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도 잔상으로 남았네요
SUV를 타고 눈물을 닦으며 덜컹이는 오프로드를 달리고 있었다. 수십번을 오고간 길 이었지만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니, 익숙하고 싶지 않았다. 이 길이 익숙해지면 계속해서 잔상처럼 남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속에 생생하다. 따뜻했던 옆 자리는 이제 텅 비었고, 가득 짐을 싣었던 트렁크도 텅 비었다. 울지 않으려고 했지만 운전을 하며 집에 돌아오는 내내 펑펑 울었다.
파견근무가 있어서 5년을 해외에서, 지구 반대편에서 살았었다. 우연히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게 되었고, 외로운 타지 생활에 기쁨이고 행복이었다. 계속 데리고 다닐 줄 알았는데, 코로나로 인해 모든게 망쳐버렸다. 나는 2020년 7월, 코로나로 전 세계가 록다운 된 와중에 전세기를 타고 귀국했다. (웃긴 이야기지만, 한국 대사관에서는 전세기 마련이 어려워, 미국 전세기에 남는 자리에 타고 미국까지 레스큐, 이 후 자체 귀국했다) 코로나 여파로 인해 일반 민항기에서는 대형견 수송을 중지했고, 생동물 화물로 운송을 하려니 거금 1천만원 이라는 견적이 나왔다. 어찌 해야할 바를 몰랐다. 전 세계가 처음 겪는 전염병 사태에, 회사에서는 귀국을 하라고 하는데 같이 살던 이 친구를 두고 갈 순 없었다. 그렇다고 데려가자니 난 그렇게 큰 돈이 없었다. 아니, 있었지만, 이 큰 돈을 쓰는게 맞는지 결정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날 비난하겠지만, 선뜻 천만원 짜리 생동물 운송 계약서를 쓸 순 없었다.
한 선교사님이 내 소식을 듣고, 강아지를 입양하겠다고 했다. 강아지 사진을 몇 개 보내주었고 수 일 내에 강아지랑 집에 한번 오라고 했다. 선교사님께서 강아지를 맡아 주신다면, 무거운 마음이지만 그래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몇 일 사이, 다시 연락이 오셔서는 아무래도 안될것 같다고 하셨다. (선교사님 댁에는 이미 다른 강아지 두 마리가 있었다). 우울해졌다.
판데믹 시절, 나는 꽤나 우울하고 불안했다. 공항이 폐쇄된 상태였기 때문에 '내가 원할때 한국에 갈 수 없다'는 무력감이 나를 지배했다. 밤이건 낮이건 바깥엔 군인과 경찰이 상주했고 소수의 '이동 허가증'을 받은 사람만이 통행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아파트에서 유일한 동양인이었던 나는 중국인이라는 오해 속에 더 따가운 눈총을 견뎌야겠다. 몇 일이 지나고, 다시 선교사님이 연락이 오셨다. 자꾸 마음에 걸리고 생각이 난다며, 강아지를 이번에는 진짜 보고싶다고 하셨다. 그렇게 입양을 위한 만남이 진행되었고, 선교사님께서 선뜻 나의 강아지를 맡아 주시기로 했다. 안도하는 와중에, 또 다시 엄청난 우울감과 불안이 몰려왔다.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어린 아이처럼 불안했고 무거운 돌이 가슴을 누르듯 답답했다.
살아서 헤어지는 것도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무지개 다리라도 건너 헤어지게 되면 얼마나 더 마음이 아플까.
아니, 살아서 헤어지는 생 이별이라 더 슬픈걸까.
다시 파견을 가게되면, 혹은 여행이라도 가게되면 꼭 들를게, 꼭 데릴러 갈게, 코로나 끝나면 데려올거야,
수없이 다짐했지만 나는 이미 알았다. 그럴 가능성은 너무 적다는걸.
내가 살았던 곳은 중남미 파라과이었다.
지구반대편, 비행만 36시간을 해야하는 곳인데 다시 갈 일이 있을까 싶기도 했다.
사랑하는 내 첫 반려견, 그동안 내 삶의 기쁨, 내 삶의 사랑이고 행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