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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st E May 20. 2023

버킷리스트 클리어

사계절만 살아보면

블라인드가 창문을 덮고 있어 바깥 날씨가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도로록 도로록하며 올라가는 블라인드 틈으로 바깥이 보였다가 보이지 않았다가를 여러 번 반복하며 드디어 시야에 하늘이 나타났다.


'흐리다. 젠장!'

서울에서 내려온 지인과 함께 한라산에 오르기로 한 날 아침도 어김없이 흐린 하늘이었다.


'365일 중에 과연 제주는 언제 맑은 걸까?'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틈틈이 하늘을 봐야,

'지금'이란 생각이 들 만큼 아침 다르고 점심 다르고, 동쪽 다르고 서쪽 다른 게 바로 제주 날씨였다.


지인이 진심으로 한라산에 같이 올라가고 싶었는지 진실은 알 수가 없다.

예의의 '편안한 옷도 가져가야겠네요.'라는 말을 덥석 물었을 뿐이었다.

내쪽에서 더 이상의 예의를 차리면 산행이 수포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초록이 한창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는데 민망하기 그지없는 하늘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비는 내리지 않았고, 흐림이 말 그대로 흐림이지 미세먼지 따위는 아니었다.


일 년의 계획 중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한라산을 만나는 것.


몇 번째 오르는 길이었지만 몸은 익숙해지지 않아 (이 길을) 처음 오르는 지인보다 쳐지기 시작했다. 3분의 2 지점에 도달했을 때 시야에서 지인의 모습은 사라졌다.


'분명히 내 눈앞에 있었는데..'


같이 발맞춰 가야 할 상대가 없으니 앞을 보며 목적지로 향하던 발걸음이 느려졌다. 올라온 아래의 길을 돌아보며 '내가 이만큼이나 올라왔구나! 나무들이 몇 개월 사이에 초록초록해 졌구나!' 연신 감탄 일색이다.


뒤늦게 현타가 왔다.

'이래서 내가 남들보다 느리나?

남들은 앞을 보며 정상을 향하는데 난 걸어온 길이나 돌아보며 얼쑤 얼쑤라니.'


이내

'그래, 난 평화주의자야.
경쟁은 싫어한다고!'


몇 십분 동안 걸어온 길에도 수만 가지 의미를 찾아 코에 걸었다가 귀에 걸었다가 마음이 요동을 쳤다.


하나의 버킷리스트가 지워졌다.

아니,

하나의 버킷리스트를 클리어했다.


제주에서 하고 싶은 것이 없어지면,

그때쯤이면 홀가분하게 제주를 떠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가는 제주의 날씨는 습하고 바람은 강하다.

내가 예전에 알던 제주보다 더.

남자친구가 남편이 되면 이런 느낌인 걸까.

아직은 이것도 저것도 도저히 알 수 없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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