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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나동 Jun 20. 2023

1200km를 날아 진심과 진심이 만나면

부활절 연휴였던 2023년 4월 9일.

이날은 안타까운 이별을 한 막내와 유치원 절친 엘리엇이 두 달 만에 재회하는 날이었다.

아내와 난 스웨덴에서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이사 간 엘리엇과 막내를 만나게 해 주려고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구글 지도맵을 보니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독일 프랑크푸르트까지 직선거리는 1200km였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해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목적이 있는 여행은 그 목적이 달성될 경우 남은 여행이 매우 여유로워진다는 것을 이번에 경험했다.

만약 그 목적이 이뤄지지 않더라도 여행 그 자체로 어른과 아이 모두 저마다 만족할 만한 요소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난 막내 덕분에 독일 분데스리가 축구 경기를 본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이 충분히 즐거웠다.)


그리고 어른의 시각에서 아이들의 애틋한 우정을 재단하고 싶지 않았다.

누굴 보고 싶은 마음은 그 자체로 순수한 거라고 생각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약속 장소인 프랑크푸르트 동물원으로 갔다.

당사자가 아닌 내가 다 긴장이 됐다.

막내와 엘리엇은 기분이 어떨까.

동물원 입구를 지나 매표소 건물로 들어갔다.

저 멀리 유치원에서 자주 봤던 엘리엇의 모습이 보였다.

두 달여 만에 만난 유치원 절친 막내와 엘리엇의 애틋한 포옹

막내와 엘리엇은 보자마자 달려가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둘 사이엔 대기 줄 펜스가 놓여 있었지만 그런 건 하등 상관없었다.

펜스 위로 꼭 껴안은 둘의 모습은 뭔가 울컥했고 감동적이었다.

어떤 장애물도 우릴 가로막을 수 없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듯했다.

펜스 사이에 두고 꼭 껴안은 막내와 엘리엇

우리 가족, 엘리엇 가족 모두 둘의 극적인 상봉을 그저 숨죽인 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부둥켜 앉은 둘은 마침내 서로의 얼굴을 찬찬히 확인하며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이 장면 하나에 독일에 오기 전까지 했던 고민이 한순간 다 부질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맞잡은 손. 지금 생각해도 너무 울컥한다

그제야 우리와 엘리엇 가족은 서로 그간의 안부를 묻고 인사했다.

우린 모든 가족이, 엘리엇네는 엄마와 할머니가 출동했다.

이날 주인공은 막내와 엘리엇이었기에 첫째 둘째와 나는 따로 동물원을 구경했다.

아내한테 들으니 둘은 계속 손을 꼭 맞잡은 채 장난치고 오랜만에 정말 재미있는 시간을 보낸 듯했다.

우리 가족이 스웨덴에서 독일로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엘리엇 할머니는 이날 꼭 두 아이의 만남을 보고 싶다며 같이 오셨다고 했다.

엘리엇 할머니는 둘을 보고 있으니 자꾸만 눈물이 날 거 같다고 아내에게 말했다고 했다.

그 말씀에 100% 공감했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엘리엇과 함께 와주신 그 마음이 정말 고마웠다.

엘리엇은 이날 저녁 "독일에 온 이후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라고 엄마한테 말했다고 한다.

나와 아내한테는 그 어떤 말보다 값지고 고마운 말이었다.

막내는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졌다.

프랑크푸르트 동물원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막내와 엘리엇

다음 날 막내와 엘리엇은 스웨덴으로 치면 스칸센 같은 프랑크푸르트 근교에 있는 Freilichtmuseum Hessenpark에서 놀았다.

고맙게도 엘리엇 엄마는 숙소 앞까지 와서 아내와 막내를 태워서 갔다.

역시 첫째 둘째와 나는 이날도 따로 놀았다.

둘의 알콩달콩 만남을 못 봐 아쉬웠지만 나름 우리끼리 재미있게 프랑크푸르트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이틀 연속 강행군에 힘들었는지 엘리엇과 막내는 오후에 예상보다 일찍 헤어졌고 우리가 숙소로 돌아갔을 땐 막내는 이미 잠든 뒤였다.

독일 Hessenpark에서 재미난 하루

세 번째 만남은 하루 이틀 정도 쉬고 보기로 했다.

프랑크푸르트 인근 도시 슈투트가르트에서 만날 계획이었다.

엘리엇네도 못 가본 도시라고 해서 재미있는 시간이 기대됐다.

하지만 엘리엇 가족에게 갑작스러운 사정이 생겼고 세 번째 만남은 이뤄지지 못했다.

야속하게 프랑크푸르트에서의 6일은 화살처럼 지나가버렸다.

놀이터에서의 마지막 재회

프랑크푸르트를 떠나는 마지막 날 엘리엇과 막내는 우리 숙소 근처 공원에서 마지막으로 재회했다.

우리 가족이 네덜란드행 열차를 타기 전 엘리엇 엄마가 엘리엇을 데리고 온 것이었다.

막내는 엘리엇과 놀이터에서 짧지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아쉬운 작별을 해야만 했다.

마지막 순간 막내와 엘리엇은 첫 날 만났을 때처럼 꽤 오래 뜨거운 포옹을 했다.

마지막 포옹,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행인이 이 모습을 보고 미소 짓고 있다

헤이그행 열차에 몸을 실은 뒤 여러 감정들이 교차했다.

사실 관광 목적이 아닌 누구를 만나러 여행을 떠난다는 게 한편으론 무모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린 진심인데 정작 상대방이 우리만큼 진심이 아닐 수 있었다.

물론 그렇지 않다고 해서 서운하지는 않았다. 애초부터 우리가 결정한 선택이었으니까.

상대방 상황과 처지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우리만 들떠서 온 게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엘리엇 엄마는 아내가 독일로 간다고 말한 뒤 우릴 위해 부활절 연휴를 모두 비워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막내와 엘리엇이 만나면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고 어디에서 놀지를 고민했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우리의 진심과 엘리엇네의 진심이 만났을 때 행복했고 여행 오기 참 잘했다 싶었다.

엘리엇은 프랑크푸르트 마지막 재회 때 엄마에게 우리 막내랑 "결혼할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엘리엇 엄마는 웃으며 "좀 많이 큰 다음에"라고 했다는 전언이었다.


엘리엇과 막내의 프랑크푸르트 회동 이후 5일 만에 엘리엇 엄마가 아내한테 문자를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엘리엇이 막내를 보고 싶다고 울어서 같이 껴안고 울었다고 했다.

막내와 엘리엇은 영상통화를 하면서 프랑크푸르트 만남 이후 못다 한 회포를 풀었다.

영상통화에서 엘리엇 집 냉장고에 막내랑 엘리엇이 이번에 같이 찍은 사진이 붙어 있는 게 보였다.

통화 뒤 막내는 엘리엇이랑 잘 대화할 수 있도록 영어를 더 잘하고 싶다고 말했다.


두 아이의 인연이 어디까지 이어질까.

만날 기회가 있다면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게 어른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못 만나게 될 수도, 서서히 기억이 희미해질 수도 있다.

그래도 잊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꼭 만날 수 있다고 믿는다.


안녕, 엘리엇. See you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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