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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st E Feb 08. 2023

세상 모든 플랜B 작동 개시

사계절만 살아보면

제주에 도착하는 날 비가 내렸다.

제주의 날씨는 동쪽 다르고 서쪽 다르다는 걸 여러 해에 걸쳐 여행을 하며 알고 있었지만 배를 타기 전까지만 해도 맑던 하늘이 제주항에 내리는 순간에 비라니 불길한 기운이 음습해 왔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모든 상황에 의미를 찾아 부여하는 걸 보니 멘탈은 서울을 떠나기 전 마셨던 와인의 잔만큼 아슬아슬하다.


‘토속신앙에서 이런 날은 어떤 의미가 있었더라? 비가 오면 더 잘 산다고 했던가?

아차! 그건 결혼 이야기였던가?

아니, 이사 이야기였던가?

에라 모르겠다.’


꾸역꾸역 좋은 포장지로 의미를 덧붙였지만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서울에서부터 끌고 내려온 짐들만큼 비루하고 남루한 근거 없는 덧붙임을 이내 깨달았다.

다음날, 어제와는 다르게 하늘은 완연한 봄의 형상을 띄었다.

어제는 비가 와서 죽을 맛이더니, 오늘은 해가 떠서 죽을 맛이다.

살 집을 구하지 못했으니 뭔들 좋을 리가 없었다. 트렁크를 가득 채우고 자동차 뒷자리도 부족 해 보조석까지 가득 채운 짐들은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으면 자동차는 오른쪽으로 휘청이고 왼쪽으로 꺾으면 왼쪽으로 휘청이며 마치 곡예단의 단장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이 상황에 돌아오는 건 현실적 문제의 직면뿐이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이전의 시간을 방치해 뒀던 건 아니었다. 나름의 노력이라는 걸 했었다, 간간이.

구정을 앞두고 제주에 집을 구하기 위해 한차례 방문을 했었다. 2월 중순에 내려 올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에 한 달 전이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겠다고 그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않고 속단해 버린 게 잘 못이라면 잘 못이었다.


일 년 살이 월세를 구할 예정이지만 제주에는 뭍과 다른 방식으로 집을 임대하고 있었다.

뭍에는 없는 연세라는 제도가 있었고, 연세라는 건 월세의 금액을 11을 곱하여 일 년 치를 한꺼번에 지불하는 방식인 듯했다. (통상적인 것은 아니며 임대인이 그렇게 한다는 의사가 있을 시 가능)

중요한 문제는 제주에는 보통 집을 한 달 전에 구하지 않는다고 한다. 즉 그 말은 내가 들어가고 싶은 한 달 전의 집을 보여 줄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집들이 '즉시입주'를 내걸고 있었으며 내가 원한다고 해서 날 기다려 주는 그런 시스템 따위는 이곳에 없었다. 집을 보고 나서 못 내 아쉬운 마음과 씁쓸한 기분에  중개인에게 '서울에서는 보통 한 달 전에는 구하는데...'라고 끝맺음 짓지 못하는 말을 하곤 했다.

간혹 입주 가능 날짜가 기재되어 부동산 사이트에 올라오는 것들이 있었지만 그것도 홍수처럼 쏟아지는 집들 중 하나가 될까? 그 수는 극히 드물며 원하는 날짜가 나오리라는 보장은 더욱이 없다. 집을 구하기 위해 아는 사람도 없는 제주에 내려와서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백기를 들고 다시 서울로 향했었다.


한 번의 실패는 성장의 밑거름이 되기도 하지만 이미 맛본 좌절에 불안과 두려움을 껴안고 시작해야 한다.


다음이라는 계획이 있어야만 불안과 좌절을 극복하고 결국 성장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부터 '내가 계획 한 날짜에 집을 구하지 못할 경우'의 수많은 플랜B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떠돌이 삶을 산다, 한 달짜리 숙소를 구하고 여유롭게 마음에 드는 일 년 살이 집을 구한다, 원하는 조건의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아 본다, 생각했던 월세의 금액 보다 조금 상향시켜 본다, 원하는 집의 상태를 많이 하향시켜 본다, 회사 다닐 때 사적인 이야기 한 번 나눠 본 적 없던 제주가 고향인 동료에게 4년 만에 연락해 본다...


수많은 플랜B는 수많은 선택권을 지니고 우위에 선 사람의 기분을 잠깐 맛보게 했다. 

그리고 새삼 부모님이 위대 해 보였다. 

겨우 하나의 벽에 부딪혔을 뿐인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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