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설나동 Jun 19. 2023

일본어는 있는데 한국어해설은 없나요

시작은 단지 약간의 서운함에서 비롯됐다.

스웨덴 스톡홀름의 어린이를 위한 동화 속 세상 '유니바켄'(Junibacken)에 이메일을 보냈다.


메일을 보내게 된 건 유니바켄의 '동화 속 기차'(Sagotaget) 때문이었다.

이 기차는 세계적인 스웨덴 작가인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마지막 동화를 시각, 청각, 공감각적으로 구현해 놓은 체험공간이었다.

리프트에 타서 동화의 스토리텔링을 따라가면 마법의 세계가 펼쳐졌다.

방문할 때마다 그 세심한 디테일에 놀라곤 했다.

'동화 속 기차'는 리프트를 타고 경험하는 동화 속 마법의 세계다 (사진=유니바켄 홈페이지)

하지만 이 동화 속 기차를 탈 때 내레이션 언어를 골라야 하는데 한국어 해설이 없는 것이 유독 아쉬웠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육성이 흘러나오는 스웨덴어는 이해할 수 없어 결국 영어를 선택하곤 했다.

아이들은 영어 해설을 한 문장이라도 더 알아들으려고 귀를 쫑긋 세웠다.

그래, 영어 듣기 연습도 하고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 싶었다.

두 번, 세 번 가다 보니 안 보이던 부분이 보였다.

스웨덴어, 영어를 비롯한 몇몇 언어로만 오디오 가이드가 되는 줄 알았는데 제법 많은 언어로 해설이 가능했다.

한쪽 벽면엔 오디오 가이드가 되는 언어의 나라 국기가 그려져 있었다.

덴마크, 노르웨이, 폴란드, 에스토니아, 프랑스, 아랍, 스페인, 이탈리아, 스웨덴, 핀란드, 영국, 독일, 네덜란드, 러시아, 중국, 일본 등 무려 16개국의 국기가 있었다.

해외여행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많은 언어 해설을 지원하는 곳을 못 본 것 같다.

한편으론 이렇게 많은 언어를 지원하는데 한국어가 없는 것이 슬펐다.

사실 외국에서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를 지원하는 박물관, 미술관 등을 만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가본 곳 중엔 바티칸 시국의 성 베드로 대성당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에서만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를 지원했다.

반고흐 미술관의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 지원(사진=반고흐미술관 홈페이지)

성 베드로 대성당은 안내데스크에도 오디오 가이드 가능 언어를 국기로 그려놨는데 태극기가 나중에 추가된 모양새였다.

반 고흐 미술관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는 현대자동차에서 후원했다고 했다.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는 애초부터 필수가 아닌 선택인 것 같아 가슴 아팠다.


K-팝, 한국 영화, 드라마의 인기가 치솟으면서 외국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덩달아 한국어를 배우려는 이들도 많아졌다.

실제 CNN은 2023년 1월 글로벌 언어 학습 애플리케이션인 듀오링고(duolingo)의 조사 결과를 인용해 보도하면서 한국어가 지난해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 다음인 7번째로 많이 학습된 언어였다고 했다. 중국어, 러시아어, 인도어가 각각 8, 9, 10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런 인기와는 별개로 외국 관광지에서 여전히 한국어는 홀대받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유니바켄의 동화 속 기차 입구에 무려 16개국의 국기가 그려져 있는데도 태극기가 없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던 이유였다.

유니바켄 동화 속 기차 오디오 가이드 언어가 가능한 국기가 벽면에 그려져 있다

유니바켄 '동화 속 기차' 오디오 가이드 지원 언어를 보니 문득 어떤 기준으로 언어를 골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6개국 중 스웨덴이 포함된 EU나 유럽 국가는 총 13개국이었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EU나 유럽 국가 시민이 스웨덴에 많이 온다는 점에서 납득할 수 있었다.

그 외 나머지 3개 언어는 아랍어, 중국어, 일본어였다.

스웨덴에 살면서 중동지역 출신과 중국인을 많이 봤다.

아랍민족과 중국인들은 스웨덴 이민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듯했다.

이는 이민자 수와도 직결되는 문제일 것이었다.

반면 일본인들은 이들 민족만큼 많이 보진 못했지만 경제력 등 국제사회의 지위가 반영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유니바켄 관계자가 아닌 이상 그 기준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호기심에 스웨덴 이민자 통계를 한번 검색해 봤다.

역시 아랍어를 사용하는 시리아, 이라크, 이란 등 중동 국가들이 2022년 스웨덴의 아시아권 이민자 중 1, 2, 3위로 가장 많았다. 이 세 나라 이민자를 합하면 무려 43만명이 넘었다.

중국인 이민자는 38461명으로 7위였다.

유니바켄 측이 아랍어와 중국어 해설을 지원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계를 더 살펴보는데 놀랍게도 한국인 이민자는 11945명으로 13위였고 일본인 이민자는 3954명으로 21위였다.

