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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나동 Jun 24. 2023

"스웨덴 왔는데 노벨상시상식은 가야지?"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일이긴 했다.


스웨덴에 오면서 우리 가족이 가고 싶은 행사 중 하나는 노벨상 시상식이었다.

별다른 고민 없이 노벨상 시상식은 누구든 참석할 수 있는 행사라고 생각했었다.

열린 시상식이야말로 노벨상 수상자들이 진정 대중에게 축하받는 자리일 테니까라는 혼자만의 인식이 있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그러다 2022년 12월 노벨상 시상식 며칠 전 아내가 물었다.

"노벨상 시상식 갈 순 있는 거지?"

나는 "그냥 가면 되는 거 아냐. 우리도 축하하러 가야지"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 말이 얼마나 바보 같은 건지 알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국에서 뉴스를 통해 노벨상 수상자 소식만 간략하게 듣곤 했지, 시상식에 대한 정보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노벨상 시상식은 그야말로 선택된 자들만 갈 수 있는 젠틀하고 엘레강스한 격조 높은 행사였다.

그걸 스웨덴에서 와서 시상식 한번 가보겠다고 나대다가 그 사실을 알고 부끄러웠다.

노벨위원회는 시상식에 참석할 인원을 나라별로 정식 초청했다.

과학이나 의학 등 관련 단체에 초청인원을 알리면 해당 단체가 시상식에 참석할 개인을 한림원 측에 통보하는 식이었다.

시상식 초청자(초청자는 배우자 등 1인 동반이 가능하다)는 시상식 며칠 전 스톡홀름에 도착해 한림원 측이 마련한 숙소에서 머물다가 시상식에 입고 갈 연미복이나 드레스를 맞춘다.

노벨상 시상식 참석자는 엄격한 드레스코드를 지켜야 한다 © Nobel Media. Photo: Alexander Mahmoud

스톡홀름을 둘러보는 등 개인 자유시간을 보낸 뒤 맞춘 의복을 입고 시상식에 참석한다.

항공료, 숙박료, 의상비 등 전액을 한림원 측이 부담한다.

시상식에는 스웨덴 국왕을 비롯한 각계 인사들이 참석한다.

노벨상 시상식에 초청되는 자체가 가문의 영광인 셈이다.

그런 곳에 아무나 갈 수 있는 행사 아니냐고 큰 소리를 쳤으니 면목없었다.

2022 노벨상 시상식이 열린 스톡홀름 콘서트홀

노벨상 시상식 초청은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가보고 싶었다.

시상식 주변에서 그 분위기라도 느껴보려고 온 가족이 총출동했다.

노벨상 시상식이 열리는 곳은 회토리엇(Hötorget) 역 부근의 스톡홀름 콘서트홀(Konserthuset Stockholm)이었다.

예전엔 스톡홀름 시청사에서 열리다가 이곳으로 변경됐다고 했다.

평소 다양한 공연이 열리는 곳이고 그 앞 광장은 평소 벼룩시장이 선다.

이날 콘서트홀 앞 광장은 통제된 상태였고 주변 도로 인도까지만 접근이 허용됐다.

초청자들이 행사장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고 귀빈을 태운 행사차량도 오갔다.

마치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이 열리는 영화의전당 같은 느낌이었다.

치마 끌릴라 드레스 부여잡고 걷는 시상식 초청자

눈길을 끈 건 화려한 의상을 입은 여성 초청자들이 긴 드레스가 땅에 끌릴까 부여잡고 종종걸음으로 행사장으로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신데렐라 같았다.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초청되거나 티켓을 구한 이들은 연미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격식 있는 의복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노벨상 시상식 초청자 전원은 행사 전 맞춘 의상을 입고 와 마치 중세시대 왕족 행사 같은 느낌도 들었다.

초청자 대부분에게 일생에 한 번뿐인 경험일 노벨상 연회나 시상식 참석을 위해서는 엄격한 복장 규정이 적용된다고 했다.

노벨상 시상식 구경나온 사람들

주말이면 벼룩시장이 열리던 회토리엇(Hötorget) 역 주변이 노벨상 시상식으로 인해 고급스러운 분위기로 변신했다.

그리스 신전 같은 여러 기둥으로 장식된 스톡홀름 콘서트홀은 화려한 조명으로 치장돼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통제선 밖에서 초청객과 행사장을 바라보고 때로는 기념사진도 찍었다.

다양한 조명으로 치장된 시상식장 건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무척 설레었다.

우리도 시상식장을 배경으로 기억에 남을 한 컷을 남겼다.

노벨상 시상식 귀빈을 태우는 전용 차량과 시상식 후 연회가 열리는 스톡홀름 시청사로 참석자를 데려갈 버스

행사장 옆 도로엔 시상식이 끝나면 천명이 넘는 초청자들을 연회가 열리는 스톡홀름 시청사로 태워갈 시내버스가 전광판에 'Nobel 2022'라는 글자를 띄운 채 대기하고 있었다.

시상식은 노벨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 문학상, 경제학상 수상자가 차례로 나와 칼 16세 구스타프 스웨덴 국왕으로부터 노벨상 메달과 증서를 받는 것이 하이라이트다.

시상식에 앞서 수상자는 공개 강연 등으로 대중과 만나는 시간도 가졌다.

상금은 1천만 크로나(약 12억3천만원)였다.

