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진 Mar 10. 2021

보수 없는 독서, 가치 없는 창작

20210310

  현진건의 <빈처>를 읽었다. 나의 의지는 아니고 이런 근현대 소설을 읽어야 하는 회사에 다니고 있다.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 이 소설의 전문을 쭉 읽어 내려가는데 가슴에 콱 박히는 문장이 있다.


  보수 없는 독서, 가치 없는 창작


  특기는 보수 없는 독서요, 취미는 가치 없는 창작이라. 내 자소서에 쓰기 딱 좋은 멘트를 현진건이 먼저 내뱉었다. <빈처>가 자전적 소설임을 감안하고, 이 작품으로 현진건의 작품세계가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권영민 교수의 평론을 참고하면 저 특기와 취미는 현진건 본인의 상황과 맞물렸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대한민국 청소년이라면 한 번 쯤 읽고 드립으로 날려보는 대사 '왜 먹지를 못하니.'의 창작자도 자신의 업을 보수 없고 가치 없는 일이라 여긴 것이다. 죽은 아내 앞에서 'XXX 년'이라고 시원하게 욕을 하고 뒤늦게 후회하는 후회공. <빈처>에서도 남편의 성격은 비슷하다. 근현대 작품을 읽을 때마다 등장하는 비슷한 폭력, 비슷한 욕, 비슷한 무능함. 우리는 이런 작품을 고전이라고 읽는다. 그의 작품은 교과서에 버젓이 남아 있지만 그의 처가 세간살이를 팔아 살림을 책임진 건 역사로 남지 않았다.

  지금의 대한민국 10대 청소년은 어떤 교육을 배우는 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마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현진건은 여전히 현진건이고 운수 좋은 날도 여전히 그 운수 좋은 날로 배우겠지. 대학에서 시론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한창 문학계 미투가 논란이 되던 때다. 교수는 수업에서 교재로 쓰일 뻔했던 고은의 작품을 커리큘럼에서 빼겠다고 선언했다. 정년을 앞둔 남성 교수의 단호함을 그 수업에서 배웠다.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빼고 덜어냈다. 그래도 여전히 인터넷 서점, 도서 구독 플랫폼에 고은을 검색하면 그의 책이 나온다. 선택은 독자에 몫일 테니까, 판매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와 논란을 처음부터 접하고 싶지 않아서 소비자로서 의도적으로 여성작가의 책을 구입한다. 비중이 그렇다. 그러다가 여성작가의 책만 두는 서점을 차렸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책방에 고전은 현진건이 아니라 나혜석, 백신애, 강경애.. 이런 이름들이다. 이곳에선 어떤 책을 골라도 작가의 이력을 힘들여 찾아보지 않아도 된다. 물론 여성이 범죄자가 되지 말란 법 없으나, 뉴스를 틀면 알다시피 비중이 그렇다.

  다음 세대의 고전은 그저 무해한 사람들의 이야기기를, 그들의 이야기가 보수를 받고 가치를 얻기를, 이 작은 서점에서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서점은 행운의 장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