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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나동 Jul 10. 2023

유료화장실 돈 내고 이용하면 바보?

스웨덴 스톡홀름 중심가의 한 유료화장실.

급한 마음에 10크로나(약 1,200원)를 내고 유료화장실을 사용한 뒤 문을 열었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 못 본 두 여성이 서 있었다.

두 여성은 닫히려는 화장실 문을 탁 잡더니 서로 먼저 들어가라고 양보했다.

실랑이 끝에 한 여성이 화장실로 들어가며 다른 여성에게 고맙다고 했다.

돈은 내가 냈는데 이 사람들 뭐 하는 거지?

이 여성들은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서로 인심 쓰듯 차례를 양보하고 고맙다고 했다.

이래도 되나.


그래도 된다.

스톡홀름에서 유료화장실을 무료로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유료화장실 신용카드 결제기. 보통 요금은 5크로나다

화장실이 대개 무료인 한국에 살다가 스웨덴에 오니 돈 내고 용변을 봐야 하는 야박한 인심에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대체로 우리 돈 천원이 채 되지 않는 요금이긴 하지만 유료화장실을 이용할 때마다 빈정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복지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는 사회민주주의 국가 스웨덴에서 화장실 복지가 이렇게 형편없나 싶어 처음엔 실망도 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스웨덴 화장실 문화에 빨리 적응하는 게 관건이었다.

특히 우리 집엔 내장기관이 새처럼 짧은지 마시고 돌아서면 화장실을 찾는 '조류 인간'이 둘 있다.

그 때문에 외출만 하면 항상 긴장 상태고 화장실 위치를 미리 알고 있어야 마음이 편했다.

스톡홀름 화장실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였다.

스톡홀름 롭스텐역 인근 공중화장실

스톡홀름에는 1885년 17개, 1930년 14개, 1960년 32개, 1987년 14개의 공중화장실이 있었다고 한다.

화장실 개수는 사회 상황에 따라 들쭉날쭉했지만 많지 않았다는 건 분명했다.

도심에 공중화장실이 부족하자 대중들이 당국에 해결책을 요구하기도 했다.

1920년에는 스웨덴 최초의 여성 의사인 카롤리나 비더스트룀을 비롯한 여성들이 남성 전용 소변기만 많고 칸막이가 있는 남녀공용 화장실이 많이 없다며 여성을 위한 무료화장실 설치 동의안을 시의회에 제출했다.

1900년경 스톡홀름 그랜드호텔 앞에 설치된 공중화장실 (사진=스톡홀름 시립 박물관)

이후 무료 공중화장실이 일부 설치되긴 했지만 화장실 내부에 음란한 그림이나 낙서가 그려지고 글을 남겨 동성애 만남의 장소 채널로 활용되는 등 부작용이 심각했다.

이 때문에 두 달에 한 번 정도 화장실 내부 벽을 재도색해야 해 시설 유지비용이 많이 들자 1955년 공중화장실 옆에 키오스크를 설치해 돈을 받고 화장실 문을 열거나 열쇠를 빌려주는 유료 운영체제로 전환했다.

이것이 스톡홀름 유료화장실의 시초였다.

이후 키오스크 화장실은 동전 결제, 문자메시지(SMS)를 이용한 결제로 진화해 오늘날의 신용카드 결제 형태에 이르렀다.

유료화장실 전환은 기존 무료화장실이 마약 투약, 범죄, 노숙자 아지트 등으로 이용돼 화장실 이용자들의 접근성을 떨어뜨리는 것도 한몫했다고 했다.

1900년경 스톡홀름 Hötorget의 공중화장실 (사진=stockholmskallan)

스톡홀름 시에 따르면 2023년 현재 스톡홀름 전역에 지자체가 만든 약 40개의 유료 공중화장실이 있다.

이용 요금은 5크로나(약 700~800원)다.

스톡홀름 면적이 188제곱킬로미터인데 4.7제곱킬로미터당 1개꼴의 공중화장실이 있는 셈인데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다.

