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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나동 Jun 21. 2023

'볼보의 나라' 유별난 미국 올드카 사랑

'여기 쿠바야? 미국이야?'


2023년 6월 초 스웨덴 스톡홀름 서쪽으로 70km 정도 떨어진 쇠데르만란주 마리에프레드(Mariefred)에 갔을 때다.

도중 고속도로에서 올드카 두어 대를 마주쳤다.

그 차들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포스가 강렬했다.

선글라스를 낀 운전자가 창문을 연 채 클래식 자동차를 운전하는 모습은 차에 붙은 스웨덴 국기가 아니었다면 여기가 미국인지 쿠바인지 헷갈리게 만들 정도였다.

관리가 잘 된 올드카도, 군데군데 녹이 슨 빈티지 올드카도 나름대로 매력 있었다.

중간에 잠시 들른 마트에서도 이름을 알 수 없는 올드카가 주차돼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여러 올드카를 봐서 행운이었고 눈 호강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배우 류준열과 이제훈이 쿠바에서 올드카를 타고 여행했던 어느 방송도 문득 떠올랐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마리에프레드에 도착하니 중심도로에 올드카들이 마치 퍼레이드라도 하는 것처럼 줄줄이 지나갔다.

마을 곳곳에서 올드카들이 출몰했다.

오다가 본 올드카는 새발의 피였다.

색깔도 검정, 빨강, 연파랑, 풀색, 아이보리색, 연한 청록색, 금황토색 등 다양했고 차 형태도 천정이 열리는 컨버터블을 비롯해 클래식 자동차,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초창기 자동차까지 있어 눈이 즐거웠다.

외관만 클래식 카가 아니라 부드럽게 도로를 미끄러져 나가는 모습에 관리가 잘 된 차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스톡홀름 도로에서도 종종 올드카를 보곤 했는데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었다.

대부분 울룩불룩한 근육이 연상되는 큰 차체의 미국 올드카인 듯했다.

세계에서 미국 올드카가 가장 많은 나라는 쿠바다.

생산된 지 60~70년 된 올드카 6만여대가 아직 현역으로 도로에서 운행 중이라고 한다.

쿠바의 경우 수십 년간 미국의 경제 봉쇄로 자동차 수입이 중단돼 기존 차를 어쩔 수 없이 고쳐 쓰느라 올드카가 많지만, 그런 상황도 아닌 스웨덴엔 왜 올드카가 많은 걸까.


모빌리티스웨덴(mobilitysweden.se) 통계를 보면 2021년 스웨덴 전체 등록차량 498만6천750대 중 30년 이상 연식 차량은 4.2%인 21만51대였다.

특히 37년 이상 된 차량은 14만5천309대(2.9%)에 달했다.

스웨덴에서 차령 30년 이상 올드카가 100대 중 4대, 37년 이상 올드카는 100대 중 3대꼴인 셈이었다.

올드카를 딱 부러지게 정의하기 쉽지 않지만 보통 30년을 기준점으로 삼는 이들이 많은 것 같았다.

30년 이하 오래된 차는 영타이머, 30년 이상은 올드타이머로 구분하는 흐름도 있었다.

그리고 차령 30년 이상의 잘 관리된 차를 클래식카라고 부르기도 했다.

스웨덴 올드카 중 잘 관리된 차량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으나 올드카 비율이 상당히 높은 건 분명했다.

자동차 메이커별로 보면 1952년 설립된 영국 스포츠카 제조업체인 로터스(Lotus)가 400대, 페라리 413대, 마세라티 450대, 벤틀리 451대, 롤스로이스 521대, 링컨 1천96대, 오스틴 힐리(Austin-Healey) 1천185대, 트라이엄프(TRIUMPH) 1천233대, 뷰익 5천379대, 알파 로메오 5천765대, 닷지(6천440대), 폰티악(6천754대), 캐딜락(9천165대), 클라이슬러(1만605대), 포르셰 1만5천504대 등이었다.

(2002년 한국 GM에 인수된 뒤 2007년 역사 속으로 사라진 대우(DAEWOO) 자동차 793대가 통계 속에 끼어있어 흥미로웠다.)

이 수치는 순전히 메이커별 통계라 차량별로 정확한 연식을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이 중 올드카가 상당수 있을 것이라 추정해 볼 뿐이었다.

특히 캐딜락, 롤스로이스, 링컨, 닷지, 뷰익, 폰티악, 크라이슬러 등 미국 올드카가 스웨덴에서 가장 많고 유독 인기도 좋다고 했다. 왜 그런 걸까?

북유럽 사회민주주의 국가 스웨덴에서 자본주의 상징인 미국의 클래식카가 많은 것이 좀처럼 잘 연결되지 않았다. 두 나라 거리가 가까운 것도 아닌데.


스웨덴 국민의 미국 올드카 사랑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문화가 스웨덴에 전파되면서 시작됐다는 견해가 많다.

당시 스웨덴 청년들은 로큰롤로 상징되는 미국 음악과 할리우드 영화에 빠져들었고 엘비스 프레슬리, 메릴린 먼로, 제임스 딘을 좋아하며 자연스럽게 디트로이트의 빈티지 자동차 문화를 접하게 됐다는 시각이었다.

하지만 이건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북한 등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당시 미국 문화 영향을 받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을까 싶었다. 또한 미국 차에 관심이 많은 것과 미국 차를 구매하는 건 다른 문제 아니었을까.


스웨덴은 자동차 역사가 시작된 이래 역사적인 자동차를 수집하는 오랜 전통이 있어 미국 클래식카 구매도 그 연장선에서 봐야한다는 관점도 있었다.

