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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진 Jan 28. 2018

여성에게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없다.

[아가씨x2] 감각 그 이상의 자유

두 번 본 영화 #1 아가씨(The Handmaiden, 2016)

(*영화 장면과 글 내용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아가씨>는 가장 최근 영화관에서 두 번 관람한 영화다. 두 번 모두 친구들과 영화관을 찾았는데, 정확히 어떤 친구들과 갔는지 기억 나지 않고 영화를 보고 놀랐던 기억만 난다.

  첫 관람 때는 단순히 박찬욱 감독의 영화고, 김민희의 연기가 궁금해 영화관을 찾았다. 그리고 2막에서 밝혀진 반전에 '이 영화는 다시 봐야 한다.'는 결단이 섰다. 두 번째로 영화를 보았을 때 인물들의 숨은 의도와 그 의도를 언뜻 내비치는 숨은 장치들이 눈에 보였다.

  아가씨는 총 3막으로 이루어진 영화다. 영화는 숙희의 목소리로 1막을 끌어 간다. 그리고 2막에서 히데코의 진실이 밝혀진다. 숙희에게 거래를 제안하는 후지와라와 히데코를 억압한 코우즈키를 빼고 두 주인공 이야기만 해보자. 두 주인공이 이끌어가는 극의 긴장감과 통쾌함이 이 영화를 두 번 본 이유이기 때문이다.

  숙희와 히데코는 닮아있다. 두 인물 모두 어머니의 존재가 부재한 점이 그렇다. 모성에 대한 결핍은 숙희에게는 그 모성을 누군가에게 채워줌으로써, 히데코에게는 다른 여성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형태로 드러난다. 히데코를 만난 숙희는 자신의 모성을 히데코에게 채워주고 히데코는 숙희에게서 안정감을 얻는다.

그렇다면 숙희를 만나기 전, 히데코는 누구와 닮아 있었을까?


  바로 히데코의 이모다.

  히데코의 이모는 코우즈키에게 억압 받고 결국 목숨을 끊는다. 히데코는 그런 이모에게서 강한 유대감을

느낀다. 이모와 자신이 닮았냐고 물어보며 종종 벚꽃 나무에 매달리는 히데코는 그렇게 자신도 이모와 같은 삶을 살 것이라 생각했지만 '나를 망치러온 나의 구원자' 숙희를 만나게 된다.

  숙희에게서 사랑을 느낀 히데코는 숙희의 속내를 뻔히 알고 있음에도 숙희가 자신을 진심으로 대해주길 바란다. 숙희 역시 후지와라와 함께 있는 히데코를 보며 질투를 느끼지만 자신의 마음을 외면한다.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는 숙희의 태도에

히데코는 죽음을 택하고 만다.

  하지만 우리의 히데코는 죽지 않는다. 죽음의 문턱까지 간 히데코의 덧없는 표정과 히데코를 말리는 숙희의 애처로운 표정은 정말 명장면이다. 벚꽃 나무 아래서 히데코는 죽지 않고 새롭게 재탄생한다. 이모와 숙희 모두 닮아 있는 히데코는 이모가 아닌 숙희와의 자유를 선택했다.  숙희는 히데코에게 이를 갈아주는 것부터 서로의 몸을 알아가기까지 새로운 감각의 자유 선사한다. 이 감각의 자유는 그동안 속박당해왔던 히데코의 정신적, 육체적 자유와 맞닿아 있다.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코우즈키의 '무지의 경계선'을 숙희가 부숴버리면서 히데코는 진정한 자유를 찾는다.  그동안 히데코에게, 여성에게 넘지 말아야 할 무지의 경계선은 얼마나 많았던가. 히데코가 정성스럽게 골랐던 장갑은 히데코의 선택에 의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장갑을 벗으면 안된다는 엄격한 선이 존재했다. 히데코는 마지막에 가서야 장갑을 벗어던진다. 그리고 숙희와 함께 억눌린 욕망을 표출하고 진정한 자유를 얻음으로써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 가만 돌이켜보자. 우리 앞을 가로막는 무지의 경계선이 무엇인지,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지만 한 번 불편해지면 견딜 수 없는 장갑은 또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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