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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나동 May 28. 2023

바람 새는 공 ‘묻지마’ 교환…신뢰의 스웨덴

둘째가 국제학교에 다니며 쉬는 시간이나 방과 후교실에서 축구를 자주 하더니 재미를 붙였다.

부산에서 학교 다닐 때는 그 재미있는 축구를 왜 안 했냐고 물어보니 돌아오는 답이 어이가 없었다.

학교에 축구 골대가 아예 없다고 했다.

왜 그러냐고 다시 물어보니 답변이 더 충격적이었다.

몇 년 전 학교 축구 골대에 매달려 놀던 아이가 골대가 넘어지는 바람에 깔리는 사고가 있었다고.

그 이후로 학교 측이 아예 골대를 없애버렸다고 했다.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골대를 치워버리는 게 과연 상식적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골대가 넘어지지 않도록 하면 되는 것 아닐까.

사고 이후 그 학교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축구를 할 권리를 잃은 것 아닌가.


아무튼 둘째에게 축구공을 하나 사줬다.

인터넷으로 주문해 해당 오프라인 스포츠용품점으로 받는 방식이었다. 그래야 배송비가 없는데 스웨덴에서는 흔한 배송 옵션이다.

둘째가 공 차는 데 따라가 덩달아 공을 차보니 기분이 꽤 좋았다.

그런데 공에 바람을 넣고 사나흘 정도 지나면 어느새 공이 말랑말랑해져 있었다.

그때마다 펌프로 바람을 다시 넣곤 했는데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새 공을 산 지 한 달밖에 안 지났는데 공에 이런 하자가 있다면 제조사, 판매자의 책임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인터넷, SNS 검색을 해보니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근데 공을 사용한 지 오래된 경우가 많았다.


판매자에게 공식 A/S를 신청하려면 확실한 원인 분석이 필요했다.

공기주입구에서 바람이 셀 가능성이 큰 것 같아 물 몇 방울을 떨어트리니 기포가 하나씩 올라왔다, 빙고!

미세하게 바람 세는 축구공

증거는 잡았으니 이제 구매 입증을 해야 했다.

메일을 뒤져 주문, 배송 서류를 캡처해 뒀다.

그런데 주문날짜를 보니 한 달 전이 아니라 두 달 전이다.

A/S를 받아들일 것 같은 심리적 마지노선이 한 달이었는데 두 달 전에 샀다는 사실을 알고 의기소침해졌다.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축구공 상태와 주문 날짜 등을 넣어 스포츠용품 홈페이지에 질의하니 이런 경우는 보통 오프라인 판매점에서 공 상태를 보고 애프터서비스를 결정한다고 했다.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생각에 며칠 고민하다가 공을 배송받았던 스포츠용품점을 찾아갔다.

주문번호 등 구매 영수증 사진과 축구공 공기주입구에서 기포가 나오는 동영상까지 챙겼다.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구매한 지 두 달이 넘었다는 점에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그동안 부지런히 공을 차는 바람에 축구공 이곳저곳에 생긴 스크래치가 유독 눈에 잘 띄었다.

더군다나 공 색깔도 좀 누리끼리해진 것 같았다.


'구매기간이 오래됐다고 하면 뭐라고 대답하지?'

'이건 사용자 과실이라 A/S 대상이 아니라고 하면 어떡하지?'

걱정이 앞섰다.


에라 모르겠다 안 된다면 그냥 공 찰 때마다 바람 넣지 뭐.

축구공과 하자 동영상, 구매 서류 사진이 저장된 휴대폰을 꼭 쥐고 스포츠용품점으로 들어갔다.

카운터에 있던 콧수염이 멋졌던 직원에게 주섬주섬 공을 꺼낸 뒤 "Excuse me~ 두 달 전 인터넷 주문 후 이곳에서 공을 받았다, 여기에서 바람이..."


딱 여기까지 했을 때, 콧수염 직원이 나의 어설픈 영어 스피킹을 끊고 훅 들어왔다.

"바람 센다고? OK" "나 따라와" 이러는 게 아닌가.

난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공 바람 세는 동영상도 보여줘야 하고, 내가 여기서 공을 배송받았다는 영수증 사진도 안 보여줬잖아.

이 콧수염 직원은 내가 여기서 샀는지도 확인하지 않고 뭘 믿고 따라오라고 하는 거야?


직원 뒤를 따라가니 똑같은 축구공이 철망 상자 안에 무더기로 있었다.

콧수염 직원이 그 공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더니 같은 사이즈(내 건 5인데 4밖에 없었다)가 없다며 잠시 창고에 갔다 오겠다고 했다.

아... 뭔가 느낌이 싸했다.

창고에 같은 사이즈가 없으면 본사에서 같은 공으로 내려보내주고 다시 여기로 찾으러 오고 일주일 이상은 걸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0분 같은 1분이 지났다.

무상 업그레이드 교환 받은 새 공. 아디다스 티로 프로.

드디어 콧수염 직원이 창고에서 나왔다.

한 손에 공 하나가 들려 있었다.

"똑같은 사이즈가 없는데 이거 할래" 그런다.

"이게 네 거보다 더 좋은 거야. 400크로나 이상 비싼데 돈은 더 안 받을게" 그러는 게 아닌가.

