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횽'
'?'
부드럽게 혀 안에서 말려 들어오는 '낡용'의 발음만 듣다가 냅다 된발음을 들은 나는 떨떠름했다.
"낡횽이 아니라 낡용이야."
그러자 그 아이는 본인이 왠지 모르겠지만 낡용 글자를 읽을 때 잘 안 읽힌다고 했다. 그러면서 너를 형님으로 모시겠다며 낡형이라고 부르면 안 되겠냐고, 여성성에 대한 나의 자존감을 무너뜨렸다..
정색하며 그건 안 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읽을 수 있는 새로운 발음을 구상해 왔다. 종이에 크게 낡, 용을 쓰더니 낡 옆에 작은 글씨로 '은'을 붙여 썼다.
"이건 어때? 낡은 용. 이렇게 띄워 읽으면 읽을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한 번 맘에 든 걸 잘 바꾸지 않는 나는 낡용이라는 별명의 원 발음이 파괴되는 것이 싫었다. 게다가 낡긴 뭐 낡아...낡은 용?
그때 문득 머리를 치고 지나간 생각. 용!
여러 민속학에 등장하는 마법적인 전설의 생물, 용. 엄청난 능력을 지녀 위대한 인물들의 태몽에 종종 등장한다지. 당시 나는 학업 성적도, 예체능 분야의 능력도 모두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너무 특별하고 대단한 사람이야. 난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라는 자의식만큼은 중2병과 함께 활활 타오르던 중이었다.
그래, 나 용 맞네. 지금 잠깐 낡은 거네. 보수 공사를 좀 하면 다시 삐까뻔쩍한 '용'이 될 수 있는 거겠네.
기적의 삼단 논법을 구성한 나는 전학생의 '낡은 용'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어딘가에 이름을 쓸 때 낡은용이라고 쓰기 시작했다. 나는 '낡은용'이다 라고 생각하면, 시험을 못 봤을 때도 친구와 멀어졌을 때도 내가 좀 부족해보일 때도, 모든 순간에 정신 승리를 할 수 있었다.
그 마인드 컨트롤 덕분에 나는 정말 대단한 용은 아니지만 나름 잘 살고 있다. 학생들은 나를 '낡쌤'이라고 부른다. 친구들은 '낡용아'라고 부르거나 급할 땐 '낡!낡!'하고 부른다. 나는 여전히 자아를 투영할 만한 모든 곳에 닉네임을 '낡은용'이라고 설정한다.
요즘도 삶에 힘들거나 지치는 순간이 있고, 후회해 봐도 돌이킬 수 없는 내가 저지른 실수들이 있다. 내가 그렇게 멋진 것 같지 않은 순간에 내 별명은 위로가 되어 준다. 그리고 다시 용기를 준다.
쌔삥 용이 아니라 낡은 용으로 일평생 살긴 하겠지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