이 나았다. 세상을 들여다보는 따스한 시선은 피천득 선생님에 미치지 못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아쉬웠고, 다 읽지 못한 채 책을 덮었다. 피천득의 책이 더 나을 것 같았다.


피천득은 따스하다. 그 소박한 문장은 메마른 사람의 마음에도 꽃을 피울만하다. 세상 모든 사소한 것을 바라보는 시선도 색다르다.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감성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너무나 활기차고 신비로운 것 투성이다. 사랑할 것이 참 많다. 피천득은 참 별거 아닌 일상적 소재로 글을 쓴다. 분량도 매우 짧다. 보통 수필 한 편의 분량을 원고지 15매라 하는데 피천득은 7장에서 8장 내외로 마무리를 짓는다. 그럼에도 글에서 그의 생각, 감정, 통찰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그의 글을 읽으면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법정 스님의 글도 마찬가지다. 그도 자연을 사랑하고 사소한 것에 주의를 기울일 줄 안다. 소재는 일상적이고 문체도 질박하다. 그가 살아가는 방식과 통찰도 피천득 선생님에 못지않다. 그런데 나는 왜 아쉬움을 느끼며 책을 다 읽지 않았을까? 책을 덮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피천득의 글과 법정의 글이 무엇이 다를까. 둘의 가치관은 비슷해 보이는데 나는 왜 법정의 책이 싫을까.


답을 얻지 못했다. 이 생각은 다음에 하기로 마음먹고 수첩에 끄적였다. 그러고는 피천득의 <인연>을 책장에서 뽑아 들었다. 우리 집 책은 2002년에 출간된 놈이다. 약간 빛이 바래고 먼지가 묻은 하얀색 표지는 회색처럼 보였다. 오른쪽 위에 "인연"이라는 커다란 제목이 세로로 적혀 있고 표지 정중앙에는 진주를 문 흑백의 작은 조개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단출하다. 화려하지 않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다. 처음 읽을 때는 몰랐는데 다시 보니 표지에도 눈이 갔다. 피천득의 책 답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좋아하는 "딸에게", "나의 사랑하는 생활", "잠", "순례" 네 편을 찾아 읽었다. 읽고 나니 더 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시집가는 친구의 딸에게"도 읽었다. 이만하면 됐지 하며 책을 덮었더니 문득 아까 했던 고민의 답이 떠올랐다.


법정의 글은 사소한 일상을 소재로 삼았다. 자신의 금욕적이고 자연을 사랑하는 삶의 태도를 담았다. 세상 모든 것을 따스한 눈으로 바라봤다. 피천득의 글과 매우 비슷했다. 하지만 피천득과 결정적으로 달랐다. 법정의 글은 수필이 아니라 설법이었다. 그의 일상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목놓아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마음이 아니라 머리로 쓴 글이었다. 감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감성이 녹아들어 있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부분은 모두 논리를 전개하기 위한 제물로 사용됐다. 그래서 글을 있는 그대로 느낄 틈이 없었다.


법정의 주장에 따라 나도 머리를 굴리느라 편하게 읽을 수 없었다. 마음이 느껴지지 않으니 또한 편하게 읽을 수 없었다. 그제야 내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해야 한다" 대신에 "~하고 싶다"는 문장이 읽고 싶었다. 그래서 법정을 덮고 피천득을 손에 들었던 것이다.


이태준 선생은 <문장강화>에서 자신의 감상과 생각을 드러내되, 논문처럼 이론으로써 주장하고 남을 굴복시키지 않은 글을 잘 쓴 글이라 했다. 내 글은 내 마음을 제대로 드러냈는가, 아니면 주장도 모자라 내 생각을 진리인 것처럼 역설하지는 않았는가 돌아봤다. 나의 글은 '~했다'나 '~하고 싶다" 대신 '~해야 한다'는 문장으로 점철돼 있었다. 부끄러웠다.


다시 글을 쓰는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물론 브런치처럼 대중에게 공개하는 글은 독자를 고려하는 글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독자를 위한 글이 되면 안 된다. 내 글은 대개 감상문이나 수필이기에, 온전히 나를 위한 글이어야 한다. 내 감정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쓰고 나 혼자 즐기는 글이다. 내 감상을 묘사함으로써 남의 마음을 흔드는 글이다. 주장하려면 은근히 보여주어야지 대놓고 논리를 전개하며 역설하면 안 된다. 그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나는 행복하고 싶다. 이 불안과 우울의 늪에서 벗어나고 싶다. 성격장애를 고치고 싶다. 나를 사랑하고 싶다. 어떠한 악행이나 범죄도 나에 대한 나의 사랑, 나의 삶과 행복에 대한 소망을 빼앗지 못하도록 하고 싶다. 타인을 갈구하지 않고 혼자서도 괜찮고 싶다. 내일이 기다려지는 하루를 살고 싶다.


일상의 사소한 순간에서 기쁨을 느끼고 싶다. 새벽녘에 일어나 연필로 시집을 필사하며 사각사각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오늘 주어진 하루에 감사하고 싶다. 택배 하나에 기뻐하고 친구의 안부 전화 한 통에 천금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싶다. 세상 모든 것을 따듯하게 바라보고 싶다. 거리의 풀, 꽃, 나무들을 사랑하고 싶다. 타인의 아픔에 함께 눈물 흘릴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들의 곁에서 그저 가만히 있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현재에 충실한 사람이 되고 싶다.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모두 다 온전한 내 감정으로서 받아들이고 싶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글을 쓰고 싶다.


그렇게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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