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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거제·통영(2): 전쟁의 흔적에서 평화를 외치다

by 낡은용

칠천량을 떠나 옥포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옥포대첩 기념공원으로 왔다. 옥포해전은 이순신 장군의 첫 출전이자, 첫 승전이며 임진왜란 개전 이후 조선의 첫 승전이다.

칠천량해전공원의 깔끔하면서 세련된 전시에 비해, 옥포대첩 기념공원은 오래되어 그런지 좀 아쉬웠다. 답사를 통해 방문한 곳들 중 리모델링을 하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굴뚝같이 들었던 몇 곳 중의 하나. 그러나 바로 앞에서 옥포의 파도 소리를 접하니 불만족은 상쇄되었다. 평소에는 생각없이 들었을 파도 소리도 이곳에 와서 들으니 조선 수군의 울음소리 같았다. 함께간 쌤들은 내가 정말 mbti F의 전형이라며 신기해 했다.


이곳을 끝으로 첫날이 마무리되었다. 어느덧 가을이라 해는 짧아 이미 컴컴해졌을 때에야 당도한 우리의 숙소는 역시나 산 속에 있었고, 운전 요정 YG쌤이 또 수고해주신 끝에 차를 대고 방에 들어갔다. 깔끔한 방에 앉은뱅이 상을 펴고 사온 치킨을 정갈하게 세팅하였다. 항저우 아시안 게임 축구 결승전을 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냥 결승전이 아니라 무려 한일전이다. 바다 울음소리를 듣고 왔는데 일본한테 질 순 없잖아!

시작하자마자 한 골 먹는 바람에 억장이 무너졌었는데, EK쌤이 이순신 장군의 첫 승전지를 다녀온 우리가 응원하니 이길 거라고 하셨다. 보통 내가 보면 이기던 축구경기도 지곤 했는데, 정말이지 뒤이어 두 골을 넣은 우리가 이겼다!! 장군님 보고 계신가요?

기분 좋은 마무리. 긴 하루였다.



산 속이라 밤에는 어두워 뵈는 게 없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산안개와 아침 이슬이 반겨주는 숙소가 참 예뻤다. 사장님 내외분은 조식으로 직접 농사 지은 감자 야채가 들어간 샌드위치와 따뜻한 커피도 내와 주셨고, 마당의 강아지도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보통은 힐링하러 올 만한 숙소였는데, 우리는 정말 잠만 자고 떠나게 되어 사장님도 의아해 보였고 우리도 아쉬웠다.

갈 길이 멀어 그래요. 이 작은 나라에 볼 게 어쩜 이리 많은지.

오늘의 첫 답사지는 거제현 관아. 관아 전체가 남아있진 않고 그 중 객사 역할을 하던 기성관과, 하급 관리가 업무를 보던 질청만 남아 있다. 수령이 업무를 보던 동헌은 사라졌지만 그 터에 거제 면사무소가 들어서 있어 재미가 있었다. 질청은 문이 닫혀 있었는데, 아마 웬만한 사람이라면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엇? 닫혀있긴 하지만 잠겨있진 않잖아? 하며 열고 들어간 우리 쌤들. 덕분에 다른 관광객들도 함께 들어와 구경하였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까지도 등기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순신의 바다를 보러 내려온 이 남쪽에서 계속하여 일본의 흔적을 마주치게 되는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세계사의 흐름이 바뀌던 중요한 시기에 겪은 저 일제 36년은 해방 이후에도 우리 민족을 고통에 내던졌다. 포로수용소 유적 공원은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6·25 전쟁으로 발생한 수많은 포로를 수용하기 위해 유엔군이 선택한 장소, 거제. 이 수용소 유적 공원은 전쟁, 포로, 복원, 평화 총 네 개의 ZONE으로 구성돼 있다.


수십 만명의 친공, 반공 포로들이 수용돼 있었고 열악한 환경이나 처우보다는 포로들 간의 이념 차이로 인한 다툼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은 곳이다. 중학생 때 부모님과 친척들과 함께 왔던 기억이 난다. 전쟁의 경과가 기록된 전시관 내부는 어둡고 음울했고, 공원 군데군데 있는 탱크와 비행기 앞에서 커플이 귀여운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 그 이질적인 몇 가지 조각으로만 남아 있는 곳에 다시 와 보니 놀랍게도 십여 년 전의 그때와 똑같다. 오래된 냄새, 오래된 글씨체, 전시품들. 그러나 내가 바뀌어 있었다.

중학생 때의 나는 역사를 좋아하고 잘 안다고 떠들긴 했지만, 무서운 전시관을 얼른 빠져나온 후 나도 대학생이 되어 저 커플처럼 남자친구와 데이트로 여기 와서 사진 찍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중학생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사람이 된 오늘의 나는 전시관에서 쉬이 나오지 못했다. 이념이 무엇이기에 한민족을, 같은 사람을... 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라고 우스워할 사람이 많아보이는 시대 같아서 슬펐다. 일제 강점기라는 지옥, 동족상잔의 비극, 참혹한 전쟁, 그리고 인간성 말살이라는 혼돈의 시대를 전시관에서 보며 끄덕거리는 나의 편안함이 미안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안도가 되기도 하고 다양한 심정이 들었다.


자가 판단에 의하면 성인adhd에 해당하는 내가 이보다 열심히 볼 수 없다고 생각할 만큼 꼼꼼히 보고 나왔음에도, 밖에 나오니 나는 혼자였다. 다른 선생님들은 더 열심히 본 것이다. 다들 어떤 생각을 하며 봤을지, 오늘 밤 술을 마시며 얘기를 나누겠지.

우리가 너무 열심히 보는 바람에 다 못 봤음에도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음 장소로 옮겨야 하니 얼른 거제도 몽돌해변을 모티브로 만든 빵을 사고 떠납시다! 하고 떠나는 길에,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 속보 뉴스를 들었다. 이 장소에서 들으려니 더없이 끔찍한 뉴스였다.


인간은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이 남기고 간 끔찍한 상흔을 기록한다. 전쟁의 아픔과 고통을 알면서 또다시 전쟁을 일으킨다. 전쟁의 역사를 바라보며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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