벤 버냉키가 받은 노벨경제학상 증서. 왼쪽 스톡홀름 시청사를 그린 수채화가 인상적이다 © The Nobel Foundation 2022

나중에 시상식 재방송을 보니 한때 미국 주식에 관심을 가지며 알게 된 벤 버냉키 전 미국 연준 의장이 노벨경제학상을 받아 반가웠다.

노벨문학상은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가 수상했다.

한림원 측은 선정 이유로 “개인적인 기억의 뿌리와 소외, 집단적인 구속을 드러낸 용기와 꾸밈없는 날카로움”을 들었다.

주로 자전적인 소설을 많이 썼다고 하는데 한 권 빌려 읽어보니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아니 에르노 © Francesca Mantovani - Editions Gallimard

시상식이 열리는 12월 10일은 알프레드 노벨의 기일이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은 화학자, 발명가, 엔지니어, 작가, 기업가 등 다양한 직업을 가졌다.

죽기 전 3,100만 크로나(현재 약 2억 6,500만 달러)를 남기며 물리학, 화학, 생리학 또는 의학, 문학 및 평화 분야의 상금으로 사용해 달라고 유언을 남긴 것이 노벨상의 시작이었다.

재미있는 건 노벨상 각 분야 후보자 이름은 50년이 지나야 공개되는 점이다.

노벨평화상의 경우 수상자 상당수가 논란이 많은 정치행위자나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처럼 국제, 국가 분쟁에 관여한 이가 많아 해당 국가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노벨상은 1960년대까지는 거의 유럽, 미국인들만 수상해 비판을 받았다.

유튜브로 중계되는 2022 노벨상 시상식

시상식 초청자에겐 노벨상 시상식 참석도 색다른 경험이겠지만 스톡홀름 시청 블루홀에서 열리는 연회가 더 기대될 거 같았다.

블루홀을 가득 채운 1천명 이상의 초청자들은 본 식사에 앞서 먹는 전채요리, 본 요리, 디저트 등 풀코스로 이어지는 만찬을 대접받기 때문이었다.

만찬 메뉴는 행사가 끝날 때까지 공개되지 않아 신비감을 더했다.

스웨덴 TV로 생중계되는 노벨상 시상식 만찬

2022년 노벨상 만찬 메뉴는

해초로 구운 파이크 퍼치와 토마토 속을 채운 마리네이드 한 파이크 퍼치, 파슬리 에멀션,

콜라비, 딜 시드 펄과 플라워 크리스프를 곁들인 브레드 스파이스


곰보버섯과 세이지로 속을 채운 스웨덴산 사슴고기, 냉압착 유채씨유와 겨자씨를 곁들인 황금 비트, 예루살렘 아티초크와 타임 에멀전, 감자 테린과 스타아니스를 곁들인 야생 사냥감 그레이비


스타아니스, 자두 크림, 미라벨 머랭, 귀리 크리스피로 맛을 낸 구운 치즈케이크와

자두 콩포트, 생강 맛 미라벨 셔벗

이었다고 한다.

만찬 메뉴는 매년 다르고 스칸디나비아에서 난 재료가 꼭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뭔가 으리으리했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스타터, 메인요리, 디저트, 메인요리 (© Nobel Prize Outreach. Photo:Dan Lepp)

만찬에 곁들일 와인, 커피, 차, 코냑 등도 제공됐다.


와인은

2012 Champagne Legras & Haas Blanc de Blancs Grand Cru, France

2021 Grattamacco Bolgheri Rosso, Tuscany, Italy

2021 Brännland Iscider, Västerbotten, Sweden

였다고 한다.

만찬 메뉴를 보니 정말 일생에 단 한번 초청받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2022 노벨평화상 수상자들 © Nobel Prize Outreach, photo: Jo Straube

노벨평화상 시상식은 3시간 앞서 노르웨이 오슬로 시청사에서 열렸다.

코로나로 2년간 시상식이 열리지 않아 2022년엔 총 3명이 수상했다.

수상자는 벨라루스 인권운동가 알레스 비알리아츠키, 러시아 시민단체 '메모리알', 우크라이나 시민단체 '시민자유센터'였다.

2000년에는 우리나라 김대중 전 대통령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감라스탄 노벨박물관에는 김 전 대통령 관련 물품이 전시돼 있다.

노벨평화상 시상식이 스웨덴 아닌 노르웨이에서 열리는 건 노벨의 유언에 따라서라고 한다.

노벨 물리, 화학, 경제학상은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가, 생리의학상은 카롤린스카 연구소의 노벨 의회, 문학상은 스웨덴 한림원, 평화상은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각각 수상자를 선정한다.

5년 전 스톡홀름 여행 때 노벨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당시 초딩 1학년인 첫째가 쓴 후기. 전쟁이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4년만에 러시아전쟁이 일어났다 ㅠ

유튜브 생중계로 평화상 시상식을 봤는데 축하공연 노래가 기억에 남았다

찾아보니 노르웨이 가수인 Astrid S의 'Favorite Part of Me'였는데 멜로디가 좋고 가사도 와닿았다.


노벨상 시상식 엿보기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삼남매에게 "엄마 아빠도 노벨상 시상식에 한번 초대받으면 정말 좋겠다"고 말했다.

둘째가 "어떻게 하면 초청받을 수 있는데?" 묻더니 이내 "내가 노벨상 받으면 가족은 당연히 올 수 있는 거 아냐" 그런다.

말만 들어도 고맙다. 그 꿈이 꼭 이뤄지길 기대한다.


# The Nobel Prize 홈페이지를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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