더불어 스웨덴은 미국처럼 넓은 땅(유럽에서 5번째로 큰 땅)과 직선 도로가 많은 나라여서 운전하기에 편하고 공간이 넓은 미국 차가 적격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1950~1970년대 생산된 미국 차는 쉽게 분해하거나 고칠 수 있어 하나의 취미로 삼기에 적당해 많이 구매했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런 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스웨덴과 미국의 라이프 스타일이 비슷하고 1950~1970년대 생산된 미국 차가 화려하면서도 유지비는 싸기 때문에 '얀테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고도 개인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어 미국 차를 많이 구매했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얀테의 법칙은 자기 자신이 특별하다거나 지나치게 뛰어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으로 북유럽에서 통용되는 일종의 불문율이다. 자신이 남보다 많이 안다고, 낫다고,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등 10가지 규칙으로 이뤄졌다. 이 법칙은 북유럽의 평등주의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로 거론된다.


한편 스웨덴 국민차인 볼보에 대한 반감이 작용한 결과라는 주장도 있었다.

예전 볼보는 주로 네모 반듯한 각진 형태의 차량을 생산했는데 이는 자국민에게 재미없고 멋없는 디자인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줬고 지루함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이런 볼보를 거부한 스웨덴 사람들이 2차 세계대전 후 미국 대중문화의 번성기에 화려하고 덩치 큰 미국차를 좋아했고 미국차를 운전하는 걸 자랑스러워하는 트렌드가 생겨났다는 해석이 존재했다.


스웨덴은 2차 세계대전에서 전쟁의 포화를 피한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였다.

이 전쟁에서 부를 축척해 전후 경제 호황을 이룬 스웨덴 국민에게 당시 미국의 대형 자동차는 저렴해 인기가 많았다는 보는 이도 있었다.

자동차 웹진 'Top Speed'의 시프리안 플로레아(Ciprian Florea) 기자는 스웨덴 운전자들은 미국 클래식 자동차에 대한 강한 열정이 있다면서 특히 두 가지가 인상적이라고 했다.

첫째는 미국 자동차는 유럽에서 그다지 인기가 없는데 스웨덴에서만큼은 예외라는 점이었다. 서구 국가 대부분에 미국 클래식카 클럽이 있지만 녹색 에너지와 전기차 등 지속가능한 사회를 꿈꾸는 스웨덴 사회 분위기와 큰 차체의 근육질 미국 올드카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관점이었다.

둘째는 미국보다 스웨덴에 완벽하게 복원된 1950년대 미국 클래식 카가 더 많다는 점이었다. 3억2500만명인 미국 인구보다 훨씬 적은 1천만명에 불과한 스웨덴에서 이런 현상은 분명 기이하다 할 만했다.

플로레아 기자는 스웨덴의 미국 올드카 숭배는 미국에서 유행한 라깰레(Raggare)라는 하위문화(subculture)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당시 스웨덴 중년 남성들이 복고풍 미국 자동차를 타고 자랑하는 것을 즐긴 데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다.

라깰레(Raggare)는 함께 놀 여자를 구하려고 차를 몰고 거리를 배회하는 사내들이라는 스웨덴어로 우리로 치면 야타족 쯤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소득을 버는 나라 중 하나인 스웨덴 사람들이 오래된 미국 자동차를 수입하고 복원하는 데 충분한 경제적 여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했다.

Västerås에서 열린 미국 올드카 대회 'Power Big Meet' (사진=m.facebook.com/MizziRizzis)

미국 독립기념일이 있는 매년 7월 첫 번째 주말에는 베스테로스(Västerås)에서 자칭 세계에서 가장 큰 빈티지 미국 올드카 대회인 'Power Big Meet'이 열린다.

1978년 첫 행사 이후 40년이 넘도록 행사가 지속되며 약 2만4000대의 미국 올드카와 15만명이 몰린다고 한다. 이 행사의 클라이맥스는 역시 도시 주변을 천천히 도는 올드카 퍼레이드다.

이 행사엔 1950~1970년대 청년기를 보낸 중장년층 외에도 부모 세대로부터 미국 올드카를 물려받은 젊은이들도 많이 참여한다고 한다.


스웨덴에는 두 가지 유형의 클래식 자동차 애호가가 있다.

세심하게 차를 관리해 거의 쇼룸 상태로 복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망가지거나 버려진 클래식 카를 타고 도로를 돌아다니며 파티를 열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부류다.

실제 거리에서 만난 올드카 중 휠, 타이어는 물론이고 차체 관리 상태가 최상급인 경우가 많았다.

한편으론 굴러갈까 싶을 정도로 망가지고 오래된 올드카를 타고 즐기는 문화도 존재했다.

스웨덴 사람들이 미국 올드카를 즐기는 방식 (사진=유튜브 American Car Cruising Gone Wild In Sweden)

스웨덴의 미국 올드카 사랑은 분명 미국 대중문화에서 영감을 받고 이식됐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스웨덴만의 고유한 문화로 탈바꿈된 경우라고 봐야할 듯했다.

미국 올드카를 타고 도심을 돌아다니거나 트렁크 속에 앉아 마치 파티를 즐기는 듯한 모습은 보는 이도 즐겁게 만들었다.

스웨덴 올드카 문화는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봐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 www.wired.com, www.nationalgeographic.com, www.topspeed.com, www.quora.com, www.classix.se, www.axeloberg.com, 유튜브 Woody piano shack, 유튜브 On demand news, 페이스북 Classic American cars in Sweden 등을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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