스웨덴에서 일본인을 잘 보지 못했다고 생각해 왔지만 이민자 수가 한국의 3분 1 정도밖에 안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전부터 유니바켄 '동화 속 기차'를 타던 삼남매는 거의 매번 한국어 해설을 추가해 달라고 유니바켄 측에 요청하자고 했었다.

그때마다 ‘그래 한번 해보자’고 했지만 사실 난 큰 의지는 없었다.

한국어 해설을 추가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에 뭔가 그럴듯한 이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렇지 않다면 단순히 떼를 쓰는 것 이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2022년 스웨덴 아시아권 이민자 통계 스크롤을 끝까지 내린 순간 한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2년 스웨덴 아시아권 국가 이민자 통계 (출처=www.statista.com)

그래서 메일을 써서 보냈다.

아래는 유니바켄에 보낸 메일 내용이다.

영문을 다시 한글로 자동 번역한 거라 곳곳에 문맥이 어색한 부분이 많다.


-안녕하세요 저는 스웨덴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 김OO입니다.

저는 세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아내를 포함한 다섯 가족 모두 Junibacken의 연간 이용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5년 전 스웨덴을 여행할 때 Junibacken에 갔습니다. 지난해와 올해 4회를 포함해 총 5회를 다녀왔습니다.

주니바켄을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시설 곳곳에 아이들을 위한 깊은 배려가 담겨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Junibacken 같은 아이들을 위한 곳은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Junibacken에서 나의 세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단연 '동화의 세계로 가는 기차'입니다.

아마도 Junibacken을 방문하는 대부분의 방문객들은 이곳을 좋아할 것입니다.

내 가족은 Junibacken에 오면 제일 먼저 '동화열차'를 타고 다른 곳을 둘러봅니다.

벌써 5번은 봤지만 볼 때마다 새롭고 독특합니다.

디테일이 너무 정교해서 과연 어떻게 만들었는지 궁금할 정도입니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마지막 동화가 정말 현실적으로 잘 구현됐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동화열차'의 내레이션 언어 중 한국어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5년 전 Junibacken을 방문했을 때 한국어 해설이 없어서 아쉬웠는데, 4년이 지나 재방문한 지난해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동안 한국어 해설이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지만 역시나 한국어 해설이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영어나 스웨덴어 같은 몇 가지 언어만 있으면 이해할 수 있지만 '동화열차' 해설에는 총 16개 언어가 있습니다.

덴마크어, 노르웨이어, 폴란드어, 에스토니아어, 프랑스어, 아랍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스웨덴어, 핀란드어, 영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러시아어, 중국어 및 일본어.

이렇게 해설 언어가 많다는 것은 다양한 국적의 아이들이 동화열차의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어는 없습니다.

2022년 기준 스웨덴에 거주하는 외국인 이민자 통계를 보면 한국인은 11,945명입니다. 아시아 국가 중 13위입니다.

'동화열차'의 설명 언어 중 아시아권 언어는 중국어와 일본어뿐입니다.

스웨덴의 중국 이민자 수는 38,461명으로 7위입니다.

일본 이민자 수는 3,954명으로 21위입니다.

스웨덴에 사는 일본인은 한국인보다 적습니다. 하지만 '동화열차' 해설 언어로 한국어는 없고 일본어만 있습니다.

물론 junibacken 운영진이 '동화열차'의 해설 언어를 만들 때 고려한 기준이 있을 것입니다.

그 기준이 틀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스웨덴에 살거나 여행 온 한국인들이 Junibacken에서 '동화열차'를 타면 린드그렌의 동화를 더 잘 이해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것이 평생 아동 권리와 평등을 위해 싸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정신에 접근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웨덴 사람들은 매우 합리적이고 사려 깊고 세계의 양심 역할을 해왔다는 것을 과거로부터 잘 알고 있습니다.

제 메일을 잘 검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한국어 해설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한국어 해설을 만드는 데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주스웨덴 한국대사관에 연락을 취하거나 더빙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등 모든 노력을 다할 수 있습니다.

Junibacken의 행운을 빕니다.-


메일을 보낸 지 5일이 지났다.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수신인인 유니바켄 CEO와 마케팅 홍보 담당자 중 누구라도 읽었으면 좋겠다.

존재감 없는 일개 방문객의 메일이라 휴지통으로 직행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메일을 보낼 때는 의기충천했는데 이제는 안 되면 안 된다는 답장이라도 받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아이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유니바켄이 아닌가. 진심은 통한다고 믿는다.

행정 처리가 늦은 스웨덴 사회에서 겪은 것처럼 나도 영업일 기준 10일(보통 2주) 정도는 기다려볼 생각이다.

이전 09화 바람 새는 공 ‘묻지마’ 교환…신뢰의 스웨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