술집 손님과 노숙자가 많이 모이는 슬루센(Slussen)과 미드볼야톨옛(Medborgartorget)엔 무료화장실이 없어 한때 시민 원성이 자자했다.

심지어 공중화장실 부족으로 사람들이 개 놀이공원이나 주변 나무 덤불 속에까지 들어가 용변을 봐 문제가 된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스톡홀름시의 공중화장실 지도 (사진=스톡홀름 시 홈페이지)

상황이 이렇자 2014년 다수당이 된 사회민주당, 녹색당 등 좌파연립정부가 무료화장실을 짓겠다는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그 연장선에서 스톡홀름 시는 한 업체에게 10년간 350개 공공장소의 외부광고판 사업 권한을 주고 그 대가로 무료화장실을 짓도록 했다.

2019년까지 이 업체는 스톡홀름에만 66개의 무료화장실을 만들었다.

기존 40개의 유료화장실을 포함해 스톡홀름에 현재 약 100개의 무료화장실이 있었다.

스톡홀름 시는 손 안 대고 코 풀듯 관리하기 어려운 공중화장실을 아웃소싱한 셈이었다.

이 화장실은 주기적으로 무인 셀프 관리와 청소를 한다고 하는데 직접 사용해 본 결과 그다지 깨끗하지 않았다.

최대 사용시간은 20분. 그 이상 경과하면 자동으로 문이 열린다고 했다.

노숙자가 화장실을 차지하거나 자는 부작용을 막기 위해서일 거라고 추측했다.

스톡홀름시가 아웃소싱해 설치한 무료화장실

생김새는 기존 스톡홀름 공중화장실과 달라 처음엔 화장실인 줄 몰랐다.

스톡홀름 시민 역시 아웃소싱으로 지어진 화장실 건설 초반엔 이 건물의 정체를 몰라 사용하는 사람이 많이 없었다고 했다.

2021년 11월 19일 세계 화장실의 날 이 업체는 가장 가까운 무료화장실을 찾을 수 있는 앱을 만들어 공개했다.

아주 깨끗하지 않지만 공중화장실 귀한 스톡홀름에서 이 무료화장실이 가지는 의미는 상당했다.

우리 집 '조류 인간'들의 쾌적한 생활을 위해 외출하면 스톡홀름 시의 화장실 지도와 이 앱을 비교해 화장실 위치를 알아두곤 했다.

내 머릿속에 스톡홀름은 화장실 위치로 기억된 도시이기도 했다.

JCDecaux가 스톡홀름에 만든 무료화장실 지도 (사진=JCDecaux 홈페이지)

T-센트랄렌역 등 최근 지어진 사설 화장실이나 백화점 등 쇼핑시설 화장실은 10, 15크로나까지 요금이 다소 비쌌다.

더군다나 지하철 개찰구처럼 출입문이 생겨 꼼수를 부릴 수 없어 얄짤없이 요금을 내야 했다.

예외가 있긴 하지만 백화점이나 큰 쇼핑몰에서 화장실 문호를 개방하지 않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입점한 카페와 음식점 손님이더라도 급하면 돈을 내고 화장실을 갈 수밖에 없는 것이 한국인 정서상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시설 깨끗한 화장실을 개방하는 NK백화점은 화장실 부족한 스톡홀름에서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였다.

사실 카페나 패스트푸드점 등에서 간단한 메뉴를 주문하고 화장실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마음 편했다.

일부 패스트푸드점은 화장실을 열어두기도 했지만 대개는 문을 잠가두고 비밀번호로 열리도록 했다.

급하면 이리저리 헤매지 말고 유료화장실을 이용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유료화장실도 못 찾겠다 싶으면 어디든 들어가서 양해를 구하는 것이 불상사를 막는 지름길이었다.

요금 15크로나인 T-센트랄렌역 공중화장실 (사진=위키피디아)

스톡홀름 근교에 있는 마리에프레드에 갔을 때다.