나는 그 공을 보자마자 내가 산 공보다 훨씬 좋은 거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축구공 검색할 때 본 적이 있었다. 이 공은 성인 프로축구 경기에 사용되는 피파 공인구였다.)

이게 웬 떡인가 싶기도 하고 얼떨떨한 기분으로 얼른 고맙다고 말한 뒤 공을 받아 나왔다.

콧수염 직원 마음 바뀌기 전에.


이래도 되나 싶었다.

뒤돌아 보니 콧수염 직원은 웃으며 '바이'라고 했다.

아마 콧수염 직원은 점장님이 아니었을까 싶다.

일개 직원이었으면 그렇게 흔쾌히 상품 교환을 해주지 않았을 것 같았다.


바람 세는 축구공을 더 좋은 상품으로 교환받은 이야기를 길게 쓴 건 이 에피소드가 구성원 간의 신뢰와 믿음에 기반한 스웨덴 사회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줬다는 생각 때문이다.

무려 FIFA QUALITY PRO

얼마 전 리딩외 집주인 할아버지 댁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동네 주민 대부분이 문을 잠그지 않고 살았다고 했다.

남의 것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는 말이었다.

누군가 길바닥에 떨어진 장갑을 잘 보이도록 나뭇가지에 걸어놨다

한 번은 길거리에 누군가 떨어뜨린 장갑을 봤는데 몇 날 며칠이 지나도록 그 장소에 그대로 있었다.

누구 하나 들고 갈 법한데도 주인이 와서 잃어버린 장갑을 찾아갈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스웨덴에서는 몇 년 전부터 현금 없는 사회를 도입했는데 신용카드나 간편 결제의 일종인 스위시(Swish) 등을 많이 사용한다.

한 번은 맥주집에서 술값을 계산할 때 카드 단말기의 금액을 나 더러 직접 누르라고 해서 신기했다.

스위시를 사용할 때도 고객이 휴대전화 스위시 앱에서 직접 물건값을 기입한다.

손님이 금액을 잘못 적거나 고의로 적은 금액을 넣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도 고객과 손님을 믿는 거 같았다.

swish

의료혜택 등을 받을 수 있는 스웨덴 사회보험청(Försäkringskassan)에 가입할 때도 당사자 개인이 직접 연소득을 적게 돼 있다.

물론 거짓으로 적으면 처벌을 받거나 각종 수당을 다시 토해내야 한다는 각서란이 있기도 했지만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소득을 축소 신고할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소득 신고를 개인에게 맡기는 건 사람을 믿는다는 기본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같으면 이렇게 개인의 양심을 테스트하지 않고 국세청의 소득, 세금 자료를 공유하겠지만 말이다.   

내 가게로 축구공을 들고 온 건 네가 여기서 구입한 공에 무슨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믿음 말이다.

그래서 콧수염 점장님은 내가 준비한 주문 서류나 공에 바람이 세는 동영상 따위를 안 보고도 새 공으로 바꿔주는 아량을 베풀었을 것이다.

그것도 사이즈가 없으니 더 좋은 공으로.

스웨덴에서는 민간은 물론 공직 사회에서도 때때로 원칙을 벗어나 개인 사정에 따라 유연하게 일을 처리하는 분위기가 있는 듯했다. 안타깝게도 일처리는 제법 시간이 걸리는 편이다.


스웨덴에서는 구글에 이름을 검색하면 주소, 동거인 등의 개인정보가 나온다.

약간의 돈을 내면 전화번호, 재산, 소득 등을 알려주는 사이트도 있다.

개인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는 사회에서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게 현명할 거라는 생각마저 든다.


지난해 9월 스웨덴 총선거의 투표율은 84.21%였다.

스웨덴의 높은 투표율은 정치, 정치인에 대한 국민의 높은 신뢰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자전거를 타거나 캐리어를 끌고 출근하는 국회의원이 이상하지 않은 사회.

국민은 정치를 믿고 정치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정책으로 국민에게 보답하는 선순환이 구성원의 믿음을 더욱 공고히 하는 사회.

서로를 믿고 신뢰로 응답하는 사회 분위기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물론 이런 신뢰 사회의 허점을 악용하는 이들도 있다.

ICA, LIDL, COOP 등 대부분의 스웨덴 대형마트는 셀프계산대를 운영 중인데 육류를 비롯한 각종 식료품 도난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대형마트 측은 셀프계산대 운영으로 인건비와 고객 대기시간을 줄이려고 했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스웨덴에서 가장 많은 매장을 가진 ICA는 최근 몇 년간 식료품 도난이 증가하자 여러 곳의 셀프계산대를 폐쇄했고 최근엔 스톡홀름 쇠데르말름의 한 매장도 같은 이유로 폐쇄했다.

지난 1년간 결제되지 않고 사라진 상품이 이전 해보다 두 배 많은 900만 크로나(약 11억원)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Swedish Trade의 조사에 따르면 2021년 식료품 거래에서 전체 매출액의 2.5%인 45억 크로나(5526억원) 이상의 상품이 도난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많은 도난품은 육류였다.

이 비율은 매년 증가 추세다.

Swedish Trade가 조사한 스웨덴 식료품점의 절도 증가 추이 (사진=Dagens Nyheter)

어느 사회체제나 국가마다 항상 양면이 있기 마련이다.


리딩외센트룸의 INTERSPORT 콧수염 점장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새 공으로 바꿔줘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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