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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메다 Jan 03. 2021

모래시계

[명사]
가운데가 잘록한 호리병 모양의 유리그릇 위쪽에 모래를 넣고, 작은 구멍으로 모래를 떨어뜨려 시간을 재는 시계.

내 안 예쁜 모래시계


내 책상 위에는 5분짜리 모래시계와 30분짜리 모래시계가 사이좋게 놓여 있다. 쿠팡에서 3000원 주고 산 싸구려 모래시계다. 5분짜리는 노란색, 30분짜리는 보라색 모래로 차 있다. 디자인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투박하고 뚱뚱한 호리병 모양새에, 멋 없이 시계 양쪽 바닥에 검은 플라스틱 뚜껑이 덧대졌다. 시계 유리에는 커다랗게 시계가 몇분짜리인지 숫자가 적혀있다. "HAPPY TIME:) Sandglass minutes"라는 고딕체 사족은 덤이다. 그래도 나는 이 모래시계를 사랑한다.


코로나 시대의 대학생이자 고시생인 내게는 정해진 시간표가 없다. 수업은 모두 동영상 수업이다. 말고 할 일은 공부 뿐이다. 남들과 맞춰야 하는 일정이 없어서 24시간이라는 개념은 날려먹은지 오래다. 11시에 자고 7시에 일어날 때 말고는 시계를 볼 이유가 없다. 그냥 내 마음 가는대로 살면 된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밥 먹고 나서는 조금 쉬고, 많이 쉬었다 싶을 정도면 앉아서 공부한다. (사실 공부는 안 하고 그냥 멍때리거나 자책하며 앉아만 있는다.) 공부할 때도 집중이 안 되기 시작한다 싶으면 책을 덮고 잠시 쉰다. 글을 쓸 때나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정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이보다 더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실상 내 생활은 이론처럼 그렇게 자유롭지는 않다. 강박적 성격탓에 늘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 내가 지금 쉬면 안 된다는 생각, 완벽하게 모든 걸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에 시달린다. (강박적 성격은 강박장애와는 다르다. 완벽주의와 비슷한 성격성향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매일 전날 밤에 플래너를 10분 단위로 짜놔야만 마음이 놓인다. 그래야만 다음 날 일어나서 제대로 생활하고 기능할 수 있다. 계획을 짜놓지 않은 날이면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몰라서 계획조차 짜지 못한다.(어젯밤에는 충분히 짤 수 있는데 말이다. 신기한 일이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망진창이 된 채로 멍때리다가 하루가 다 지나는 날이 허다하다.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옛날, 그날 나는 플래너를 쓰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10분 공부하고 50분 넘게 쉬었다. 그렇다고 무슨 일을 하지는 않았다.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마음 불편한 채로, 그냥 천장을 보며 멍 때리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우울증 증상이다.) 그러다 "뭐라도 해야지.. 공부 하기 싫으면 책이라도 읽자."하고 일어나서 겨우 책상에 앉았다가 책 표지만 30분가량 보다가 구제불능이라며 내게 화를 냈던 기억이 난다.


상담사는 분 단위로 과하게 세밀한 계획을 짜는 습관은 내 강박성 성격을 강화시킬 뿐이므로 계획은 짜되 조금 더 유하게 짜보라고 했다. 시간을 몇 시간 단위로 늘린다든지, 시간보다는 내용 중심으로 짠다든지. 아니면 공부할 내용만 플래너에 적고 다른 행동들은 플래너에서 빼는 방식 등을 권했다. 굉장히 힘들었지만, 몇 개월의 노력 끝에 나는 훨씬 더 큰 단위로 계획을 짜게 됐다. 이제는 커다랗게 오전, 오후, 저녁의 세 타임으로 나누어서 그 시간대에 할 일들을 적어 놓는 정도로 플래너를 쓴다. 크나큰 발전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할일 하나가 끝난 다음 다음 할일의 순서를 정하느라 20분, 30분동안 고민할 때가 자주 있다.


모래시계가 내 변화에 큰 도움을 줬다. 나는 원래 할 일만 적어놓고 순서, 시간을 정해놓지 않으면 뭐가 더 중요하고 어떤 순서로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 제대로 행동을 하지 못하는 스타일이다. 이럴 때는 사실 뭐가 더 중요한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는, 그냥 닥친 일을 하나하나 처리하는 게 최고의 대처다. 하지만 그게 말 처럼 그리 쉬운가? 나는 고민하다가 인터넷에서 모래시계를 검색해서 하나 샀다. 30분 단위로 끊어서 계획표를 짜기 위한 속셈이었다. 그리고 모래시계를 받아 사용하다가 의외의 사용법을 발견했다. 생각하지 않고 일을 시작하는데 모래시계만한 도구가 없었다.


무슨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을때, 또는 너무나 하기 싫을 때면 5분짜리 모래시계와 30분짜리 모래시계를 함께 뒤집어 놓는다. 그리고 딱 5분짜리 모래시계가 끝날 때 까지만 하자며 나를 달래서 일을 억지로 시작한다. 그런데 일단 일을 시작하고 나면 그렇게 하기 싫던 일들도 나름 재미가 있다. 공부도, 글쓰기도, 책 읽기도, 그림 그리기도 전부 하기는 굉장히 어려운데 하다보면 재밌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집중하다가 '이제 슬슬 힘든데' 하는 생각이 들면 모래시계를 바라본다. 보라색 모래시계가 다 떨어졌다면 쉬고, 아니라면 보라색 모래시계가 다 될 때까지 조금만 더 행동을 한다. 그렇게 나는 내 완벽주의와 싸우고 있다.


오랜 집중이 필요할 때면 앉아서 몇 시간을 집중하는 게 아니라, 30분-5분(또는 10분) 단위로 쉬어주면서 집중한다. 급하게 결정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5분짜리 모래시계를 뒤집어 놓는다. 적당히 긴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면 30분짜리 모래시계를 손에 잡는다. 게임을 하거나 밥을 먹을 때처럼 분명히 쉬는 시간이지만 너무 늘어지기 쉬울 때도 30분 모래시계를 두 번 집어 놓는다. 모래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아무 불안감 없이 편안히 쉴 수 있도록. 그리고 더 늘어지지 않고 때가 되면 서서히 해야 할 일들을 처리할 수 있도록 말이다.


모래시계는 사실 굉장히 불편한 타이머에 불과하다. 소리가 나지 않고, 정확하게 남은 시간도 표시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런 모래시계의 모자람을 사랑한다. 30분을 넘어서 집중하고 있을 때 내 흐름을 끊으려 방해하지 않는다. 얼마나 시간이 남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앞으로 N분만 더 하면 된다"는 생각을 내 마음에 심어주지도 않는다. 저런 생각은 내 능률을 떨어트린다. 모래시계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가만히 시간이 지났나 안 지났나만 말해주는 고마운 친구다. 가끔은 이런 불편함이 더 도움이 될 때가 있다. SNS가 우리에게 더 넓고 활발한 인간관계를 가져다 준 것 같지만, 사실은 더 얕고 피상적인 인간관계만을 늘려 우리의 인간관계에 대한 욕구만 더 키우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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