삼남매가 모두 화장실이 급한데 주변에 화장실이 보이지 않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아내가 근처에 있던 스태드미션(Stadmission) 세컨드핸즈숍에 아이들을 데리고 무작정 들어갔다.(스태드미션은 중고물품거래 등의 수익으로 노숙자 지원 사업 등을 하는 비영리단체다.)

아내는 얼굴이 사색이 된 삼남매와 함께 매우 미안해하며 '화장실을 좀 이용할 수 없겠느냐'고 말했다.

그때 스태드미션 직원이 한 말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얼마든지 사용해도 된다.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다."


스태드미션 직원 말에서 화장실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믿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남이 돈을 냈지만 닫히는 유료화장실 문을 탁 잡고 땡큐 하며 들어갈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와 연결됐다.

이번엔 내가 화장실 요금을 냈지만 다음엔 다른 사람의 덕을 볼 수 있다는 그런 믿음 말이었다.


남녀가 같이 사용하는 화장실 문화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백화점이나 쇼핑몰, 문화시설 등엔 대체로 남녀 구분 화장실이 있었지만 공용화장실을 쓰는 곳도 많았다.

특히 마라톤 대회에서 경험했던 화장실 체험은 어색하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간이화장실 5~6개 정도마다 기다란 줄이 하나씩 만들어졌는데 남녀가 같이 줄을 서고 순서대로 비는 화장실을 찾아 들어가는 형태였다.

마라톤 출발 시간은 다가오는데 줄이 너무 길어 조마조마했지만 생각보다 빨리 줄이 짧아졌다.

남녀가 같이 줄을 서는데 기분이 좀 이상했다.

스톡홀름 쿵스홀멘 마라톤 대회 시작 전 화장실 풍경. 남녀가 같이 줄을 서 있다.

남녀 신체구조 차이로 남자 화장실이 좀 더 지저분할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남녀가 같이 화장실을 사용한다고 생각하니 왠지 평소보다 조심해서 이용했다.

청결 등의 이유로 여자들이 남자보다 남녀 공용 화장실 사용에 반대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한 스웨덴 여성이 공연 휴식 시간 때 문화시설의 남녀 화장실을 공용으로 사용하면 시간을 더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신문에 의견을 낸 걸 보고 효율의 관점에서 여성들이 남녀 공용 화장실을 선호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또한 남자와 여자를 차이로 구분 짓는 것이 아니라 어차피 똑같은 인간이라는 동질성에 초점을 맞추는 관점이 남녀공용 화장실 문화에 녹아있는 듯했다.

더 나아가 성평등을 강력히 지지하고 구현해 온 스웨덴 사회의 기초가 반영된 결과였다.

버스, 지하철 운전사를 비롯해 한국에서 남성 전유물이라고 생각해 온 직업 상당수에서 여성이 실력을 뽐내고 있으며 내각이나 국회의원 여성 비율은 절반에 근접한 46~47%대다.

직장, 임금에서 남녀평등을 실현시켜 나가고 남성의 신체, 성폭력에 대해서도 여성을 보호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왔다.

2018년 스웨덴 의회는 폭력이나 위협이 없더라도 명시적인 동의가 없는 섹스는 강간이라고 명시하는 새로운 성적 동의법을 채택했다.

1999년엔 성매매 금지법을 만들었는데 성 제공자를 제외한 성 구매자만 처벌하는 최초의 법률이었다.

스웨덴의 남녀 공용 화장실 문화는 이런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토대 위에 나타난 사회현상이라고 볼 만했다.

단순히 남성이 여성에게 시혜를 베풀 듯 만들어진 제도가 아니라 남녀가 동등한 인격체라는 인식, 여성 권리와 인권 신장의 스웨덴 역사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스톡홀름시 홈페이지, JCDecaux 홈페이지, 위키피디아, stockholmskallan, www.mitti.se, www.svt.se, sweden.se를 참고했다.)


스톡홀름 시 공중화장실 지도 https://trafik.stockholm/gator-torg/offentliga-toal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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